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일제강점기 ‘광주번영회’ 연구 = A Study of the Gwangju Cooperativ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6259076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how Japanese people in local communities developed a colonial structure through ‘grassroots invasion’ after the establishment of a political and business network, with a focus on the Gwangju Cooperativ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Japanese people began to live in Gwangju in 1905, before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As farmers and small businessmen, they started to accumulate capital, and emerged as an influential group in the local communities.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which led to the era of colonization, they established a private organization called the Gwangju Cooperative and led a project to develop a colonial city.
      The Gwangju Cooperative maintained the organizational power through its repeated establishment on three occasions in 1911, 1922, and 1936. The three occasions include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the establishment of the Great Gwangju Construction Plan (1920), and the promotion of Gwangju Prefecture (1935). All of these were accompanied by large-scale land development projects. In particular, many members of the cooperative emerged in the political world during the 1920s, which provided room for their active intervention in development policies. In the process, Japanese people seem to have made considerable gains. The urban development centered on Japanese settlements, which at that time served as a driving force that greatly increased the value of their land assets.
      They established private companies and turned themselves into industrial capitalists, especially in the 1930s and 1940s. At that time, the Gwangju Cooperative members introduced an exclusive ‘interlocking directorate’ and established a robust political and business network. This seems to have greatly increased their capital accumulation rate.
      This process suggests that the Gwangju Cooperative was not merely a private organization but a ‘mediator group for the Japanese governor general’s politics’ and an outpost for ‘grassroots invasion’ that enabled Japanese colonial administration of Korea to implement colonial policies in the local communities. They took control of the political and business world in Gwangju with the active support of the national and government powers, and, as local powers, helped complete the colonial structure from the bottom of the communities.
      번역하기

      This study examines how Japanese people in local communities developed a colonial structure through ‘grassroots invasion’ after the establishment of a political and business network, with a focus on the Gwangju Cooperative during the Japanese colo...

      This study examines how Japanese people in local communities developed a colonial structure through ‘grassroots invasion’ after the establishment of a political and business network, with a focus on the Gwangju Cooperativ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Japanese people began to live in Gwangju in 1905, before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As farmers and small businessmen, they started to accumulate capital, and emerged as an influential group in the local communities.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which led to the era of colonization, they established a private organization called the Gwangju Cooperative and led a project to develop a colonial city.
      The Gwangju Cooperative maintained the organizational power through its repeated establishment on three occasions in 1911, 1922, and 1936. The three occasions include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the establishment of the Great Gwangju Construction Plan (1920), and the promotion of Gwangju Prefecture (1935). All of these were accompanied by large-scale land development projects. In particular, many members of the cooperative emerged in the political world during the 1920s, which provided room for their active intervention in development policies. In the process, Japanese people seem to have made considerable gains. The urban development centered on Japanese settlements, which at that time served as a driving force that greatly increased the value of their land assets.
      They established private companies and turned themselves into industrial capitalists, especially in the 1930s and 1940s. At that time, the Gwangju Cooperative members introduced an exclusive ‘interlocking directorate’ and established a robust political and business network. This seems to have greatly increased their capital accumulation rate.
      This process suggests that the Gwangju Cooperative was not merely a private organization but a ‘mediator group for the Japanese governor general’s politics’ and an outpost for ‘grassroots invasion’ that enabled Japanese colonial administration of Korea to implement colonial policies in the local communities. They took control of the political and business world in Gwangju with the active support of the national and government powers, and, as local powers, helped complete the colonial structure from the bottom of the communities.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광주번영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일본인들이 어떻게 ‘풀뿌리 침략’을 통한 식민구조를 만들어갔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1905년부터 광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영농과 상업 종사자가 대부분이었다. 병합 이후, 식민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들은 ‘광주번영회’라는 민간단체를 설립해 식민도시 개발사업을 주도해나가는 세력이 된다. 광주번영회는 3번의 반복적 창립(1911년‧1922년‧1936년)을 통해 조직의 동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갔다. 3번의 계기는 각각 ‘한일병합’, ‘대광주건설계획’(1920), 광주부(府)의 승격(1935) 등으로, 대규모 토지개발사업을 동반한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 이들의 대대적인 정치계 진입은 개발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또한 이들은 1930-40년대에 집중적으로 민간회사를 설립해 번영회 중심의 ‘중역겸임제’라는 방식을 도입, 공고한 정‧재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이로써 자본축적 속도가 빨라졌음을 예측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광주의 토호세력으로 성장해나가는 이 과정은, 광주번영회가 총독부의 식민정책을 지역사회에 실현시키는 ‘총독정치의 매개집단’이자, ‘풀뿌리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번역하기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광주번영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일본인들이 어떻게 ‘풀뿌리 침략’을 통한 식민구조를 만들어갔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1905년부터 광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광주번영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일본인들이 어떻게 ‘풀뿌리 침략’을 통한 식민구조를 만들어갔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1905년부터 광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영농과 상업 종사자가 대부분이었다. 병합 이후, 식민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들은 ‘광주번영회’라는 민간단체를 설립해 식민도시 개발사업을 주도해나가는 세력이 된다. 광주번영회는 3번의 반복적 창립(1911년‧1922년‧1936년)을 통해 조직의 동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갔다. 3번의 계기는 각각 ‘한일병합’, ‘대광주건설계획’(1920), 광주부(府)의 승격(1935) 등으로, 대규모 토지개발사업을 동반한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 이들의 대대적인 정치계 진입은 개발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또한 이들은 1930-40년대에 집중적으로 민간회사를 설립해 번영회 중심의 ‘중역겸임제’라는 방식을 도입, 공고한 정‧재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이로써 자본축적 속도가 빨라졌음을 예측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광주의 토호세력으로 성장해나가는 이 과정은, 광주번영회가 총독부의 식민정책을 지역사회에 실현시키는 ‘총독정치의 매개집단’이자, ‘풀뿌리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황성신문"

      2 지수걸, "한국의 근대화 공주사람들(한말일제시기 공주의 근대도시발달사)" 공주문화원 1999

      3 방광석, "한국병합 전후 서울의 ‘재한일본인’ 사회와 식민권력" 호서사학회 (56) : 173-199, 2010

      4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5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6 "조선총독부 관보"

      7 조선신문사, "조선인사흥신록"

      8 동아경제시보사, "조선은행회사요록"

      9 "조선공로자명감"

      10 천지명, "재한일본인 거류민단(1906-1914)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14

      1 "황성신문"

      2 지수걸, "한국의 근대화 공주사람들(한말일제시기 공주의 근대도시발달사)" 공주문화원 1999

      3 방광석, "한국병합 전후 서울의 ‘재한일본인’ 사회와 식민권력" 호서사학회 (56) : 173-199, 2010

      4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5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6 "조선총독부 관보"

      7 조선신문사, "조선인사흥신록"

      8 동아경제시보사, "조선은행회사요록"

      9 "조선공로자명감"

      10 천지명, "재한일본인 거류민단(1906-1914)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14

      11 이규수, "재조일본인의 추이와 존재형태 - 수량적 검토를 중심으로 -" 역사교육연구회 (125) : 37-64, 2013

      12 조미은, "일제강점기 재조선 일본인 학교와 학교조합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2010

      13 윤희철, "일제강점기 민간에 의한 도시개발: 광주지역 일본인 기업 삼평조(森平組)와 미국선교사에 의한 개발을 대상으로" 한국지역개발학회 30 (30): 133-156, 2018

      14 김경남, "일제강점 초기 자본가 중역겸임제에 의한 정치 사회적 네트워크의 형성" 한일관계사학회 (48) : 255-312, 2014

      15 윤현석, "식민지 조선의 지방단체 광주(光州)에 관한 연구" 전남대 2015

      16 오미일,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사회와 지역 단체: 원산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소 19 (19): 341-391, 2015

      17 박철규, "부산지역 일본인 사회단체의 조직과 활동 - 1910년대를 중심으로 -" 부산경남사학회 (56) : 163-206, 2005

      18 "목포신보"

      19 "매일신보"

      20 "동아일보"

      21 YAMAMOTOKUNIHIKO, "대한제국기 광주에 있어서의 오쿠무라(奥村) 남매 진종포교·실업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 새로운 사료 『메이지31년도 한국포교일기 明治三十一年度 韓国布教日記』에 의한 통설의 재검토" 민족문화연구원 (57) : 213-265, 2012

      22 북촌우일랑, "광주지방사정" 1917

      23 광주직할시사편찬위원회, "광주시사 (제2권)" 1993

      24 조선중앙경제회, "경성시민명감"

      25 이동훈, "‘한국병합’ 전후 재조일본인 교육 사업의 전개-거류민 단체에서 학교조합으로-" 일본학연구소 (32) : 117-149, 2018

      26 한지헌, "1906-1910 통감주 이사청 연구" 숙명여대 2016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3 0.63 0.5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4 0.56 1.019 0.11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