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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나주지역의 역사지리적 위상과 고려 팔관회 = A Study on the Historical and Geological Background for Naju Palgwan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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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1736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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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팔관회는 개성과 평양에서 개최된 행사였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 羅州牧 條에 인용된 鄭道傳의 “諭父老書”에 나주에서도 팔관회가 개최된 사실이 실려 있다. 나주 팔관회는 현종 때...

      팔관회는 개성과 평양에서 개최된 행사였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 羅州牧 條에 인용된 鄭道傳의 “諭父老書”에 나주에서도 팔관회가 개최된 사실이 실려 있다. 나주 팔관회는 현종 때에 20여 년 동안 시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나주 팔관회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祭儀와 祝典이 펼쳐졌고, 宋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사절과 상인 등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나주 팔관회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 왔을 때 환대와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厚意에 대한 시혜적인 성격이 짙다. 나주를 비롯한 榮山內海 연안지역이 선사시대 이래 한·중·일을 잇는 대외교섭의 거점역할을 수행한 전통과 경험도 팔관회 개최의 배경이되었다. 나주를 비롯한 영산강 중·하류지역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남해만·덕진만·영암만등의 榮山內海가 펼쳐져 있었다. 나주와 영암 및 무안과 함평 일대는 낮은 구릉 사이를 海水가 밀고 올라와 해안지역을 이루었다. 영산내해 연안을 비롯하여 서남해지역이 동아시아 대외교섭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낙랑 등 중국 군현이 설치된 이후였다. 서남해지역의 해상세력은 낙랑에서 백제를 거쳐 가야와 왜국으로 이어지는 대외교역로의 중간 길목을 장악한 채 성장을 거듭하였다. 가야와 왜국에서 영산내해 연안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거나 장기간 동안 거주한 집단도 존재하였다. 가야와 왜국 외에 남중국 및 신라와도 교류했다. 서남해지역은 서해남부 사단항로가 열리면서 동아시아 해로의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서남해 海域은 중국과 왜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와 西域 사람들이 왕래하는 국제교류의 통로였다. 서남해지역의 해상활동은 신라의 통일 이후 다소 침체기를 겪었지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다시 활발해졌다. 서남해지역의 해상세력은 청해진의 해상활동 참여를 통해 성장 계기를 마련했다. 이들은 장보고 사후 서남해지역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영산내해 연안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태봉(고려)과 후백제 사이에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태봉은 여러 차례에 걸친 악전고투 끝에 서남해지역을 장악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견제할 수 있는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태봉의 서남해지역 통치는 고려의 건국 후 羅州道大行臺의 설치로 이어졌다. 나주는 여러 차례에 걸친 지방제도 개편 과정에서 우대를 받았다. 현종 때에는 전라도 유일의 목사고을이 되어 노령 이남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의 거점이 되었다. 현종이 나주에서 팔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우대책의 일환이었다. 나주는 팔관회가 개최되면서 宋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아라비아·일본 등의 사절과 상인이 왕래하는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나주 팔관회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지 못하고, 서경 팔관회에 자리를 다시 넘겨주었다. 팔관회가 폐지된 후 영산내해 연안지역의 대외교섭은 위축을 면할 수 없었다. 고려의 해양정책 역시 개방모드에서 폐쇄모드로 전환되어 서남해 연안과 도서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가 되었다. 고려와 조선 및 明·淸의 海禁政策은 해상을 통한 접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동아시아의 공동 번영과 평화를 증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서남해지역의 해상을 통한 대외교류 활동은 장기간 동안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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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Palgwanhoi(八關會) was actively held in Goryeo via Shilla and Taebong. It is a festival that combines traditions such as ancestor worship, natural religions and the Sunrang system as well as Buddhist ceremony. Diplomatic envoys from different count...

      Palgwanhoi(八關會) was actively held in Goryeo via Shilla and Taebong. It is a festival that combines traditions such as ancestor worship, natural religions and the Sunrang system as well as Buddhist ceremony. Diplomatic envoys from different countries and merchants participated in the festival and it was also used as a field for international trade. Goryeo Palgwanhoi was an international event held in Gaesung and Pyongyang and the record that it was also held in Naju was published in Yuburoseo(諭父老書) written by Jeong Do-Jeon. The Naju Palgwanhoi is characterized by beneficial rewards to cooperation the people showed King Hyunjong who sought safety in Naju during an invasion led by Chi Tan. At that time, Naju was a prosperous town located on the coast, not on the riverside inland. In the midstream and lower parts of Youngsan River, Naju was made up of an inland sea which included Namhae Bay, Dukjin Bay and Youngam Bay. The coastal area of Youngsan Nae Hae was a hub for foreign exchange connecting Korea, China and Japan, which was the background for holding the Palgwanhoi. The southwest area including Naju was a mid point for foreign trade with Gaya and Japan via Baekje from Nakrang. There were exchanges with South China and Shilla in addition to Gaya and Japan. The southwest area became a strategic point of an East Asian sea route as the Cross Sea Route(斜斷航路) which crossed the southern area of the west sea was opened. The southwestern sea areas were a path for international exchange between East Asians, including the Chinese and Japanese, and Arabian people. Maritime activity in the southwest area was somewhat depressed after unification by the Shilla, but it revived when Jangbogo opened Chonghaejin. Maritime forces in the southwest area had a chance to grow through participation in maritime activity at Chonghaejin. The ports of Hoijin, Naju and Gurim, Youngam were active as hubs connecting Shilla to the Tang. In the post-Three Kingdom Period, there was keen competition between Taebong and the post-Baekje to occupy Youngsan‘s an inland sea. Abundant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in the southwest sea area was an impetus for Goryeo to unify after the three kingdoms period. Naju received preferential treatment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local political systems. It became a hub for local administration which governed the south of Noryong as Naju was installed during the reign of King Hyunjong. King Hyunjong gave preferential treatment to Naju so the Palgwanhoi could be held in Naju. The Naju Palgwanhoi was a stage of coexistence, peaceful exchange, communication and reconciliation through the sea. It was held in Naju for about 20 years and was replaced by the Seogyong Palgwanhoi. Policy of vacate the island made foreign contact through the sea harder and the memory of the Naju Palgwanhoi faded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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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논문관계도

      1 김상기, "황의돈선생고희기념 사학논총" 1960

      2 서현주, "호남지역 원삼국시대 패총의 현황과 형성배경" 호남고고학보 11, 2000

      3 임영진, "호남지역 석실분과 백제의 관계, 호남고고학의 제문제" 21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1997

      4 홍보식, "한반도 남부지역의 왜계 요소-기원후 3∼6세기대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44) : 21 ~ 58, 2006

      5 김종명, "한국중세의 불교의례" 문학과 지성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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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시아루빙, "중국 벼농사 기술의 한국과 일본으로의 확산" 쌀삶문명연구 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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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최성락, "전남 서남해지역의 해상교류와 고대문화, 전남 서남해지역의 해상교류와 고대문화" 전남문화재연구소 개소기념 국제학술대회, 2014

      18 하승철, "전남 서남해지역과 가야지역의 교류양상, 전남 서남해지역의 해상교류와 고대문화" 전남문화재연구소 개소기념 국제학술대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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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白石太一郞, "二つの古代日韓交涉ルト" 熊本古墳硏究 (創刊),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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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柳澤一男, "5~6세기 한반도 서남부와 구주, 가야, 낙동강에서 영산강으로" 제12회 가야사 국제학술회의 발표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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