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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의 영역 확장과 임진강 = Gung-ye’s Territorial Expansionand the Imjin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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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247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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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Starting from Myeongju(溟州), one of the nine provinces of Silla, Gung-ye(弓裔) advanced into Sakju(朔州) and Hanju(漢州). After taking control of Cheorwon(鐵圓) in Hanju, he reached the Imjin River(臨津江) basin. The area including the Hantan River had been geographically important since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conqueror seized control of the area and extended his influence to the Paeseo(浿西) area. Finally, he advanced into the Han River basin.
      For Gung-ye, The Imjin River had three meanings. Firstly, it was a strategic point that helped him to dominate the central part of Hanju and the Paeseo area. Secondly, the river was a bridgehead for water transportation and external exchanges. Thirdly, it was possible to strategically transform and expand by laying the foundation for maritime strategy. Lastly, he could secure a productive capacity of the Imjin River area. He actively carried out a conquest project based on the productive power of the Imjin River and surrounding areas.
      Gung-ye was considered as the strong in the north through the Battle of Binoi Castle(非惱城). He secured the former territory of Goguryeo and took the title of the country ‘Goryeo,’ then came to the throne. Based on the Buddhist identity, he had changed the name of country to Majin(摩震) and returned to Cheorwon.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the Imjin River basin for Gung-ye became not only a base since the domination of Hanju but the political center.
      번역하기

      Starting from Myeongju(溟州), one of the nine provinces of Silla, Gung-ye(弓裔) advanced into Sakju(朔州) and Hanju(漢州). After taking control of Cheorwon(鐵圓) in Hanju, he reached the Imjin River(臨津江) basin. The area including the H...

      Starting from Myeongju(溟州), one of the nine provinces of Silla, Gung-ye(弓裔) advanced into Sakju(朔州) and Hanju(漢州). After taking control of Cheorwon(鐵圓) in Hanju, he reached the Imjin River(臨津江) basin. The area including the Hantan River had been geographically important since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conqueror seized control of the area and extended his influence to the Paeseo(浿西) area. Finally, he advanced into the Han River basin.
      For Gung-ye, The Imjin River had three meanings. Firstly, it was a strategic point that helped him to dominate the central part of Hanju and the Paeseo area. Secondly, the river was a bridgehead for water transportation and external exchanges. Thirdly, it was possible to strategically transform and expand by laying the foundation for maritime strategy. Lastly, he could secure a productive capacity of the Imjin River area. He actively carried out a conquest project based on the productive power of the Imjin River and surrounding areas.
      Gung-ye was considered as the strong in the north through the Battle of Binoi Castle(非惱城). He secured the former territory of Goguryeo and took the title of the country ‘Goryeo,’ then came to the throne. Based on the Buddhist identity, he had changed the name of country to Majin(摩震) and returned to Cheorwon.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the Imjin River basin for Gung-ye became not only a base since the domination of Hanju but the political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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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弓裔는 新羅 9州 중 하나인 溟州 일대에서 출발하여 朔州와 漢州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한주의 鐵圓을 장악한 궁예는 臨津江 유역에 이르렀다. 임진강 유역은 한탄강을 포함한 지역으로 삼국시대부터 지리적 중요성이 높았던 곳이다. 궁예는 임진강 일대를 장악하면서 浿西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漢江 유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궁예에게 있어 임진강은 3가지를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한주 중부와 패서 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둘째는 水運과 대외 교류의 교두보, 셋째는 해양전략 기반 마련으로 전략적 전환 및 확대, 넷째는 임진강 일대의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궁예는 임진강과 주변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전개하였다.
      非惱城 전투를 계기로 궁예는 북방의 강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궁예는 高句麗의 옛 영역을 확보하며 국호를 高麗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불교적 정체성을 앞세우며 국호를 摩震으로 내세우고 철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듯 궁예에게 있어 임진강 유역은 한주 진출 이후부터의 근거지이자 정권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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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弓裔는 新羅 9州 중 하나인 溟州 일대에서 출발하여 朔州와 漢州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한주의 鐵圓을 장악한 궁예는 臨津江 유역에 이르렀다. 임진강 유역은 한탄강을 포함한 지역으로 삼...

      弓裔는 新羅 9州 중 하나인 溟州 일대에서 출발하여 朔州와 漢州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한주의 鐵圓을 장악한 궁예는 臨津江 유역에 이르렀다. 임진강 유역은 한탄강을 포함한 지역으로 삼국시대부터 지리적 중요성이 높았던 곳이다. 궁예는 임진강 일대를 장악하면서 浿西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漢江 유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궁예에게 있어 임진강은 3가지를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한주 중부와 패서 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둘째는 水運과 대외 교류의 교두보, 셋째는 해양전략 기반 마련으로 전략적 전환 및 확대, 넷째는 임진강 일대의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궁예는 임진강과 주변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전개하였다.
      非惱城 전투를 계기로 궁예는 북방의 강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궁예는 高句麗의 옛 영역을 확보하며 국호를 高麗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불교적 정체성을 앞세우며 국호를 摩震으로 내세우고 철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듯 궁예에게 있어 임진강 유역은 한주 진출 이후부터의 근거지이자 정권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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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도학, "후삼국시대 전쟁 연구" 주류성 2015

      2 신성재, "후삼국시대 수군활동사" 혜안 2016

      3 신호철, "후삼국사" 개신 2008

      4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2008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7 강문석, "철원환도 이전의 궁예정권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7) : 241-271, 2005

      8 경기도박물관, "임진강 1 : 환경과 삶" 경기도박물관 2001

      9 경기도박물관, "임진강" 2009

      10 "위키백과"

      1 이도학, "후삼국시대 전쟁 연구" 주류성 2015

      2 신성재, "후삼국시대 수군활동사" 혜안 2016

      3 신호철, "후삼국사" 개신 2008

      4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2008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7 강문석, "철원환도 이전의 궁예정권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7) : 241-271, 2005

      8 경기도박물관, "임진강 1 : 환경과 삶" 경기도박물관 2001

      9 경기도박물관, "임진강" 2009

      10 "위키백과"

      11 신성재, "왕건의 서남해 도서지방 경략과 해양사적 의미" 한국중세사학회 (51) : 279-314, 2017

      12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다음생각 2012

      13 김부식,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96

      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5 신성재, "궁예정권의 철원 천도와 전쟁사적 의미" 한국사연구회 (158) : 1-36, 2012

      16 정청주, "궁예의 나라 태봉: 그 역사와 문화" 일조각 2008

      17 이재범, "국호 ‘摩震’에 관하여" 신라사학회 (48) : 161-192, 2020

      18 한국고대사탐구학회, "고대 동아시아의 수군과 해양활동" 온샘 2022

      19 북원문화역사뿌리찾기 운동본부, "건등산 뿌리의 후삼국지" 두루 2005

      20 정구복,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21 정구복,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22 정구복,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2 : 번역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23 "高麗史"

      24 辛鍾遠, "雉岳山 石南寺址의 推定과 現存民俗" 17 (17): 1994

      25 "海東地圖"

      26 "朴景山墓誌銘"

      27 "朴景仁墓誌銘"

      28 "新增東國輿地勝覽"

      29 송영대, "後三國時代의 水軍 운용과 주요 水戰 및 水路 활용 검토" 한국고대사탐구학회 (38) : 211-256, 2021

      30 이재범, "後三國時代 弓裔政權 硏究"

      31 조인성, "弓裔의 後高句麗 건국과 관련한 두 문제" 신라문화연구소 (27) : 133-150, 2006

      32 이도학, "弓裔의 北原京 占領과 그 意義" 43 : 2007

      33 趙仁成, "弓裔의 勢力形成과 建國" 75 : 1993

      34 丁善溶, "弓裔의 勢力形成 過程과 都邑 選定" 97 : 1997

      35 趙仁成, "弓裔의 出生과 成長" 17 : 1989

      36 정성권, "弓裔와 梁吉의 전쟁, 비뇌성 전투에 관한 고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83) : 197-220, 2012

      37 鄭淸柱, "弓裔와 豪族勢力" 10 : 1986

      38 崔圭成, "弓裔政權의 性格과 國號의 變更" 상명여자사범대학 19 : 1987

      39 "大東輿地圖"

      40 張俊植, "世達寺의 位置에 대한 考察" 11-13 : 1999

      41 "世宗實錄地理志"

      42 "三國遺事"

      43 "三國史記"

      44 홍영호, "『삼국사기』지리지 溟州 영현 棟隄縣의 위치 비정과 의미" 고려사학회 (38) : 7-4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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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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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18 1.18 1.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6 0.97 2.484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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