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19세기 초 이후 서양으로부터 문호개방 압박을 받았으며 19세기 말에는 태국의 영토에 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태국의 왕실 정부는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1855년에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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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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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19세기 초 이후 서양으로부터 문호개방 압박을 받았으며 19세기 말에는 태국의 영토에 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태국의 왕실 정부는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1855년에 불평등...
태국은 19세기 초 이후 서양으로부터 문호개방 압박을 받았으며 19세기 말에는 태국의 영토에 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태국의 왕실 정부는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1855년에 불평등조약을 체결했으며 1890년대 이후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말레이반도의 속령들을 유럽 국가들에게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태국 사회는 서양과의 접촉에서 항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양인들과의 관계에 때로는 능동적으로 접근하여 서양의 문물을 배우고 수용했으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로써 태국의 행정제도가 개혁되고 국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근대화와 개혁 추진의 중심에는 개혁지향적인 국왕 및 왕자들과 귀족관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태국을 강한 국가로 만들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왕 중심의 구심점을 갖는 확고한 국가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한 인식이 20세기 초 불교, 왕권, 민족 등 세 요소로 구성된 국가 정체성의 형성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이로써 근대 태국의 틀이 갖추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