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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삶의 있어서 성령의 사역 : 깔뱅신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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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크신 은혜 중에 하나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다. 우리 속에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이 땅에서 우리를 보호...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크신 은혜 중에 하나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다. 우리 속에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이 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또한 우리가 얻을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신다. 또한 성령은 우리를 외적으로는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게 하시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온전한 인격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삶의 현실은 성령의 역사의 한쪽 면에 치우쳐 성령을 통한 바람직한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성령론에 대한 바른 신학적인 이해와 지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교회 역사를 볼 때 성령론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혹은 지나친 관심이 있었다. 교회와 신학에서는 무관심의 경향으로, 또 교회와 신학 밖에서는 지나친 열광주의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성령론이 되지 못하고 사변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경향으로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즉, 교회 밖의 신비주의 운동이나 성서 밖의 학문으로만 존재하는 성령론적 경향이 있었기에, 막상 교회 안에서 성경을 붙들고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에게는 별 영향력 없는 교리나 이론에 그치거나, 또한 소위 지나친 성령운동은 교회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람직한 성령론은 교회 안에서 성경을 들고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성령론이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도권과 역동성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이고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깔뱅 신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어느 누구의 신학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깔뱅의 신학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깔뱅 당시의 신학적 상황에서, 특히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는 가운데 성경적인 근거위에 자신의 신학을 세워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깔뱅의 성령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만 들여다보기 전에 깔뱅이 비판했던 스콜라 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을 전부 다 들여다 볼 수 없기에 깔뱅의 성령 이해와 맞물려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토마스의 은총론은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원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여 선행(善行)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공로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해서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에 있어서, 타락 이전의 인간과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다른 점은 병들지 않았거나 병든 인간, 건강하거나 허약한 인간의 차이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고 허약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인데, 죄악은 인간 영혼의 오염이고, 무질서이고, 선함의 부패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이 병들고, 허약하고, 인간 영혼이 오염되고 무질서하고 선함이 부패하게 된 것은 온전한 은총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병들고 허약한 인간, 무질서하고 오염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의 주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토마스가 말하는 은총에는 은총 자체인 창조되지 않는 은총이 있고 창조된 은총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을 때에 어떤 창조된 은총을 우리 영혼 안에 주입하여 우리 영혼에 새로운 성품을 만드는데 이것이 품성의 은총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우리 영혼 안에 이 품성적 은총의 주입으로 일어나는 것이 의화이다. 이 품성의 은총은 영혼에 새로운 형상을 만드는데, 이 새로운 형상은 보다 높고 고귀한 가치와 선을 향해 움직이는 내적 경향성을 갖는다. 새로운 형상으로 의화된 인간은 내적 경향성을 따라 자유의지를 동원해 보다 높고 영원한 가치와 선을 향해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신자 개개인의 성화를 이루게 하기에 성화의 은총이 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의화된 인간이 이 성화의 은총을 통해 타인을 구원하는 일에 유익을 끼치면 그것이 그의 공로가 되어 자신도 구원할 뿐 아니라, 남은 공로로 타인의 구원에도 유익을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는다는 것이고, 죄를 지음으로 중생하게 하는 은총을 상실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토마스는 죄로 인해 상실한 은총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은총을 회복하는 길은 성례를 통하여서라고 한다. 성례전을 통하지 않고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 없다. 세례 때 받은 은총, 즉 의화시키는 은총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하고 그에 따른 책벌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면죄부가 등장하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결정적인 오점이 되었다.
      결국 토마스의 은총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선한 행위, 업적을 쌓아 구원에 이른다는 공로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실제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인간의 행위가 강조되는 경향으로 치우쳐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의 은총론은 인간의 미덕과 품성, 또한 성화를 위한 선의 추구 등에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완전주의와 율법주의로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을 성례전이라는 제도와 성직자라는 교권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결국 성령의 주도적이고 역동적인, 또한 인격적인 사역을 제도적이고 교권적인 방편을 통해 제한시키고 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체계 위에 세워진 이러한 신학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 종교개혁자들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사변적이고 제도적이고 교권적인 중세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면서 성경적이고 성령론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깔뱅은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도 당연히 성령의 신학자로 불릴 수 있는데, 이는 깔뱅이 그의 신학 전반을 성령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깔뱅은 삼위일체와 관계 속에서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같은 동일 본질로서, 또한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깔뱅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성과 일체성을 뗄 수 없는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깔뱅은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데, 성령을 하나님 본질 안에 있는 실재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성령의 비인격적인 표현들을 다 인격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깔뱅은 성령을 단순히 성부의 심부름꾼이나 성부, 성자의 보조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협력자로 또는 사역의 주도자로, 또한 만물을 유지, 생성, 보존자로 표현하면서 신적 행동의 주체로서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다.
      깔뱅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똑 같은 하나님으로서, 신적 인격체로서, 또한 신적 행동의 주체로서 이해하고 있기에, 성령을 중생의 창시자로, 또한 성령을 성화의 주관자로, 또한 영생의 창시자로 표현하면서 성령의 구속사역을 전개해 나간다. 깔뱅은 성령의 구속사역을 ‘사람들에게 하는 특별한 성령의 사역들’로 표현한다. 깔뱅에게 있어서 사람에게 행하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 즉 외적으로, 또한 내주하여 도우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의 초점은 인간의 연약성에 있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도우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깔뱅은 인간이 얼마나 허물 많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밝히고 있다. 깔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한 것으로, 그 속에 결코 선함이 없고 성령의 비추임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비록 칭의로 의롭다고 인정받고 있지만 연약한 육체성 때문에 육욕에 따라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고 한다. 이런 연약한 인생을 돕기 위해 성령은 외적인 수단을 사용하시고 내재하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깔뱅은 교회를 성령이 사용하시는 외적 수단이라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성령으로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택함 받고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교회 안에 사역자들을 두시고, 말씀과 성례전을 두시는데 이 모든 것은 성령이 연약한 인간을 도우시기 위한 은혜의 방편들이라고 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은혜의 방편을 성례전에 한정한다면 깔뱅은 성례전과 더불어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이 성례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깔뱅은 말씀이나 성례전이나 직제나 이 모든 것은 성령의 도구로 이해하고 있다. 사역자나 말씀이나 또한 성례전도 그 자체에 효력이 있고 능력이 있거나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구로서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가치가 있고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깔뱅은 교회에게 주어진 이 모든 외적인 수단들을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성령이 외적인 수단들을 통해 연약한 우리를 돕는다면, 이보다 더 실제적인 도움은 신자 속에 내주하여 행하심으로 우리를 주도적으로 이끄신다. 깔뱅에 의하면, 신자 속에 내주하심으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의를 전가시키고, 죄 용서를 확신하게 하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지속적인 교제로 이끄실 뿐 아니라 종국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그 영광을 얻도록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에 이끌리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육체 가운데 살고 있기에, 끊임없는 죄의 유혹 속에 살고 있기에 성령께 항복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자기 부정의 삶, 십자가를 지는 삶과 계속적인 회개를 하는 가운데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깔뱅에 의하면, 이런 반복적인 회개를 통해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깔뱅이 강조하는 것은 신자에게 행하시는 이 모든 일의 주도적 실행자가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깔뱅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며 깨닫게 하는 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약속의 확증자이며 보증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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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한국교회는 전례 없는 폭발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어 왔다. 이런 폭발적인 성장의 배경에는 은사 중심의 성령 운동의 흐름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은사 중심의 ...

      한국교회는 전례 없는 폭발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어 왔다. 이런 폭발적인 성장의 배경에는 은사 중심의 성령 운동의 흐름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은사 중심의 성령 운동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의 다양한 역사의 한 결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적 현상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외적인 은사나 능력에 치우쳐 내적으로 인격적인 성장을 이루는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능력 있게 사역하도록 성령의 은사를 우리에게 주실 뿐 아니라, 내적으로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적인 성장을 이루어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다. 우리 속에 임재하시고 일생동안 함께 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성령은 여러 은총의 방편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닮고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향해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본 고(稿)는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이 어떻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어떤 은총의 방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지 살피는데 있다.
      깔뱅 당시 깔뱅의 신학적인 주 논쟁 상대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열광주의자들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제도로 바꾸었는데, 이에 대해 깔뱅은 교회 자체의 권위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열광주의자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깔뱅은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역자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특히 성령의 신학자라 할 수 있는 깔뱅은 중세 스콜라 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거추장스러운 모든 형식과 제도를 벗기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의 사역의 주도권이 성직자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며, 성령의 사역의 역동성을 회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누구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불릴 수 있는 깔뱅은 성령론에 대한 책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1)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성령의 사역과 그 은총을 강조하고, 2) 중세 스콜라 신학의 사변적 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도화된 성령의 사역 이해에서 탈피하여 말씀중심과 교회중심의 성령 사역의 주도성과 역동성을 회복하였고, 3) 더불어 성령의 사역 중에서도 신자 안에 내주하셔서 행하는 사역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이루는 성령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깔뱅의 성령론이 성령의 역동성뿐 아니라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또한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통전적인 성령론으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용한 성령론이다. 특히 깔뱅의 성령론은 형식주의적으로 치우쳐 딱딱하고 교리적인 개혁교회, 혹은 은사중심으로 치우친 한국교회에 말씀중심, 교회중심의 건전한 성령론을 회복케 하여 한국교회 전체의 성령론을 바로 이끌어 갈수 있게 한다. 또한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깔뱅의 성령론은 성령과의 깊은 교제가 가능함으로 성도 개개인의 영적, 인격적 성장을 이루어 교회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할 수 있다. 또한 앞으로의 신학은 성령론적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신학이 될 터인데 깔뱅의 통전적인 성령론은 성령론적 패러다임 신학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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