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가 아물고 조·청, 조·일관계가 한층 안정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임병양란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 서학(西學)의 전래로 일부 지식인�...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가 아물고 조·청, 조·일관계가 한층 안정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임병양란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 서학(西學)의 전래로 일부 지식인�...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가 아물고 조·청, 조·일관계가 한층 안정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임병양란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 서학(西學)의 전래로 일부 지식인들의 세계관과 인식에 대한 변화 내지 확대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특히 연행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조선후기 사회에는 전통적 예의를 숭상하는 유가적(儒家的) 규범이 엄연히 존재함과 동시에 개방된 세계로부터 새로운 문물제도에 대한 호기심과 긍정적인 관심이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타인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삶을 깨우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고 진보된 사상과 문물을 도입·전달하는 계기도 되었다.
이 글은 이러한 시대 환경에서 창작된 김지수(金芝搜)의 「서행록(西行錄)」에 나타난 대청 사행체험의 문화충격의 실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행록」은 ① 청나라 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관념적 허세 ② 병자호란으로 인한 적대감·배타심에 기초한 호인과 그들의 풍속에 대한 비하와 멸시를 주된 정조로 하여 예의지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먼저 드러내고 있다. 계속되는 여행과 함께 청나라의 거대함과 문물의 번성함을 체험한 서술자는 고정된 사고의 틀에서 점차 이탈한다.
둘째, 연경에 도착한 서술자는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의식과 긍지, 반청의식의 약화라는 변화된 사고의 틀을 가지고 청나라에 대한 절대 부정이나 절대 긍정을 유보하면서, 볼거리·먹거리를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관심을 물질적인 사항들로 돌리게 되었다.
셋째, 연경의 물화의 번성함에 대한 서술은 변화하는 세계의 기운을 조선에 전달하는데 일조 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 19세기 문화 예술에 대한 욕구를 증대시키기도 하고, 한양의 소비 향락적인 문화풍조를 형성하게 하는데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넷째, 「서행록」의 무거운 주제에 대한 회피와 물화를 중심으로 한 나열적이고 자세한 서술방식은 작자의 문화적 인식과 반청의식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문학적 형상화에 있어서는 뛰어남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다양한 견문을 사실적이면서도 일관되게 적극적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서술태도는 나름의 장처로 인식할 만 하다. 물론 이것이 이후의 사행가사에 미친 영향도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이상과 같이 사행가사 「서행록」에 나타난 19세기 대청 사행체험의 문화충격의 실상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글은 연행 혹은 통신사행의 체험을 기록한 여타의 사행가사에 나타난 서술자들의 세계관 및 문화체험의 양상을 아울러 살펴보지 못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서행록」과 함께 연행체험을 한 작자미상의 한문 사행록 「부연일기(赴燕日記)」와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