전국시기(戰國時期)의 혼란기를 이용한 유목민족 흉노(匈奴)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고, 진한(秦漢)제국의 성립이후에도 국가의 안전에 큰 위협으로 자리하였다. 진은 통일대업을 완성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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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Chinese
西漢 ; 帝國 ; 匈奴 ; 西北邊境 ; 漢武帝 ; 晁錯 ; 屯墾 ; 開發移民 ; XiHan Empire(西漢帝國) ; Huns(匈奴) ; northwest border ; Emperor Wu of Han(漢武帝) ; ChaoCuo(晁錯) ; Settlement(屯墾) ; emigration for development
KCI등재
학술저널
459-478(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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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기(戰國時期)의 혼란기를 이용한 유목민족 흉노(匈奴)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고, 진한(秦漢)제국의 성립이후에도 국가의 안전에 큰 위협으로 자리하였다. 진은 통일대업을 완성한 이후...
전국시기(戰國時期)의 혼란기를 이용한 유목민족 흉노(匈奴)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고, 진한(秦漢)제국의 성립이후에도 국가의 안전에 큰 위협으로 자리하였다. 진은 통일대업을 완성한 이후 제국에 대한 흉노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제국의 안전을 완전히 확보할 수는 없었다.
진의 뒤를 이은 한제국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제국 멸망 후 이어진 장기간의 내전으로 인해 국가의 생산력은 크게 훼손되었고, 사회경제적 손실은 농민들의 유민화(流民化)를 가속시켰다. 제국은 흉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책의 실시를 필요로 하였고, 이는 장성 및 도로의 건설과 변경지역의 개발이민 등과 같은 정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내외부적 환경은 이와 같은 국가방위개념의 각종 개발과 이민정책을 진행하기에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주를 통한 변경 방어정책을 건의한 인물이 晁錯(Chao Cuo)이다. 그는 진(秦)제국 당시의 변경개발 실패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면서, 사민(徙民) 둔전(屯田)정책의 실시를 통해 변경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건의는 문제(文帝)에 의해 받아들여져 실행되었지만, 대규모 개발이민정책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붕괴되었던 사회경제적 구조를 회복시키기 위한 정치가 실시되었던 “文景之治”를 거쳐 한무제(漢武帝)시기에 이르자 국가의 역량은 웅후(雄厚)해졌다. 그 결과 변경지역으로 대량의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갖추어졌고, 개발이민 초기의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요구를 보장할 수 있는 여건 또한 조성되었다. 한무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북(西北)변경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개발이민을 실시하였다.
한무제시기 대규모 개발이민이 시행된 지역은 비단 행정상 통할(統轄)이 가능하던 삭방군(朔防郡)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한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져 있었고, 당시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하였던 대규모 유민대상의 적극적 이민정책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한제국이 새롭게 개척하였던 영역의 경영과 통치에는 군사와 정주(定住) 목적을 위한 개발이 요구되었고, 그 방식은 초기 군인이 간식(墾殖)하는 것에서 점차 백성을 모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둔간(屯墾)하게 하는 개발로 발전해갔다. 이는 서한제국이 국가방위의 개념에서 시도한 서북변경지역 개발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목차 (Table of Contents)
고려후기 성리학 도입에 관한 제설의 검토와 김구의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