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세조대(1467년) 朝鮮과 明의 建州女眞 협공에 대한 연구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99767819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세조대(1467년) 朝鮮과 明의 建州女眞협공은 양국 간 이루어진 최초의 공동 작전이었다. 특히 조선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女眞을 정벌하였지만, 명은 최초의 여진 정벌이었다. 조선은 명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독자적인 建州衛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서 실행할 수 없었다.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병력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었는데, 마침 명으로부터 건주위를 함께 정벌하자는 요청이 있게 되었다.
      명의 건주의 정벌은 명의 조공 제한으로 비롯되었다고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이에 더해 명의 조공 제한이 통교위반자인 ‘僞使’를 발생시켰고, ‘위사’로 인해 정상적인 통교가 방해된 사람들[眞使]이 변경을 침범하게 된 상황을 고찰해 보았다. 1467년 명의 건주위 정벌 배경에는 이러한 측면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被虜人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군세를 감안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조선군이 建州本衛의 수장 李滿住李古納哈李豆里등을 죽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정벌 루트가 婆猪江과 兀彌府2개로 단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주본위의 수장 이만주의 거주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효과적인 전과를 올렸음을 보여준다.
      한편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은 여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죽거나 사로잡힌 총 1,200여 명(참살 924명, 포로 276명)은 당시 建州三衛인구의 약 5~1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산채 가옥 농경지가 불타거나 파괴되고 牛馬가 죽거나 약탈된 것뿐만 아니라 노동력으로 쓰인 피로인 1,172명을 빼앗기면서 경제적 타격도 심각하였다.
      이후 명은 건주인들의 보복 침입에 대비하여 遼東邊牆의 동단부분을 쌓기 시작하였고, 여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벌 후 2~3년 뒤에는 건주삼위를 부활시켰으며, 전통적인 조공체제를 재개하였다. 조선도 평안도를 中道西道東道로 나누어 방어하게 하는 한편 명과 건주삼위의 관계가 부활됨에 따라 그들과의 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명의 조공제한 및 교역소 설치라는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미 농경화가 진행된 여진 사회의 발전과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결국 건주삼위의 요동 침입은 다시 격화되었으며,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여진 협공의 기억과 성공은 12년 만인 1479년에 또다시 재현되었다.
      번역하기

      세조대(1467년) 朝鮮과 明의 建州女眞협공은 양국 간 이루어진 최초의 공동 작전이었다. 특히 조선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女眞을 정벌하였지만, 명은 최초의 여진 정벌이었다. 조선은 명의...

      세조대(1467년) 朝鮮과 明의 建州女眞협공은 양국 간 이루어진 최초의 공동 작전이었다. 특히 조선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女眞을 정벌하였지만, 명은 최초의 여진 정벌이었다. 조선은 명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독자적인 建州衛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서 실행할 수 없었다.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병력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었는데, 마침 명으로부터 건주위를 함께 정벌하자는 요청이 있게 되었다.
      명의 건주의 정벌은 명의 조공 제한으로 비롯되었다고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이에 더해 명의 조공 제한이 통교위반자인 ‘僞使’를 발생시켰고, ‘위사’로 인해 정상적인 통교가 방해된 사람들[眞使]이 변경을 침범하게 된 상황을 고찰해 보았다. 1467년 명의 건주위 정벌 배경에는 이러한 측면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被虜人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군세를 감안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조선군이 建州本衛의 수장 李滿住李古納哈李豆里등을 죽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정벌 루트가 婆猪江과 兀彌府2개로 단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주본위의 수장 이만주의 거주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효과적인 전과를 올렸음을 보여준다.
      한편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은 여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죽거나 사로잡힌 총 1,200여 명(참살 924명, 포로 276명)은 당시 建州三衛인구의 약 5~1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산채 가옥 농경지가 불타거나 파괴되고 牛馬가 죽거나 약탈된 것뿐만 아니라 노동력으로 쓰인 피로인 1,172명을 빼앗기면서 경제적 타격도 심각하였다.
      이후 명은 건주인들의 보복 침입에 대비하여 遼東邊牆의 동단부분을 쌓기 시작하였고, 여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벌 후 2~3년 뒤에는 건주삼위를 부활시켰으며, 전통적인 조공체제를 재개하였다. 조선도 평안도를 中道西道東道로 나누어 방어하게 하는 한편 명과 건주삼위의 관계가 부활됨에 따라 그들과의 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명의 조공제한 및 교역소 설치라는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미 농경화가 진행된 여진 사회의 발전과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결국 건주삼위의 요동 침입은 다시 격화되었으며,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여진 협공의 기억과 성공은 12년 만인 1479년에 또다시 재현되었다.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조선의 독자적 정벌 계획
      • 3. 명의 협공 요청과 조선의 출병
      • 4. 여진 협공의 결과와 영향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조선의 독자적 정벌 계획
      • 3. 명의 협공 요청과 조선의 출병
      • 4. 여진 협공의 결과와 영향
      • 5.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중군사관계사(고조선-조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민족 역대 파병사" 2002

      3 "태종실록"

      4 박정민, "태종대 제 1차 여진정벌과 동북면 여진관계" 백산학회 (80) : 237-264, 2008

      5 "중종실록"

      6 한성주, "조선전기 女眞 僞使의 발생과 處理 問題에 대한 고찰" 한국사학회 (100) : 531-567, 2010

      7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 지배층의 중국 인식" 푸른역사 2009

      8 한성주, "조선 세조대 毛憐衛征伐과 여진인의 從軍에 대하여" 22・23 : 2008

      9 한성주, "조선 세조대 ‘女眞 和解事’에 대한 연구 - 申叔舟의 파견을 중심으로 -" 동북아역사재단 (38) : 259-294, 2012

      10 한문종, "왜구 위사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중군사관계사(고조선-조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민족 역대 파병사" 2002

      3 "태종실록"

      4 박정민, "태종대 제 1차 여진정벌과 동북면 여진관계" 백산학회 (80) : 237-264, 2008

      5 "중종실록"

      6 한성주, "조선전기 女眞 僞使의 발생과 處理 問題에 대한 고찰" 한국사학회 (100) : 531-567, 2010

      7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 지배층의 중국 인식" 푸른역사 2009

      8 한성주, "조선 세조대 毛憐衛征伐과 여진인의 從軍에 대하여" 22・23 : 2008

      9 한성주, "조선 세조대 ‘女眞 和解事’에 대한 연구 - 申叔舟의 파견을 중심으로 -" 동북아역사재단 (38) : 259-294, 2012

      10 한문종, "왜구 위사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11 "예종실록"

      12 "연산군일기"

      13 박현모, "세종정부의 의사결정 구조와 과정에 관한 연구: 201, 2차 여진족 토벌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8 (8): 163-183, 2009

      14 노영구, "세종의 전쟁수행과 리더십" 19 : 2008

      15 이지경, "세종의 공세적 국방안보 : 대마도 정벌과 파저강 토벌을 중심으로, In 세종의 국가 경영" 지식산업사 2006

      16 "세종실록"

      17 장창하, "세종대의 여진정벌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6

      18 "세조실록"

      19 "성종실록"

      20 "문종실록"

      21 "단종실록"

      22 국방군사연구소, "韓民族戰爭通史Ⅲ-朝鮮時代前篇-" 1996

      23 边佐卿, "試論丁亥之役" 4 : 1994

      24 이인영, "申叔舟의 北征 成化三年役과 朝鮮軍, In 韓國滿洲關係史의 硏 究" 1954

      25 河內良弘, "申叔舟の女眞出兵" 71 : 1974

      26 강성문, "朝鮮시대 女眞征伐에 관한 연구" 18 : 1989

      27 이홍두, "朝鮮初期野人征伐騎馬戰" 41 : 2000

      28 한성주, "朝鮮初期朝・明二重受職女眞人의 兩屬問題" 40 : 2007

      29 河內良弘, "朝鮮世祖の観兵示威と成化3年の役" 73 : 1974

      30 河內良弘, "朝鮮の建州左衛再征と也先の亂" 67 : 1973

      31 "明英宗實錄"

      32 "明憲宗實錄"

      33 남의현, "明代遼東支配政策硏究" 강원대학교출판부 2008

      34 河內良弘, "明代女眞史の硏究" 同朋舍出版 1992

      35 江嶋壽雄, "明代淸初の女直史硏究" 中國書店 1998

      36 園田一龜, "明代建州女直史硏究(續篇)" 東洋文庫 1953

      37 "新增東國輿地勝覽"

      38 刁書仁, "成化年間明與朝鮮兩次征討建州女眞" 2 : 1999

      39 荷見守義, "咨文と勅書-成化三年の役をめぐる中朝關係" 41 : 2000

      40 한문종, "僞使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중・근세사 한국편"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05

      41 田代和生, "僞使, In 韓日歷史 共同硏究報告書-中" 韓日歷史共同硏究委員會 2005

      42 강성문, "世宗朝婆猪野人의 征伐硏究" 30 : 1986

      43 유재춘, "15세기 明의 東八站地域占據와 朝鮮의 對應" 18 : 2001

      44 김윤순, "14∼17세기 女眞經濟의 구조와 後金의 건국" 강원대학교 대학원 2013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3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한일관계사학회 -> 한일관계사연구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5 1.5 1.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17 1.09 1.872 0.13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