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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세기 후반 큐슈지역의 신라인집단과 그 행방 = Whereabout of Silla people`s community living in the late 9th century Kyu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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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004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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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에서는 신라해적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顯在化한 큐슈지역의 신라인집단이 남긴 행적을 따라가며 그들이 일본열도의 각 지역에서 전개한 생활방식을 복원해 보았다. 먼저 같은 시...

      본고에서는 신라해적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顯在化한 큐슈지역의 신라인집단이 남긴 행적을 따라가며 그들이 일본열도의 각 지역에서 전개한 생활방식을 복원해 보았다. 먼저 같은 시기 唐에 존재했던 ‘신라방’ 개념을 원용하여 큐슈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신라인 집주구역을 일본형 ‘신라방’이라 명명하고 그 구체적인 위치를 하카타 유적군으로 추정해보았 다. 9세기 후반 이후로 편년할 수 있는 많은 유물들과 주거ㆍ생활유적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는 점, 비록 12세기의 상황이긴 하지만 송상인의 차이나타운인 ‘하카타 당방’도 당해 유적군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 뛰어난 항구는 물론 선박의 빈번한 왕래 및 항상적인 교역활동을 강력 하게 지탱해주는 배후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을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다음으로는 큐슈에 있던 신라인들이 무사시와 카즈사로 이배된 배경에 대해 고찰하였다. 무사시노쿠니는 7세기말부터 한반도계 사람(이른바 ‘도래인’)들의 정착지 기능을 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인의 정주, 고려군 및 신라군의 성립 사례로 보았을 때 무사시는 동국의 여러 쿠니 가운데서도 유입해온 이국인과 가장 친연성이 있는 지역이었던 듯하다. 9세기 후반에 신라인 5명을 그곳으로 이배한 것도 그와 같은 전통적인 이국인 수용지역으로서의 성격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카즈사노쿠니로의 신라인 이배는 승려 집단을 정액사에 안치하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貞觀年間(859~877년)은 국가가 정액사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시기였고, 정액사 제도를 통해 지방사원의 사적 경제를 공적인 영역으로 편입시키고자 힘쓴 시기였다. 신라승ㆍ사미를 카즈사에 이배시킴으로써 일개 지방 의 정액사를 공적으로 활용하고, 또 동시에 그와 같은 관계확인 내지 관계설정을 통해 중앙의 지배권력을 침투시키는 방편으로 삼은 듯하다. 고대 카즈사의 중심이었던 현재의 치바현 이치하라시 영역에서 초기무역도자와 이국에서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 숟가락이 출토하여 주목을 끈다. 양쪽 모두 東國에서는 출토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극히 드문 유물이기에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겠 다. 앞으로 추가적인 검토를 통해 열도사회의 서쪽 현관문에서 출토하는 유물, 京師에 보이는 물품, 동일본에서 보이는 특수사례의 상관관계 및 물건의 유입경위 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 때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유사 유물과의 비교분석은 해당 유물의 성격을 구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무쯔로 간 조와기술자 집단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물론이고 그 기술의 전수가 요구되었던 이유는 1년 전에 발생했던 대진재(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미증유의 자연재해로 인해 파괴되고 손상된 열도의 지역사회가 이국인의 기술과 재능에 힘입어 부흥할 수 있었음이 고고학 발굴성과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요헤에누마 가마 유적에서 출토한 암막새(棟平瓦)는 무쯔로 유입된 신라인 기술자의 흔적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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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lifestyle of Silla people in regions in Japan, by following the traces of them left in Kyushu in the process of handling Silla pirate incident. Firstly, the study named the Sillan residence area in Kyushu as Japanese type ...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lifestyle of Silla people in regions in Japan, by following the traces of them left in Kyushu in the process of handling Silla pirate incident. Firstly, the study named the Sillan residence area in Kyushu as Japanese type `Silla-bang`, borrowing the concept of `Silla-bang` in Tang(唐) in the same era, and estimated its location as Hakata remains site. The area shows many traits that would support such estimation: many residence remains which date back to the late 9th century are found in the area, the area later on had `Hakata Dang-bang(To-bo)` which used to be the China town of Song(宋)`s merchants in the 12th century, and the area also secured a superb hinterland along with a pier which would strongly support trade and commerce. Next is the study on the background of moving to Musashi-no-kuni and Kazusa-no-kuni. It can be ascertained that Musashi had been the settlement for the immigrants from the Korean Peninsula, so-called `Toraijin`, from the end of the 7th century. Shown from the Kudara(Baekje) people`s settlement and the establishment of Koma(Goguryo)-gun and Shiragi(Silla)-gun, Musashi was one of the most relevant areas with foreign people among the Eastern Japan. The movement of exile site for the 5 Silla people in the late 9th century was also from the expectation on that area as the foreign accommodation. Movement of Silla people to Kazusa-no-kuni had its core purpose on enclosing the Silla`S monk group in Jogakuji. Jogan-era(859~877 AD) was a time period in which the state was paying huge attention on Jogakuji, and the government was also trying to incorporate the private economies of local temples to public arena. It seems like the central authority was aiming to utilize local Jogakuji for public purposes by moving the Silla`s monk group to Kazusa, and to interfuse central power to local temples at the same time through establishing such relationship. A bronze spoon and initial trade ceramics were found in the city of Ichihara, which used to be the center of Kazusa; it is gaining interest since it was supposedly brought by one of the foreign traders from outside. In the both cases, the relics have significant meanings in that they are very rarely found in the Eastern Japan. Additional factors - such as the relics excavated in the Japanese western entrance and in Heian-kyo, and the correlation of the special examples in the eastern regions and their route of influx - should be further explained. The relics found in China or the Korean Peninsula will help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such relics. Finally, the study comprises the consideration on the group of roof tile technician placed to Mutsu-no-kuni. The necessity to hand down the technology and skills of Silla people was to restore from the previous year(869 AD)`s damages of earthquake and tsunami. The archaeological dig in the area is proving that the damages in the region from such unprecedented natural disasters were able to be recovered with the influx of foreign technology and experts. A specific type of roof tile(Munehira-gawara) that was excavated in the Yoheenuma kilns site well supports the Sillan experts` support during that tim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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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宮城県多賀城跡調査研究所, "(多賀城市史別巻3)多賀城跡 政庁跡 本文編" 多賀城市多賀城市史編纂委員会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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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大庭康時, "(シリーズ「遺跡を学ぶ」61)中世日本最大の貿易都市 博多遺跡群" 新泉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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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시이 마사토시, "다자이후 코로칸과 장보고 시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ㆍ신라관계, In 7~10세기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諸像(일본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8

      8 정의도, "韓國古代靑銅匙箸硏究- 高麗時代 -" 석당학술원 (38) : 61-14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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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大江篤, "貞観期の定額寺-その設置と藤原氏との関係をめぐって-" 233 : 1984

      1 宮城県多賀城跡調査研究所, "(多賀城市史別巻3)多賀城跡 政庁跡 本文編" 多賀城市多賀城市史編纂委員会 1982

      2 仙台市教育委員会, "(仙台市文化財調査報告書第366集)与兵衛沼窯跡―都市計画道路「川内ㆍ南小泉線」関連遺跡 発掘調査報告書―" 仙台市教育委員会 2010

      3 大庭康時, "(シリーズ「遺跡を学ぶ」61)中世日本最大の貿易都市 博多遺跡群" 新泉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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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大庭康時, "考古学から見た博多の展開, In 中世都市 博多を掘る" 海鳥社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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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鄭淳一, "九世紀の来航新羅人と日本列島" 早稲田大学大学院 2013

      38 不破英紀, "九世紀の地方における定額寺ㆍ別院の指定について" 98 : 1991

      39 須田勉, "上総国分寺」『国分寺の創建(組織ㆍ技術編)" 吉川弘文館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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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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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59 0.59 0.6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9 0.56 1.438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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