陵墓碑는 先祖를 顯彰하려는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名士의 글과 名筆의 글씨, 아름다운 돌과 좋은 솜씨의 石匠, 刻手 등 여건이 닿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건립한 작품들이다. 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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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陵墓碑는 先祖를 顯彰하려는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名士의 글과 名筆의 글씨, 아름다운 돌과 좋은 솜씨의 石匠, 刻手 등 여건이 닿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건립한 작품들이다. 또 조...
陵墓碑는 先祖를 顯彰하려는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名士의 글과 名筆의 글씨, 아름다운 돌과 좋은 솜씨의 石匠, 刻手 등 여건이 닿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건립한 작품들이다. 또 조선시대 石造美術에서 陵墓石物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으며, 그 중 건립연대가 명확하고 상징성에서 중요한 작품이 능묘비 이다.
전국적으로 수천 기를 헤아리는 방대한 수량 때문에 능묘비 전체를 아우르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김우림, 이민식, 조연미 등 선학들의 연구와 『경기묘제석물』, 『조선왕릉』, 『금석문조사총람집』 등의 조사사업으로 대강의 윤곽이 밝혀졌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먼저 우리나라 비석이 중국과 어떠한 영향 관계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이후 조선시대 능묘비의 건립과정, 유형분류, 양식변천을 통해 조선시대 능묘비의 특성과 의의를 고찰했다.
陵墓碑의 기원은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았지만 필요한 것만 수용하고 독자성을 가미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능묘비 역시 통일신라와 고려의 陵墓碑, 高僧 塔碑를 직․간접적으로 계승, 중국의 요소를 수용해 변화하고, 조선 고유의 비석 형태를 다양하게 창안했다.
조선 개국 초 太祖가 선조의 묘소에 神道碑와 表石을 건립하고, 묘비 건립을 명시한 『朱子家禮』가 禮制의 根幹이 되어 능묘비는 조선시대 능묘석물 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왕실에는 왕릉에 신도비를 건립하다가 “임금의 功業은 國史에 기록하는데, 어찌 반드시 비석을 세워야 하겠냐”며 世祖 이후 왕릉 신도비를 건립하지 않았다. 대신 1673년 宋時烈(1607~1689)의 건의로 孝宗 寧陵에 表石을 건립해 왕릉의 기본 정보를 담고 후세에 남길 방안을 모색했다.
왕릉 신도비가 건립되지 않는 반면 사대부는 神道碑, 墓碣, 墓表 등 다양한 墓碑를 건립했는데 여건이 닿는 한 최고의 수준으로 비석을 제작하려는 것이 보편적인 흐름이었다. 이와 다르게 李滉(1501~1570)은 거대한 신도비를 건립하지 말라는 遺言을 남겼으며, 成渾(1535~1598)은 묘비에 관직을 일체 기록하지 말고 ‘昌寧成渾墓’라고 쓰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다양한 立碑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왕릉 표석 및 사대부 묘비는 年代 표기를 明의 마지막 황제 毅宗(1611~1644) 연호인 崇禎(1628~1644)을 계속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이는 金尙憲(1570~1652) 등 丙子胡亂 斥和臣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조선 후기를 대변하는 對明義理論이 능묘비에 반영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능묘비의 제작과정은 다양한 기록에 남아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石材의 주요 産地, 石材商 등을 찾았다. 비신에 사용되는 석재는 산지에 따라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江華島에서 생산되는 花崗巖과 忠州, 恩津, 礪山, 洪州, 江陰(金川)에서 大理石 등을 확인했다. 각지의 우수한 석재는 그 지역에서 건립되는 비석에 사용되기도 하고, 서울과 경기로 옮겨와 비석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비석용 석재를 각지에서 채취해 비석을 건립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17세기 후반부터 서울 한강변의 龍山, 麻浦, 西江 일대에 石材商들이 생겨났다. 석재상에서는 비석뿐만 아니라 묘소의 다양한 석조물을 제작, 판매했으며, 왕릉 및 사대부묘, 寺刹에도 석재상에서 구입한 비석 및 석물이 건립되었다. 또한 한강변의 석재상은 지방에서 돌을 구입하고, 석장과 각수가 작품을 제작, 運送, 건립하는 매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을 제작하는 石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1653)를 제작한 曺末龍은 王陵 大浮石所 都邊首로서 影職 3品의 벼슬을 받은 장인이다. 조말룡은 이 작품에서 15세기 梵鐘의 龍鈕를 모방해 龍鈕形蓋石을 만들었는데 이후 서울․경기에서 이 용뉴형개석이 제작되는 것은 이들의 주 활동지역이 경기지역이었음을 반증한다.
太宗 獻陵 神道碑(1695)를 제작한 龍頭匠 朴吉은 본래 訓練院 砲手로서 螭首 조각을 잘했다고 한다. 이 헌릉 신도비와 동일한 양식의 이수가 吳定邦 神道碑(1698), 李義培 神道碑(1703) 등에 조각되었으므로 이들 작품들은 모두 朴吉 등이 제작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비신용 석재 위에 글씨를 올리는 방법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본 연구에서 돌 위에 직접 쓰는 臨石書寫와 종이에 쓴 뒤 油紙 등에 鉤勒으로 옮기고 비석에 붙이는 北漆(北柒)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임석서사는 돌 위에 직접 글씨를 쓰기 때문에 筆意가 손상될 염려가 적었지만, 書寫者가 비석 제작지 까지 가야하고, 돌 위에 먹으로 쓴 글씨는 쉽게 문드러지고, 한쪽 면을 쓰고 돌을 뒤집어 뒷면을 또 써야 하는 등의 제작상 어려움이 많았다.
반면 북칠은 유지 등으로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筆意가 손상되는 단점이 있었으나 임석서사에 비해 편리하여 18세기부터는 북칠이 일반화되었다. 또 북칠은 集字碑 제작에 매우 적합한 방법으로 18세기에 200여 기에 달하는 집자비가 건립된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능묘비의 유형을 碑座와 碑首로 구분했으며, 비좌는 보편적인 方趺와 약 60여 기의 적은 수량이 제작된 龜趺로 나누었다. 비수는 圭首, 圓首, 荷葉首, 雲首, 螭首, 蓋石으로 구분하고, 개석을 다시 일반형 개석과 圭形蓋石, 龍鈕形蓋石, 盤龍形蓋石으로 분류하고 명칭을 새롭게 제시하기도 했다. 이 중에 圭形蓋石, 龍鈕形蓋石, 盤龍形蓋石은 개석의 형태와 상징을 고찰해 용어를 제시했으며, 荷葉首는 기존의 ‘荷葉’이라는 용어를 좀 더 명확하게 바꾼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조선시대 陵墓碑는 크게 5기로 시기 구분이 가능했다. 제1기(1392~1506)는 陵墓碑 건립이 정착되던 시기였다. 조선 개국 초부터 능묘비 건립이 활발해 고려에서 계승된 螭首龜趺, 圭首方趺 이외에도 조선의 문화에 맞는 다양한 비석 형태가 창출되었다. 名牌로 사용되던 荷葉을 비석의 머리에 조각한 荷葉首가 창안되었고, 螭首를 대체할 雲首가 생겨났으며, 이 운수에 구름과 해와 달이 조각되기도 하고, 운수와 이수가 결합하여 조선 고유의 비석 체제가 만들어졌다.
제2기(1506~1608)는 螭首와 雲首의 제작이 확산되어 양식이 다양화되던 시기이다. 제1기에서 陵墓碑 건립이 정착되면서 비석건립이 매우 활발해지는데 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이수와 운수가 제작되었다.
제3기(1608~1695)는 螭首의 지역성이 다양화되던 시기로 壬辰倭亂과 丙子胡亂 때 장인들의 이동도 많았던 듯 각 대리석 산지를 중심으로 지역 양식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래서 17세기 초에 忠州, 恩津, 洪州 등의 양식이 생겨났으며, 17세기 후반 사회가 안정되자 서울․경기에서는 다시금 각지의 우수한 석재로 최고 수준의 비석을 제작했다.
또 새로운 미감이 요구되어 龜趺는 거북 머리에서 龍頭로 변화했고, 螭首의 화려함과 蓋石의 보호 기능을 결합한 龍鈕形蓋石과 盤龍形蓋石도 이때 창안되었다. 또 『朱子家禮』를 조선식으로 이해하는데 ‘圭首’와 개석을 결합한 圭形蓋石이 창안되거나 ‘圭首’를 ‘圓首’로 이해하고 각종 예서에 圖說로 남겨 이후 圓首方趺가 많이 제작되기도 했다.
제4기(1695~1800)는 螭首의 제작이 줄어들고 蓋石이 이를 대신하게 된 시기이다. 18세기 초는 가장 화려한 陵墓碑가 제작되던 시기로 웅장한 龜趺와 화려한 용뉴형개석, 반룡형개석이 제작되었으며, 일반적인 개석에도 상단에 기와와 龍頭, 하단에 栱包가 조각되었다.
그러나 1740년대부터 이수 및 귀부의 제작이 없었으며, 蓋石方趺, 圓首方趺 등이 陵墓碑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이에 18세기 중반부터 개석은 목조가옥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강해,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등을 실제 건축물의 瓦積式 마루 형태를 모방하고, 지붕선은 懸垂曲線이 반영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용마루 등이 좀 더 장식화되면서 石灰로 양성한 마루처럼 변화했다.
더불어 方趺는 일체의 彫飾을 배제하고 치밀한 鍊磨를 한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香爐石, 望柱石 등도 문양을 없앤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18세기는 화려한 장식문양 대신에 조형성과 단순성을 강조하는 능묘 석조물이 주된 흐름이 되었다.
제5기(1800~1910)는 19세기로서 점차 정형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때는 글자를 새기는 깊이도 점점 얕아지며, 비석을 연마하는 수준이 점차 하락하고, 비신 표면을 보호하고 광택을 내는 磨光, 入蠟 과정 등이 생략 또는 형식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더불어 蓋石方趺가 지속되는 가운데 개석은 점차 정형화되어 현대로 계승되는데 조형성이 무너지고, 장식적인 용마루 등이 강조되는 퇴조 현상이 보인다.
이처럼 陵墓碑는 孝를 중시해 많은 陵墓石物이 제작되는 가운데 조선시대의 思想과 文化, 經濟 등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이다. 또 능묘비는 다른 능묘석물과 다르게 다양한 사대부들의 관심과 의지로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立碑觀이 나타나고, 撰者, 書體, 비석의 형태나 석재 등이 사대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관심은 『朱子家禮』를 적용해 圭形蓋石을 창안하거나, ‘圭首’를 圓首로 규정하고, 龍鈕形蓋石, 盤龍形蓋石 등 조선 고유의 능묘비 형태가 창출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臨石書寫나 北漆, 集字碑, 비석에 蜜蠟을 바르는 등의 제작방법도 알 수 있었다.
또 採石부터 建立, 한강의 石材商과 여기에서 구입한 비석을 각지로 運送, 건립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능묘비를 비롯한 능묘석물이 조선 후기에는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석조미술의 제작과정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 석조미술의 재료, 제작방법, 장인 등을 유추할 수 있는 단초를 열어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특징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방법론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한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Joseon period was the golden age of Korean memorial stone sculpture(陵墓石物). As suchNo discussion of Joseon stone sculpture can be complete without a consideration of its memorial stones(陵墓碑), which are impressive not just for their sh...
The Joseon period was the golden age of Korean memorial stone sculpture(陵墓石物). As suchNo discussion of Joseon stone sculpture can be complete without a consideration of its memorial stones(陵墓碑), which are impressive not just for their sheer quantity but also for their quality. This paper discusses the method of production and the symbolism of Joseon-period memorial stones, as well as the stylistic changes that occurred over time and the causes thereof.
Unlike any other previous period, in Joseon memorial stones were actively produced from the early days of the dynasty. Sindobi(神道碑) memorials were continuously erected at the grave sites of kings until the fifteenth century, but the practice then became redundant and was abruptly discontinued, given that the life and works of the country’s rulers were now being recorded by court historians. However, memorial stones were reintroduced sometime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at the suggestion of Song Si-yeol(宋時烈), though in a more modest form as grave markers designed to assist with the maintenance of the royal cemeteries.
Members of Joseon’s scholar-official class were also keenly interested in commemorating the life and accomplishments of their ancestors through memorial stones. However, illustrious scholars like Yi Hwang(李滉) preferred more unassuming types of memorials, such as myogal(墓碣) or myopyo(墓表), rather than sindobi(神道碑), for their own graves. Many who had held government offices chose to leave references to their titles and ranks out of their memorials for the sake of modesty, which was a prized virtue among Joseon scholar-officials.
Thanks to the widespread interest in memorial stones, information about the methods used to produce them can be extensively found in diverse records. Based on such information, some of the quarries that provided the stone for the memorials have been identified.
Marble quarried in Chungju(忠州, city of Chungju), Eunjin(恩津, city of Nonsan), Yeosan(礪山, city of Iksan), Hongju(洪州, Honseong-gun County) and Gangeum(江陰, Geumcheon-gun) was long favored for the production of memorials. High-quality granite(花崗巖) from Ganghwa-do(江華島) was also popularly used for stone structures and sculptures. Starting in the eighteenth century, Oseok(烏石, black sandstone) quarried in Nampo(藍浦, city of Boryeong) became the most prized type of stone for memorials.
These various types of stone, although sometimes quarried on an as-needed basis, were distributed through stone dealers. Stone dealers cropped up starting from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establishing their businesses along the valley of the Hangang River, in places like Mapo(麻浦), Seogang(西江), Tojeong(土亭) and Yongsan(龍山), and stone ferried along the river was sculpted and engraved to order in these places.
More important than the quality of the stone, however, was the quality of the epigraph. Ideally, the text had to be drafted by a man of letters with recognized literary ability and written by someone of great penmanship. There are two ways of inscribing a text on a stone surface: One consists in writing directly on the stone, and is known as “imseokseosa(臨石書寫)” while the other, similar to stenciling, is known as “bukchil.(北漆)” Bukchil and the stone vendors in the Hangang river valley were the two main factors behind the popularity of jipjabi(集字碑, memorial stones whose epigraph is a composite text made of characters selected from various calligraphic works)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re is a comparative dearth of information regarding stonemasons who sculpted memorials. However, a certain Cho Mal-ryong(曺唜龍), the stonemason who sculpted Doseonguksa-Sumiseonsa-bi(道詵國師守眉禪師碑) in Dogapsa Temple(道岬寺), was the chieftain of a group of stoneworkers who produced memorials for kings’ graves and the inventor of the yongnyu-style roof stone(龍鈕形蓋石), an original feature found only in Joseon memorials. As for Park Gil(朴吉), the maker of the sindobi at Taejong’s grave, he was a marksman belonging to the Hullyeonwon(訓練院) who excelled in dragon sculpture. Several other works of his that are similar in style to Taejong’s sindobi(太宗 獻陵 神道碑) have survived to the present day.
As the production of memorial stones gained momentum in JoseonVarious new styles emerged. Memorial stones whose top section is sculpted with lotus leaf(荷葉) or cloud designs(雲首) or those with a roof stone inspired by the yongnyu(龍鈕形蓋石, a dragon-shaped decoration placed at the summit of a bell) are just two examples. Moreover, based on a reinterpretation of Zhuzi jiali(朱子家禮, The Family Rituals of Master Zhu) in a Joseon context, memorials with a rounded top(圓首) were extensively produced, at the same time as roof stones with rounded corners(圭形蓋石).
Joseon’s memorial stone sculpture can be divided into five periods. During the first period(1392-1506), the traditional style inherited from the Goryeo period(高麗) was improved by introducing a number of original new features such as the lotus leaf-decorated top(荷葉首), the round top(圓首), or dragon sculptures on the body combined with a tortoise-shaped base(螭首龜趺). As the use of memorial stones became increasingly widespread, and their production grew commensurately, memorial stone sculptures fully came of age by the late fifteenth century.
The second period(1506-1608) witnessed a further increase in the production of memorial stones, along with the utilization of more lavish dragon decorations(螭首) and the emergence of various alternative designs such as cloud designs(雲首).
During the third period(1608-1694), memorial stones in Seoul and Gyeonggi were made primarily by stonemasons who had been displaced across the country following the outbreak of the Imjin waeran(壬辰倭亂, Japanese Invasion of 1592). For this reason, dragon sculptures were often produced in the distinctive regional styles of Chungju, Yeosan, Eunjin and Hongju where the stonemasons were based. One notable feature of this period was that the tortoise base(龜趺) sometimes featured the head of a dragon(龍頭化), rather than that of a tortoise(龜頭). The yongnyu-style roof stone(龍鈕形蓋石), which combines the protective functionality of a roof stone(蓋石) with the decorative quality of the dragon sculpture(螭首), and the ballyong-style dragon roof stone(盤龍形蓋石) also appeared in this period.
The early half of the fourth period(1694-1800) gave rise to the grandest and most lavishly-decorated memorial stones, while the simplest types of memorial stones were produced in the latter half of this period.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eighteenth century, memorials resting on a gigantic tortoise base, surmounted by a roof stone with dazzling details, inspired by wooden architecture, were produced in large numbers.
However, starting in the 1740s, the royal family ceased to commission memorials with dragon sculptures and tortoise bases(螭首龜趺), putting a damper on their production. From this point on, memorials with a roof stone and a square base(蓋石方趺), and memorials with a round top edge and a square base(圓首方趺) became the two prevailing styles. This was coupled with the simplification of the roof stone design into a more sober appearance and the production of pieces that are both more accomplished sculpturally and refined aesthetically.
During the fifth period(1800-1910), the inscriptions on memorial stones gradually became shallower. There was also a decline in the quality of the surface polishing. The steps required to protect or polish the surface of memorial stones were often skipped or less than thoroughly performed. Moreover, as memorial stones with a roof stone and a square base remained the prevailing style, the roof stone gradually became standardized.
Memorial stone sculpture constitutes an important genre of Joseon stone sculpture that remained in favor throughout the 500 years of the kingdom’s existence. Memorial stones are sculptures that directly reflect the intent of those who commissioned them, both in terms of their design and in the calligraphic style of the epigraph. The extensive availability of information about their production process, from the quarrying of stone to actual production, also makes memorial stones an important resource for understanding the production and circulation of art in late Joseon.
목차 (Table of Contents)
1 염영하, "한국종 연구",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2 金東宇, "「徐恭神道碑 試考」", 국립중앙박물관, 美術資料 제67, 2001
3 趙東元, "韓國金石文大系", 원광대학교출판국, 1971
4 趙連美, "「朝鮮時代 神道碑 硏究」",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미술사전공 석사학위논문, 2000
5 金龍善, "역주고려묘지명집성(하)",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01
6 金銀善, "「朝鮮時代 王陵 石人像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7
7 金銀善, "「朝鮮後期 陵墓 石人像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2
8 林玲愛, "「開城 恭愍王陵 石人像 硏究」", 한국미술사연구소, 講座美術史 17호, 2001
9 金銀善, "「17세기 인 숙종기의 왕릉 조각」", 한국미술사연구소, 강좌미술사 제31집, 2008
10 金銀善, "「朝鮮後期 王陵 石人 彫刻 硏究」", 한국미술사학회, 美術史學硏究 제249집, 2006
1 염영하, "한국종 연구",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2 金東宇, "「徐恭神道碑 試考」", 국립중앙박물관, 美術資料 제67, 2001
3 趙東元, "韓國金石文大系", 원광대학교출판국, 1971
4 趙連美, "「朝鮮時代 神道碑 硏究」",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미술사전공 석사학위논문, 2000
5 金龍善, "역주고려묘지명집성(하)",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01
6 金銀善, "「朝鮮時代 王陵 石人像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7
7 金銀善, "「朝鮮後期 陵墓 石人像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2
8 林玲愛, "「開城 恭愍王陵 石人像 硏究」", 한국미술사연구소, 講座美術史 17호, 2001
9 金銀善, "「17세기 인 숙종기의 왕릉 조각」", 한국미술사연구소, 강좌미술사 제31집, 2008
10 金銀善, "「朝鮮後期 王陵 石人 彫刻 硏究」", 한국미술사학회, 美術史學硏究 제249집, 2006
11 李敏植, "「정조(正祖)의 서체반정(書體反正)」", 경기사학회,京畿史學 Vol.6, 2002
12 李敏植, "「화성시(華城市)의 금석문(金石文)」", 경기사학회, 京畿史學 Vol.7, 2003
13 許捲洙, "「南冥神道碑와 後世 儒林들의 論難」",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南冥學硏究』Vol.40, 2013
14 朴聖俊, "「景福宮 勤政殿 月臺 欄干石柱像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6
15 洪承賢, "「墓碑의 출현과 後漢末 墓碑銘의 정형화」", 중국고중세사학회, 중국고중세사연구 Vol.35, 2015
16 金銀善, "「조선시대 묘 석인에 대한 미술사적 고찰」", 수원박물관, 세우다 새기다 쓰다, 2010
17 鄭敬薰, "「尤庵 宋時烈의 「南冥曺先生神道碑」 硏究」",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南冥學硏究 Vol.40, 2013
18 이 영, "「조선시대 왕릉능역의 건축과 배치형식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19 洪承賢, "「後漢代 墓碑의 성행과 建安十年 禁碑令의 반포」", 동양사학회, 東洋史學硏究 Vol.124, 2013
20 李敏植, "「朝鮮時代 陵墓碑에 관한 硏究 : 京畿道 地方을 中心으로」", 한성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석사학위논문, 1997
21 박성미, 전유근, 이재만, 이선명, 이명성, "「비파괴 기법을 이용한 태종 헌릉 神道碑의 표면 훼손도 진단」",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 46권 4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