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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千佛小塔의 봉안처 再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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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0716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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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석굴암 천불소탑은 일제강점기에 석굴암에서 밀반출된 또 다른 오중보탑과 더불어 주실 본존상의 전면과 후면에 배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천불소탑의 규모나 석굴 벽면 부조상과의 위계 및 요잡의례를 고려하면 본존상의 전면과 후면이라는 위치는 석탑이 봉안되기에는 불합리한 위치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통설과 달리 석탑의 봉안처가 주실 입구 좌우에 비어있는 두 감실이라는 사실을 추론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우선 천불소탑의 규모와 비례가 감실 내 봉안에 적합하도록 제작되었 으며, 석탑을 받쳤던 대석의 형태와 사리공의 위치가 평면에 배치되는 일반 석탑과 다른 점 또한 감실 봉안을 위한 구조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석굴암 감실에서 불상이 반출되었다는 기 존의 통설은 그 근거가 되는 기록의 간행시점과 내용 분석을 통해 실체가 불분명한 기록이라 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감실에서 불상이 반출되었다는 통설은 석굴암 수리공사가 완 료된 이후 복원된 빈 감실을 두고 양산된 여러 이야기들이 확대 재생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해체수리 이전에 이미 감실이 붕괴된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제석천상 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당시 감실의 붕괴는 천불소탑의 파손과 반출된 오중석탑이 십일 면관음보살상 앞으로 이동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천불소탑이 복원된 감실 안에 봉안될 경우 발생하는 감실 크기와 석탑의 부조화 문제는 석굴암 수리과정에서 감실의 구조와 규모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해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확인된 새로운 사실은 석굴암 감실 부재의 95% 이상이 해체수리를 통해 신 부재 로 대체되었고, 대체된 부재의 절반이상이 원형과는 다른 구조로 복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해체 수리 과정에서 감실의 크기가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근거 자료로 수리 이후 석굴암 주실 입구에 위치한 팔각석주 구조의 변화를 주목하였다. 해체수리 이전 첨차석을 기점으로 상단과 하단이 어긋나게 배열되었던 팔각석주의 원형은 해체 수리 이후 현재의 모습처럼 상하 수직배열로 바뀌었다. 이처럼 원형과 다르게 팔각석주를 복원한 이유는 이미 붕괴되어서 원형을 알 수 없었던 두 감실을 나머지 8개 감실의 규모에 맞춰서 복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해체 수리 이전의 상황이 반영된 복 원설계도면대로 팔각석주를 복원할 경우, 제 1감실과 제 10감실의 폭은 석주가 이동한 만큼 축소되어 그 너비는 최대 95cm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두 감실은 현존하는 8구의 감실 보살상과 동일한 규모의 불상을 봉안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불상이 봉안되지 않았다면 이 두 감실에 안치될 수 있는 대상은 당연히 천불소탑과 일제강 점기에 반출된 오중석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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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천불소탑은 일제강점기에 석굴암에서 밀반출된 또 다른 오중보탑과 더불어 주실 본존상의 전면과 후면에 배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천불소탑의 규모나 석굴 벽면 부...

      석굴암 천불소탑은 일제강점기에 석굴암에서 밀반출된 또 다른 오중보탑과 더불어 주실 본존상의 전면과 후면에 배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천불소탑의 규모나 석굴 벽면 부조상과의 위계 및 요잡의례를 고려하면 본존상의 전면과 후면이라는 위치는 석탑이 봉안되기에는 불합리한 위치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통설과 달리 석탑의 봉안처가 주실 입구 좌우에 비어있는 두 감실이라는 사실을 추론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우선 천불소탑의 규모와 비례가 감실 내 봉안에 적합하도록 제작되었 으며, 석탑을 받쳤던 대석의 형태와 사리공의 위치가 평면에 배치되는 일반 석탑과 다른 점 또한 감실 봉안을 위한 구조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석굴암 감실에서 불상이 반출되었다는 기 존의 통설은 그 근거가 되는 기록의 간행시점과 내용 분석을 통해 실체가 불분명한 기록이라 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감실에서 불상이 반출되었다는 통설은 석굴암 수리공사가 완 료된 이후 복원된 빈 감실을 두고 양산된 여러 이야기들이 확대 재생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해체수리 이전에 이미 감실이 붕괴된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제석천상 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당시 감실의 붕괴는 천불소탑의 파손과 반출된 오중석탑이 십일 면관음보살상 앞으로 이동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천불소탑이 복원된 감실 안에 봉안될 경우 발생하는 감실 크기와 석탑의 부조화 문제는 석굴암 수리과정에서 감실의 구조와 규모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해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확인된 새로운 사실은 석굴암 감실 부재의 95% 이상이 해체수리를 통해 신 부재 로 대체되었고, 대체된 부재의 절반이상이 원형과는 다른 구조로 복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해체 수리 과정에서 감실의 크기가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근거 자료로 수리 이후 석굴암 주실 입구에 위치한 팔각석주 구조의 변화를 주목하였다. 해체수리 이전 첨차석을 기점으로 상단과 하단이 어긋나게 배열되었던 팔각석주의 원형은 해체 수리 이후 현재의 모습처럼 상하 수직배열로 바뀌었다. 이처럼 원형과 다르게 팔각석주를 복원한 이유는 이미 붕괴되어서 원형을 알 수 없었던 두 감실을 나머지 8개 감실의 규모에 맞춰서 복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해체 수리 이전의 상황이 반영된 복 원설계도면대로 팔각석주를 복원할 경우, 제 1감실과 제 10감실의 폭은 석주가 이동한 만큼 축소되어 그 너비는 최대 95cm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두 감실은 현존하는 8구의 감실 보살상과 동일한 규모의 불상을 봉안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불상이 봉안되지 않았다면 이 두 감실에 안치될 수 있는 대상은 당연히 천불소탑과 일제강 점기에 반출된 오중석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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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established theory is that the small pagoda with chunbul in Seokgulam, along with other five-story pagoda smuggled, was placed in the front and rear of the statue of the Buddha, main statue, in the main chamber. However, considering the size of the small pagoda with chunbul and the status of reliefs on the cave wall and the flat structure of the main chamber, the front and rear of the main statue is not a reasonable place to enshrine the stone pagoda. Accordingly, in this paper, on the contrary to existing theory, it was deduced that, the where the stone pagoda was enshrined was the two tabernacle chambers, an empty space left and right of the entrance to the main chamber. As evidence, it was noticed that the size and the proportion of small pagoda with chunbul was designed suitable for enshrinement. Also, it was revealed the shape of under-masonry and the location of the hole for Sari that were different from other stone pagodas was for enshrinement of tabernacle chamber. Also, two tabernacle chambers in which pagoda were enshrined had been collapsed when Seokguram was discovered. Also, it was found out that, when it was disassembled for repair in 1913, it was expanded during restoration. Therefore, it can be inferred that the prototype of two tabernacle chambers of Seokguram, which is currently empty, was a good place to enshrine pag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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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stablished theory is that the small pagoda with chunbul in Seokgulam, along with other five-story pagoda smuggled, was placed in the front and rear of the statue of the Buddha, main statue, in the main chamber. However, considering the size of th...

      The established theory is that the small pagoda with chunbul in Seokgulam, along with other five-story pagoda smuggled, was placed in the front and rear of the statue of the Buddha, main statue, in the main chamber. However, considering the size of the small pagoda with chunbul and the status of reliefs on the cave wall and the flat structure of the main chamber, the front and rear of the main statue is not a reasonable place to enshrine the stone pagoda. Accordingly, in this paper, on the contrary to existing theory, it was deduced that, the where the stone pagoda was enshrined was the two tabernacle chambers, an empty space left and right of the entrance to the main chamber. As evidence, it was noticed that the size and the proportion of small pagoda with chunbul was designed suitable for enshrinement. Also, it was revealed the shape of under-masonry and the location of the hole for Sari that were different from other stone pagodas was for enshrinement of tabernacle chamber. Also, two tabernacle chambers in which pagoda were enshrined had been collapsed when Seokguram was discovered. Also, it was found out that, when it was disassembled for repair in 1913, it was expanded during restoration. Therefore, it can be inferred that the prototype of two tabernacle chambers of Seokguram, which is currently empty, was a good place to enshrine pag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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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Ⅱ. 천불소탑과 대석
      • Ⅲ. 천불소탑의 봉안처
      • Ⅳ. 석굴암 감실에서 반출된 불상의 실상
      • Ⅴ. 일제강점기 석굴암 감실구조의 변형
      • Ⅰ. 머리말
      • Ⅱ. 천불소탑과 대석
      • Ⅲ. 천불소탑의 봉안처
      • Ⅳ. 석굴암 감실에서 반출된 불상의 실상
      • Ⅴ. 일제강점기 석굴암 감실구조의 변형
      • Ⅵ. 맺음말
      • 국문초록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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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강희정, "禮敬과 善業을 위하여: 繞匝을 위한 塔과 像"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10) : 142-165, 2011

      2 고유섭, "한국미술문화사논총" 서울신문사출판국 1949

      3 이강근, "한국 고대 불전건축의 장엄법식에 관한 연구" 한국미술사교육학회 12 : 1998

      4 "인도의 불교미술" 한국국제교류재단 2006

      5 "영원한 생명의 울림 통일신라 조각" 국립중앙박물관 2008

      6 배재호, "연화장세계의 도상학" 일지사 2009

      7 장충식, "신라석탑연구" 일지사 1987

      8 정규홍, "석조문화재 그 수난의 역사" 학연문화사 2007

      9 장충식, "석장사지 출토유물과 釋良志의 彫刻 遺風"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4-5 : 1987

      10 강우방, "석불사 본존의 圖像 小考" 국립중앙박물관 35 : 1984

      1 강희정, "禮敬과 善業을 위하여: 繞匝을 위한 塔과 像"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10) : 142-165, 2011

      2 고유섭, "한국미술문화사논총" 서울신문사출판국 1949

      3 이강근, "한국 고대 불전건축의 장엄법식에 관한 연구" 한국미술사교육학회 12 : 1998

      4 "인도의 불교미술" 한국국제교류재단 2006

      5 "영원한 생명의 울림 통일신라 조각" 국립중앙박물관 2008

      6 배재호, "연화장세계의 도상학" 일지사 2009

      7 장충식, "신라석탑연구" 일지사 1987

      8 정규홍, "석조문화재 그 수난의 역사" 학연문화사 2007

      9 장충식, "석장사지 출토유물과 釋良志의 彫刻 遺風"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4-5 : 1987

      10 강우방, "석불사 본존의 圖像 小考" 국립중앙박물관 35 : 1984

      11 진홍섭, "석굴암에서 발견된 유물" 한국미술사학회 13 : 1961

      12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67

      13 성낙주, "석굴암 백년의 빛" 동국대학교출판부 2009

      14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2007

      15 박형국, "경주 석굴암 제불상에 대한 불교도상학적 고찰"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0

      16 황수영, "石窟庵에서 搬出된 塔像" 한국미술사학회 13 : 1961

      17 "石窟庵과 佛國寺-朝鮮古美術大觀(1)" 佛國寺 1995

      18 柳宗悅, "石佛寺の彫刻に就いて" 藝術 1919

      19 배진달, "石佛寺 圖像 考: 華嚴 佛身觀의 신라적 해석" 미술사연구회 (22) : 55-72, 2008

      20 "朝鮮古蹟圖譜 五, 朝鮮總督府"

      21 木村靜雄, "朝鮮に考朽して"

      22 關野貞, "新羅時代の建築" 日本建築學會 (305) : 1912

      23 김지현, "慶州錫杖寺址塼佛硏究" 한국미술사학회 266 (266): 33-62, 2010

      24 中村亮平, "慶州之美術" 藝艸堂 1929

      25 "奧田耕雲, 新羅舊都 慶州誌"

      26 "佛國寺と石窟庵" 朝鮮總督府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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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5-02-11 학회명변경 영문명 : Dongak Art History -> Association of Dongak Art History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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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47 0.47 0.7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8 0.71 0.8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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