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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樂浪 關聯 墓誌銘에 보이는 箕子 繼承 意識 = Consciousness of Inheriting Kija(箕子) on Epitaphs, Related with Nakrang(樂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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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문헌이나 묘지명에 보이는 낙랑 관련 인물의 성씨는 주로 韓氏와 王氏이다. 이들성씨는 『史記』 조선전의 韓陰과 王唊에서부터 찾아진다. 이들과 연관된 인물이 낙랑군 주민 중 ‘토착 조...

      문헌이나 묘지명에 보이는 낙랑 관련 인물의 성씨는 주로 韓氏와 王氏이다. 이들성씨는 『史記』 조선전의 韓陰과 王唊에서부터 찾아진다. 이들과 연관된 인물이 낙랑군 주민 중 ‘토착 조선인’에 해당한다. 낙랑군 시기인 기원후 30년 즈음에 난을 일으킨 王調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한편 낙랑군 420여 년을 크게 前期와 後期로 구분할 경우, 전기는 國邑體制가 유지되어 토착적 성격이 드러난 사회라면, 후기는 점차 郡縣體制가 강화되면서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토착 조선인’의 漢化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본다. 이때 낙랑군 지배를 위하여 漢에서 이주해 온 官人이나 대외무역에 종사하던 商人및 정치적 이유로 인해 도망해 온 사람 등 소규모 인원이 ‘移住漢人’으로 구분 가능하다. 한편 고조선 이래 중국 세력에서 벗어나, 고조선 사회에 정착해 있던 낙랑군 사회의 ‘土着漢人’들은 중국의 차별적인 정책에 의해 ‘逸民’이라 자칭하면서 자신을 위안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후기를 경과하여, 낙랑군 멸망 이후 이미 漢化된 한 씨・왕 씨 등 낙랑 계통 ‘토착 조선인’ 성씨 집단은 慕容燕의 僑郡인 낙랑군 등 중국 사회로 이주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중국 왕조의 중앙 정치에 진출하여 활동한 존재로 낙랑과의 연관성을 내세우며 기자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던 인물들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王波의 후손인 王禎・王基를 비롯하여, 王舒등이 묘지명을 통해 확인된다. 이들이 중국 北魏・北周왕조 때 왕실과 통혼하면서, 자신의 가문도 朝鮮侯였던 기자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묘지명에 기자와 자신 가문의 혈연적 연계를 주장하는 기자 계승 의식이 남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낙랑군 존속 시기에 한씨나 왕 씨 집단이 기자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경우 『唐書』 등에 고구려에는 箕子神을 섬기는 淫祀가 있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고구려가 낙랑 지역과 그 백성을 포섭하였음을 감안한다면, 낙랑군 당시에도 ‘토착 조선인’ 사회 특히 낙랑 계통 한 씨・왕 씨 집단에서는 기자의 존재를 자신 가문의 祖先으로 인식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낙랑군 당시에 크게 강조되지 못했을 것이다. 낙랑 계통 인물 또는 가문의 기자 계승 의식 강조는 6세기 초 북위・북주에서 왕실 인물과 통혼을 하게 됨에 따라, 자신들이 가계도 고대 조선의 왕실 가문이었음을 내세울 필요에서 비롯한 것이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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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Family names related with Nakrang are mainly ‘Han’ and ‘Wang’, which can be proved by several references or epitaphs. These family names come up from ‘Han Eum(韓陰)’ and ‘Wang Gyeop(王唊)’ who were recorded in Joseonjeon(朝鮮傳)...

      Family names related with Nakrang are mainly ‘Han’ and ‘Wang’, which can be proved by several references or epitaphs. These family names come up from ‘Han Eum(韓陰)’ and ‘Wang Gyeop(王唊)’ who were recorded in Joseonjeon(朝鮮傳), a part of 『Saki(史記)』. They are the natives of Nakrang, so-called "Native people of Joseon (土着朝鮮人)", who had been living in Nakrang since Old Joseon. Wang Jo(王調), who broke out rebellion in about 30 A.D. known as the period of Nakrang Commandery, is also considered to be descended from the Wangs.
      When we divide the 420 years of Nakrang Commandery into former and latter period, native cultural disposition occurs in the former period, when the society was under the feudal system(國邑體制). In the latter, centralizing system with local administration(郡縣體制) gradually settled down and the culture of the native people of Joseon harmonized with Chinese’, which can be defined as ‘Hanwha(漢化)’. Governers(官人) who came to rule Nakrang Commandery, merchants(商人) who were engaged in international trade, and several people who made an escape from political reasons are classified as ‘Immigrant Hans(移住漢人)’. Due to their immigration, it seems that ‘Native Hans(土着漢人)’ in Nakrang society who had settled down with the natives since Old Joseon comforted themselves by self-addressing ‘Ilmin(逸民), under the discriminative policy from China.
      After the fall of Nakrang Commandery, it is considered that families of the natives including the Hans and the Wangs who had already adapted Chinese culture (Hanwha), moved to temporarily so-called Nakrang-kyogoon(僑郡), at Moyong state(慕容燕), China. There are several personages who entered the political world of Bukwee(北魏), Bukjoo(北周) dynasty, keeping consciousness of inheriting Kija associated with Nakrang. They were engraved on epitaphs, known as Wang Jung(王禎), Wang Ki(王基), Wang Seo (王舒), the descendants of the Wangs.
      They got married to royal family of Bukwee, Bukjoo dynasty, emphasizing that they were also the descendants from Kija, who once was a king of Old Joseon. In this process, epitaphs showing the consciousness of inheriting Kija were made to insist their relationship with Kija. However, it isn’t sure that the Hans or the Wangs had been inheriting Kija during the period of Nakrang Commandery. In this case, 『Dangseo(唐書)』 becomes the key, as it says there was Eumsa(淫祀), serving Kija as a god, in Goguryeo. Considering Goguryoe embraced the region of Nakrang, the natives, especially the Hans and the Wangs, recognized Kija as their ancestor in the Nakrang period.
      However, this awareness might not had been significant at that time. It seems that the consciousness of inheriting Kija or personages of Nakrang descendants became crucial in about 6th century, on account of their need to insist their royalty from Old Joseon dynasty to get engaged to royal family of Bukwee, Bukjo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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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序言
      • 2. 樂浪 關聯 人物의 姓氏 資料
      • 3. 樂浪 關聯 姓氏의 實體
      • 4. 樂浪 關聯 墓誌銘 箕子 繼承 意識의 實相
      • 〈국문초록〉
      • 1. 序言
      • 2. 樂浪 關聯 人物의 姓氏 資料
      • 3. 樂浪 關聯 姓氏의 實體
      • 4. 樂浪 關聯 墓誌銘 箕子 繼承 意識의 實相
      • 5. 結語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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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權五重, "樂浪郡의 民에 대하여" 西江大東亞硏究所 (6) : 1985

      2 吳永贊, "樂浪郡의 土着勢力再編과 支配構造-기원전 1세기대 나무곽무덤의 분석을 중심으로-" 서울大國史學科 (35) : 1996

      3 尹龍九, "樂浪遺民墓誌二例" 仁荷史學會 (3) : 1995

      4 정인성, "樂浪土城의 土器" 한국고대사학회 34 : 71-124, 2004

      5 孫秉憲, "樂浪古墳의 被葬者" 한국고고학회 (17・18) : 1985

      6 李庚美, "樂浪古墳出土漆器에 對한 一考察" 韓國上古史學會 (11) : 1992

      7 尹龍九, "樂浪前期郡縣支配勢力의 種族系統과 性格" 歷史學會 (126) : 1990

      8 권오중, "중국사에서의 낙랑군" 한국고대사학회 34 : 19-40, 2004

      9 이성규, "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 서해문집 2005

      10 조법종, "낙랑군의 성격문제 -낙랑군의 낙랑국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32 : 161-190, 2003

      1 權五重, "樂浪郡의 民에 대하여" 西江大東亞硏究所 (6) : 1985

      2 吳永贊, "樂浪郡의 土着勢力再編과 支配構造-기원전 1세기대 나무곽무덤의 분석을 중심으로-" 서울大國史學科 (35) : 1996

      3 尹龍九, "樂浪遺民墓誌二例" 仁荷史學會 (3) : 1995

      4 정인성, "樂浪土城의 土器" 한국고대사학회 34 : 71-124, 2004

      5 孫秉憲, "樂浪古墳의 被葬者" 한국고고학회 (17・18) : 1985

      6 李庚美, "樂浪古墳出土漆器에 對한 一考察" 韓國上古史學會 (11) : 1992

      7 尹龍九, "樂浪前期郡縣支配勢力의 種族系統과 性格" 歷史學會 (126) : 1990

      8 권오중, "중국사에서의 낙랑군" 한국고대사학회 34 : 19-40, 2004

      9 이성규, "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 서해문집 2005

      10 조법종, "낙랑군의 성격문제 -낙랑군의 낙랑국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32 : 161-190, 2003

      11 王培新, "낙랑군(樂浪郡)과 중국내지(中國內地)의 문화관계-고고학자료를중심으로-" 檀國史學會 (48) : 2014

      12 한수진, "낙랑고고학개론" 진인진 2014

      13 윤용구, "낙랑 대방지역 신발견 문자자료와 연구동향" 한국고대사학회 (57) : 49-79, 2010

      14 조원진, "기자조선 연구의 성과와 과제" 고조선단군학회 20 : 395-441, 2009

      15 조원진, "고려시대의 기자 인식" 한국사학사학회 (32) : 181-214, 2015

      16 "魏書"

      17 김미경, "高句麗의 樂浪・帶方地域進出과 그 支配形態" 延世大史學硏究會 (17) : 1996

      18 金貞培,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出版部 1973

      19 林起煥, "譯註韓國古代金石文 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20 "譯註韓國古代金石文"

      21 "論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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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陝西省考古硏究院, "西安南郊唐貞觀十七年王怜夫婦合葬墓發掘簡報" 陝西省文物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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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박대재, "箕子 관련 商周靑銅器 銘文과 箕子東來說" 한국고대학회 (32) : 111-149, 2010

      28 "潛夫論"

      29 박대재, "準王南來說에 대한 비판적 검토 -조선유민의 마한 유입과 관련하여-" 한국고대학회 (35) : 111-137, 2011

      30 "新唐書"

      31 "慶祝宿白先生九十華誕文集" 科學出版社 2012

      32 "後漢書"

      33 홍승현, "後漢時期 邊郡 통치의 변화와 樂浪郡 ― 王調 반란의 분석을 중심으로 ―" 고려사학회 (61) : 109-143, 2015

      34 오영찬,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樂浪古墳 資料와 硏究現況" 한국고대사학회 34 : 41-70, 2004

      35 "唐書"

      36 "史記"

      37 "三國志"

      38 오강원, "『삼국지』 배송지 주와 『위략』 고조선 관련 기사" 한국학중앙연구원 35 (35): 145-175, 2012

      39 공석구, "4~5세기 고구려에 유입된 중국계 인물의 동향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32 : 131-160, 2003

      40 林起煥, "3세기~4세기초 위(魏)・진(晉)의 동방 정책-낙랑군・대방군을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36) : 2000

      41 尹龍九, "3세기 이전 中國史書에 나타난 韓國古代史像" 한국고대사학회 (14)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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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2-06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The Society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9-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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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8 1.28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89 2.254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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