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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와 北方民族의 관계 연구 : 鮮卑.契丹.柔然.突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A)study on relation of koguryo(高句麗) and the northern 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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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oguryo(高句麗) was related to the various nations because of its location. Especially the relation of Koguryo and the northern nations appeared variously according to the situation of Koguryo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the northeast Asia. ...

      Koguryo(高句麗) was related to the various nations because of its location. Especially the relation of Koguryo and the northern nations appeared variously according to the situation of Koguryo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the northeast Asia.
      The first northern nation related with Koguryo was Hsien-pei(鮮卑). Hsien-pei Mu-jung tribe(慕容部) and Koguryo crashed several times because their borderlines adjoined each other. King Michon(美川王) of Koguryo pressed Mu-jung tribe by driving the foreign expansion policy. But Mu-jung tribe was getting powerful and established the Earlier Yen(前燕). The Earlier Yen invaded Koguryo and was subsided its capital, and then took King kogugwon(故國原王)s mother. Koguryo had to bring a tribute to the Earlier Yen to be come back kings mother. After that time Koguryo had been powerful through the reorganization of the national system. Koguryo drove the foreign expansion policy again.
      Meanwhile in China, the Earlier Chin(前秦) unified the northern china. But a little later the Earlier Chin had been weak that the Earlier Chin fought against the East Chin(東晋) and was defeated. The northern china was divided again and Mu-jung tribe established the Later Yen(後燕). Koguryo and the Later Yen were hostile each other.
      These time the Kitan(契丹) located in the northwest of koguryo invaded Koguryo. But Kitan did not organize the unified political system and could not intimidate Koguryo strongly. Koguryo strengthened an attack against Kitan. Kitan was getting weak and a part of its tribes became the army of Koguryo. Koguryo made use Kitan army when the war was broken out.
      Meanwhile in China, the Northern Wei(北魏) unified the northern china again and was keeping up rivalry against Jou-jan(柔然) of the north. Koguryo united with Jou-jan to restrain the Northern Wei. Koguryo succeeded in the restraint policy against the Northern Wei and drove the southward expansion policy. Koguryo transfered its capital to Pyongyang(平壤) and invaded Hansong(漢城), the capital of Paekche(百濟) later.
      In 6th century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the northeast Asia had changed extensively. The northern Wei divided the east and the west. Jon-jan was getting weak by the intimidation of Tu-ch eh(突厥). Especially Tu-ch eh invaded Koguryo to prevent an alliance of Koguryo and Jou-jan. Koguryo also lost the area of the Han river by the allied forces of Paekche and Shilla(新羅). Koguryo could not deal with an invasion of Paekche and Shilla because of its internal trobles. In 555 Tu-ch eh was collapsed Jou-jan and appeared as a supreme ruler of the northern area.
      A little later Sui(隋) and Tang(唐) established the unified empire in turn in china. Sui and Tang, both of them endeavored to weaken Tu-ch eh. That was why Tu-ch eh intimidatided the security of the empire. As well Sui and Tang invaded Koguryo several times. But they could not defeated Koguryo because of the strong resistance of Koguryo. But Tang succeeded to weaken Tu-ch eh and then invaded Koguryo with Shilla later. At that time Koguryo could not unite with Tu-ch eh because Tu-ch eh was under Tang. Finally Koguryo was in an isolated situation and was collapsed.
      Koguryo was an advantageous post in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the northeast Asis when Koguryo took the leadership in the relation with the northern nations. The other side Koguryo was in a difficult situation when Koguryo lost the leadership. In this view point the relation of Koguryo and the northern nations has an important meaning in Koguryo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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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구려는 지정학적인 특징 때문에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며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는 고구려의 국내 정세와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따라...

      고구려는 지정학적인 특징 때문에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며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는 고구려의 국내 정세와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때로는 이들과 연계하여 중국 세력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鮮卑·契丹·柔然·突厥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구려가 가장 먼저 접촉한 북방민족은 선비였다. 『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와 선비가 처음으로 접촉한 시기는 기원전 9년이나 본격적인 접촉은 3세기경 선비 慕容部가 요서 지역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모용부는 날로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선비족 내에서 부족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하여 宇文部·段部와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모용부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견제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모용부의 침입을 받았다. 그 후 고구려는 美川王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모용부와 충돌하게 되나 모용부가 前燕을 건국하고 고구려를 압박하자 고구려의 팽창정책은 위축되었다.
      전연은 중원 평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일련의 체제정비를 통해 착실히 국력을 축적하였다. 전연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에 앞서 고구려를 제압함으로써 후방의 불안 요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전연은 고구려의 방어가 치중되어 있는 평탄한 北道 대신 험난한 南道를 택해 침입을 감행하였다. 고구려는 전연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북도의 방어에 치중하다 수도가 함락 당하고 故國原王이 피난 가는 참패를 당하였다. 더군다나 고구려는 왕의 어머니가 전연에 볼모로 잡혀가자 전연과의 관계에서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왕의 어머니를 송환받기 위해 전연에 朝貢을 바치고 稱臣하였다. 그 후 고구려는 전연과의 전쟁에서 참패당한 것을 교훈 삼아 일련의 체제 정비를 통해 국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고 廣開土王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前秦이 일시적으로 북중국을 통일하나  水戰에서 東晋에게 참패당하여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자 북중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이 틈을 타 모용부는 後燕·西燕·南燕을 차례로 건국하였다. 그 중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後燕은 여러 차례 고구려와 공방전을 펼쳤지만 고구려에 밀려 점차 쇠퇴하였다.
      이 시기 선비 우문부에서 갈라져 나온 거란이 처음으로 고구려의 변경을 침입하였다. 고구려가 契丹과 처음 접촉한 것은 소수림왕 8년(378년) 때이다. 중국 史書 중 거란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책이 『魏書』이므로, 고구려가 중국보다 일찍 거란과 접촉했다고 할 수 있다. 거란에 대한 고구려의 반격은 광개토왕 때부터 이루어졌다. 광개토왕은 거란족의 일부인 稗黎를 치고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선비와 달리 거란은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못해 주변 국가들의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479년 고구려가 柔然과 공모해 地豆于 분할을 모의하였는데 그 와중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거란의 8부 연맹체가 붕괴되었다. 고구려에게 쫓긴 거란은 大凌河 동쪽으로 옮겨가 정착하여 북위에 의탁하였다. 이후로도 고구려는 거란에 대한 공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들을 附庸兵으로 활용하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유목민인 거란은 잘 훈련된 騎兵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군사력 강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는 거란을 세력권 내에 두고 적절히 통제하여 지속적으로 말을 확보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거란에 대한 정책이 주로 거란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던데 반해 柔然에 대한 정책은 이와 다른 것이었다. 북위의 북쪽에 자리잡은 유연은 거대한 유목제국을 형성하고 북위를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북위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구려는 북위와 유연의 적대적 관계를 이용하여 유연과 連和함으로써 북위를 견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처럼 북위를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정책은 유연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당시 동북아시아는 북위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유연 그리고 南朝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4강 구도 속에서 전개된 국제정세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였다. 서부 국경에서 안전을 확보한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平壤遷都를 단행하고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물길이 북위와 연결하여 고구려를 압박하려고 하자 유연과 연계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즉 고구려는 물길과 북위의 연결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에 대한 분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와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북위가 동서로 분열되고 북방에서는 突厥이 부상하여 유연을 위협하였다. 이것은 4강 구도 속에 유지되어 오던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변화를 가져왔다. 고구려는 북위의 분열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지만 돌궐의 부상에 대해서는 주목하였다. 돌궐이 鐵勒을 격파하자 고구려는 신성과 백암성을 수리하고 서북방의 국경수비를 강화하였다. 『三國史記』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와 돌궐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551년이다. 그런데 돌궐이 유연을 격파한 해가 555년이므로 551년에 고구려를 침입하였다는 것은 연대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구려와 유연의 우호적인 관계를 잘 알고 있던 돌궐은 유연을 치기에 앞서 고구려와 유연의 연계를 경계했을 것이다. 때문에 돌궐은 유연을 본격적으로 치기에 앞서 고구려를 침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돌궐이 유연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552년부터이므로 그 전 해인 551년에 고구려를 침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돌궐은 고구려와 유연의 연계를 차단한 후에 유연에 대한 공략을 본격화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 오랜 분열기를 마감하고 隋와 唐이 차례로 건국되자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급변하였다. 수·당은 건국과 동시에 북방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역대로 북방민족은 중국의 안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북방민족에 대한 대책은 중요하였다. 수는 돌궐과 혼인관계를 통해 우호관계 유지에 힘쓰나 돌궐이 중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 때는 당나라에 들어와서 이다. 당은 대규모의 토벌에 이어 羈 정책을 실시하여 돌궐세력을 약화시키고 지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당은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 전에도 고구려는 여러 차례 수와 당의 침략을 받았으나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오히려 수는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원정이 내부 반란을 야기시켜 멸망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 死後에 고구려의 지배층이 분열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한 당이 침입하자 고구려는 힘없이 무너졌다.
      과거 남북조 시기 고구려는 유연과 연계하여 북위를 적절히 견제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고 동북아시아 4강 구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7세기의 국제 상황은 고구려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북방의 돌궐은 이미 당의 지배하에 놓인 상태이고 고구려는 홀로 당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돌궐과의 연계가 곤란해진 상황에서 백제마저 멸망하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이것은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한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북방민족이 지니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를 보면 빈번한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가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일련의 체제정비를 통해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선비가 북중국에 진출하여 帝國을 건설하는 것을 보며 북방민족의 저력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이후 고구려가 북방민족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거란에 대해서는 그들의 군사력에 주목하여 附庸兵으로 활용하였고, 유연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북위를 견제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북방민족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국익을 확대하였고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궐이 중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자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고구려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의 연계가 필요했지만 그것이 곤란해지자 對중국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맞아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 속에서 내분까지 겹쳐 멸망하였다. 요컨대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는 고구려의 발전 뿐 아니라 멸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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