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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 14년(1483), 신진사류, 그리고 道學으로의 轉回-추강 남효온과 그 師友의 동향을 중심으로- = The 14th Year of King Seongjong (1483), Neo-Confucian Scholars and the Change of Neo-Confucianism-Focusing on Chugang Nam Hyo-On and his Scholar-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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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established with Confucianism as a national policy made steady progress in the history of thought from Buddhism to Confucianism by making use of national power. Thus, a genealogy of Neo- Confucianism was created such as that of Jeong Mongju to Gil Jae to Kim Sukja to Kim Jongjik to Kim Gwangpil and Jeong Yeo Chang to Jo Gwanggjo to Yi Eonjeok to Yi Hwang. However there is little revelation on the true nature of Neo-Confucianism that Neo-Confucian scholars such as Kim Gwangpil had in the period of King Seongjong. The loss of data must be the main reason, but a lack of close examination about material on their lives and the trends of the times were also crucial factors.
      This article focuses on the change in the study and thoughts of Neo-Confucian scholars in the 14th year of King Seongjong (1438) with the necessity of reflective investigation in mind. Interestingly, Kim Gwangpil moved to Yangju in the same year and finally pursued studies other than Sohak and his close friend Nam Hyo-On built Gyeongjijae, a study in Haengju and actively wrote Neo-Confucian articles such as the Essay on the Mind 心論, Essay on Human Nature 性論, Essay on Life 命論, Essay on Ghosts 鬼神論. Moreover, this is the time when Kim Si-Seup who had a huge impact on Neo-Confucian scholars at the time of Seongjong left Seoul heading towards Chuncheon with a wagon loaded with books, the Six Books 六經 and history books 子史.
      It was not an accident that Neo-Confucian scholars at the time of King Seongjong scattered in all directions living in the vicinity of Seoul and began to immerse themselves in new life and new study in the same year. It was a sign of the times caused by the deep frustration with political practices and the intellectual desires of Neo-Confucianism with King Seongjong getting into politics. The organization of Bamboo forest scholars and the incident of Seonggyungwan wall poetry in the 13th year of King Seongjong were indications that suggest the change. In the end, these young scholars did not pass Gwageo civil exam in the spring of King Seongjong’s 14th year, and took the opportunity to promote change in the direction of Neo-Confucianism through Neo-Confucian books such as Seongri Gunseo and Seongri Daejeon. However, except fr Kim Gwangpil, leading figures who struggled together such as Nam Hyo-On, Yi Simwon, and Yi Hyeonson ended up having their names removed from the genealogy of Neo-Confucianism. That is why I paid attention on their activities in the 14th year of King Seong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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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established with Confucianism as a national policy made steady progress in the history of thought from Buddhism to Confucianism by making use of national power. Thus, a genealogy of Neo- Confucianism was created such as th...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established with Confucianism as a national policy made steady progress in the history of thought from Buddhism to Confucianism by making use of national power. Thus, a genealogy of Neo- Confucianism was created such as that of Jeong Mongju to Gil Jae to Kim Sukja to Kim Jongjik to Kim Gwangpil and Jeong Yeo Chang to Jo Gwanggjo to Yi Eonjeok to Yi Hwang. However there is little revelation on the true nature of Neo-Confucianism that Neo-Confucian scholars such as Kim Gwangpil had in the period of King Seongjong. The loss of data must be the main reason, but a lack of close examination about material on their lives and the trends of the times were also crucial factors.
      This article focuses on the change in the study and thoughts of Neo-Confucian scholars in the 14th year of King Seongjong (1438) with the necessity of reflective investigation in mind. Interestingly, Kim Gwangpil moved to Yangju in the same year and finally pursued studies other than Sohak and his close friend Nam Hyo-On built Gyeongjijae, a study in Haengju and actively wrote Neo-Confucian articles such as the Essay on the Mind 心論, Essay on Human Nature 性論, Essay on Life 命論, Essay on Ghosts 鬼神論. Moreover, this is the time when Kim Si-Seup who had a huge impact on Neo-Confucian scholars at the time of Seongjong left Seoul heading towards Chuncheon with a wagon loaded with books, the Six Books 六經 and history books 子史.
      It was not an accident that Neo-Confucian scholars at the time of King Seongjong scattered in all directions living in the vicinity of Seoul and began to immerse themselves in new life and new study in the same year. It was a sign of the times caused by the deep frustration with political practices and the intellectual desires of Neo-Confucianism with King Seongjong getting into politics. The organization of Bamboo forest scholars and the incident of Seonggyungwan wall poetry in the 13th year of King Seongjong were indications that suggest the change. In the end, these young scholars did not pass Gwageo civil exam in the spring of King Seongjong’s 14th year, and took the opportunity to promote change in the direction of Neo-Confucianism through Neo-Confucian books such as Seongri Gunseo and Seongri Daejeon. However, except fr Kim Gwangpil, leading figures who struggled together such as Nam Hyo-On, Yi Simwon, and Yi Hyeonson ended up having their names removed from the genealogy of Neo-Confucianism. That is why I paid attention on their activities in the 14th year of King Seong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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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유교를 국시로 내걸고 건국한 조선은 국가권력을 활용하여, 불교로부터 유교로의 사상사적 전환을 꾸준하게 진전시켜나갔다. 그리하여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계보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김굉필․정여창으로 대표되는 성종대의 신진사류가 그 계보에서 차지하는 도학의 실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자료의 일실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그들의 생애자료와 시대적 동향에 대한 세밀한 탐구가 부족했던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고는 그런 반성적 고찰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성종 14년(1483)에 보인 신진사류의 학문적․사상적 변화에 세밀하게 주목하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김굉필은 그 해 楊州로 물러앉아 비로소 『소학』이 아닌 다른 책을 읽어가며 강학활동을 시작했고, 남효온도 幸州에 敬止齋를 지어놓고 「心論」․「性論」․「命論」․「鬼神論」과 같은 성리학적 논설을 활발하게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성종대의 신진사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김시습도 바로 그때 六經과 子史를 수레에 싣고 서울을 등지고 춘천으로 떠나버렸다.
      이처럼 성종대의 신진사류들이 같은 해에 뿔뿔이 흩어져 서울 인근에 은거하며 새로운 삶과 새로운 학문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성종 7년의 親政을 계기로 일어난 성리학에 대한 지적 요구와 정치현실에 대한 좌절이 빚어낸 시대적 징후였던 것이다. 성종 13년에 일어난 竹林羽士 결성과 성균관 壁書詩 사건은 그런 변화를 암시하는 강력한 조짐이었다. 결국 성종 14년 봄의 과거 낙방을 계기로 젊은 그들은 『근사록』․『성리군서』․『성리대전』과 같은 성리서적을 통해 도학으로의 轉回를 도모해갔다. 하지만 김굉필을 제외한 南孝溫․李深源․李賢孫처럼 함께 분투했던 선구적인 존재는 道學의 계보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본고에서 성종 14년의 잊혀져간 그들을 새삼 주목하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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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를 국시로 내걸고 건국한 조선은 국가권력을 활용하여, 불교로부터 유교로의 사상사적 전환을 꾸준하게 진전시켜나갔다. 그리하여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

      유교를 국시로 내걸고 건국한 조선은 국가권력을 활용하여, 불교로부터 유교로의 사상사적 전환을 꾸준하게 진전시켜나갔다. 그리하여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계보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김굉필․정여창으로 대표되는 성종대의 신진사류가 그 계보에서 차지하는 도학의 실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자료의 일실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그들의 생애자료와 시대적 동향에 대한 세밀한 탐구가 부족했던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고는 그런 반성적 고찰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성종 14년(1483)에 보인 신진사류의 학문적․사상적 변화에 세밀하게 주목하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김굉필은 그 해 楊州로 물러앉아 비로소 『소학』이 아닌 다른 책을 읽어가며 강학활동을 시작했고, 남효온도 幸州에 敬止齋를 지어놓고 「心論」․「性論」․「命論」․「鬼神論」과 같은 성리학적 논설을 활발하게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성종대의 신진사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김시습도 바로 그때 六經과 子史를 수레에 싣고 서울을 등지고 춘천으로 떠나버렸다.
      이처럼 성종대의 신진사류들이 같은 해에 뿔뿔이 흩어져 서울 인근에 은거하며 새로운 삶과 새로운 학문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성종 7년의 親政을 계기로 일어난 성리학에 대한 지적 요구와 정치현실에 대한 좌절이 빚어낸 시대적 징후였던 것이다. 성종 13년에 일어난 竹林羽士 결성과 성균관 壁書詩 사건은 그런 변화를 암시하는 강력한 조짐이었다. 결국 성종 14년 봄의 과거 낙방을 계기로 젊은 그들은 『근사록』․『성리군서』․『성리대전』과 같은 성리서적을 통해 도학으로의 轉回를 도모해갔다. 하지만 김굉필을 제외한 南孝溫․李深源․李賢孫처럼 함께 분투했던 선구적인 존재는 道學의 계보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본고에서 성종 14년의 잊혀져간 그들을 새삼 주목하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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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정경주, "한훤당 김굉필 도학의 전승 양상" 영남문화연구원 (22) : 7-34, 2012

      2 "한국고전종합DB"

      3 남효온, "추강집 1·2" 민족문화추진회 2007

      4 지부일, "조선초의 대명 문화교류와 『성리대전』의 수용" 동양학연구학회 3 : 1997

      5 조창규, "조선전기의 염락시풍 한시 연구" 경성대학교 대학원 2011

      6 우정임, "조선전기 성리서의 간행과 유통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2009

      7 우정임, "조선전기 <<性理大全>>의 이해과정-節要書의 編纂ㆍ刊行을 중심으로-" 부경역사연구소 (31) : 263-305, 2012

      8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 상상 2013

      9 최완식, "조선시대 간행 중국사상관계서 개황"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24 : 1990

      10 정출헌, "조선 전기 잡록과 『추강냉화』, 남효온의 깊은 슬픔과 시대정신" 민족문학사학회 (54) : 143-183, 2014

      1 정경주, "한훤당 김굉필 도학의 전승 양상" 영남문화연구원 (22) : 7-34, 2012

      2 "한국고전종합DB"

      3 남효온, "추강집 1·2" 민족문화추진회 2007

      4 지부일, "조선초의 대명 문화교류와 『성리대전』의 수용" 동양학연구학회 3 : 1997

      5 조창규, "조선전기의 염락시풍 한시 연구" 경성대학교 대학원 2011

      6 우정임, "조선전기 성리서의 간행과 유통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2009

      7 우정임, "조선전기 <<性理大全>>의 이해과정-節要書의 編纂ㆍ刊行을 중심으로-" 부경역사연구소 (31) : 263-305, 2012

      8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 상상 2013

      9 최완식, "조선시대 간행 중국사상관계서 개황"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24 : 1990

      10 정출헌, "조선 전기 잡록과 『추강냉화』, 남효온의 깊은 슬픔과 시대정신" 민족문학사학회 (54) : 143-183, 2014

      11 정출헌, "유교문명으로의 전환과 ‘시대의 스승’, 김종직과 김시습(Ⅰ)―세종-세조대 유교지식인의 자기정체성 모색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원 (80) : 7-46, 2018

      12 성현, "용재총화" 휴머니스트 2015

      13 윤용남, "완역 성리대전 6" 학고방 2018

      14 김종직, "역주 점필재집 5" 점필재 2016

      15 강명관, "여말선초 한문학의 재조명" 태학사 2003

      16 정경주, "성종조 신진사류의 문학세계" 법인문화사 1993

      17 이종범, "사림열전 2: 순례자의 노래" 아침이슬 2008

      18 심경호, "김시습평전" 돌베개 2003

      19 김시습, "국역 매월당집 1-5"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20 이병휴, "朝鮮前期 士林派의 推移 속에서 본 金宏弼의 歷史的 座標" 역사교육학회 34 : 2005

      21 정출헌, "寒暄堂 金宏弼의 師弟·師友關係와 학문세계의 여정" 한국고전번역원 45 : 161-208, 2015

      22 진순, "北溪字義" 예문서원 2005

      23 김윤제, "『성리군서구해』의 내용과 편찬경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3 : 2000

      24 권중달, "『성래대전』의 형성과 그 영향"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4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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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8-06-11 학회명변경 한글명 : 민족문화추진회 -> 한국고전번역원
      영문명 : Korean Classics Research Institute -> Institute Translation of Korea Classics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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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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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4 0.74 0.7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3 0.63 1.543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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