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眞興王代 新羅의 北方進出과 對高句麗領域向方 = The Northward Advance of Silla and the Territorial Trend with Goguryeo in the Reign of King Jinheung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0050215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신라 眞興王(540~576)은 553년에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한 후 영역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巡狩를 추진하였다. 진흥왕은 먼저 555년 10월에 北漢山에 巡幸하여 지역 내 민심을 위무하엿...

      신라 眞興王(540~576)은 553년에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한 후 영역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巡狩를 추진하였다. 진흥왕은 먼저 555년 10월에 北漢山에 巡幸하여 지역 내 민심을 위무하엿다. 556년 7월에는 比列忽州[강원도 안변]을 설치했고, 다음해에는 기존의 新州를 폐지하고 北漢山州를 두었다. 이를 통해 진흥왕은 군사적 거점을 한강 이남에서 이북으로 전진 배치하였다. 진흥왕의 북방 순수는 568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진흥왕은 곧 568년 3월~6월에 북한산 비봉에 올라 비문을 세웠고, 철령[양주-포천-영평-김화-회양-철령] 또는 추가령구조곡[양주-연천-철원-평강-분수령]을 경유한 후 안변을 거쳐 8월에는 황초령 10월에는 마운령까지 巡狩를 갔다. 결국 553~568년 신라의 北進線은 한강 하류 유역의 파주에서 북한산 일대의 전역과 양주를 거쳐 동북쪽으로 추가령구조곡 이남, 그리고 철령을 넘어 안변에서 황초령과 마운령 이남의 함흥 일대에 이르렀다.
      진흥왕은 568년에 북한산을 거쳐 함흥 일대까지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 후 곧바로 北漢山州를 폐지하고 南川州[경기도 이천]를 설치했다. 또한 比列忽州를 없애고 達忽州[강원도 고성]를 두었다. 진흥왕이 함흥 일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지역이 가지는 지리적 수세의 불리함 때문이었다. 곧 함흥 일대는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에 이르는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어 고구려의 반경에 쉽게 노출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식령을 넘어 안변을 차지하게 되면 그 이북에 있는 신라군이 고립될 우려가 컸다. 또한 남천주를 설치한 배경은 백제에 대한 방어체제 정비와 연관이 있었다. 곧 567년 들어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는 陵寺를 창건하고 사리장엄 의식을 행함으로써 내부의 결속을 다져 대신라 보복전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나아가 기존에 남조 위주로 추진하던 대중국 외교를 北齊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다변화시켰다. 위덕왕의 이와 같은 행보는 진흥왕으로 하여금 상당한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진흥황이 주치소를 후퇴시킨 후 신라와 고구려의 영역향방은 변화되었다. 다만 그것은 주로 신라 동북방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곧 진흥왕은 예비적인 안정성 차원에서 주치소는 광주산맥이라는 천역적인 방어망 아래의 달홀주[고성]에 둔 채, 비열성[안변]을 최북단 거점성으로 삼아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리고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기존에 설치했던 북한산주의 범위 내에서 신라의 영역지배가 유지되었다. 결국 6세기 중반 신라와 고구려는 한강 하류 유역에서는 북한산주를 기점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고, 동북방으로는 신라가 비열성을 차지한 채 광주산맥 이남을 안정적으로 영역지배 하였다.

      더보기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e middle 6th century, Silla occupied the Hangang basin it was occupied by Baekje. In 555, King Jinheung(r. 540~576) patrolled the Bukhansan. In 556.7, King Jinheung established Biyeolheulju at Anbyeon-gun in Gangwon-do. also the next year establi...

      In the middle 6th century, Silla occupied the Hangang basin it was occupied by Baekje. In 555, King Jinheung(r. 540~576) patrolled the Bukhansan. In 556.7, King Jinheung established Biyeolheulju at Anbyeon-gun in Gangwon-do. also the next year established Bukhansanju at Bukhansan. With this, Silla consolidated their Terresterial rule in lower reaches of Hangang basin.
      In 568, King Jinheung patrolled back the Bukhansan. and He erected sunsubi at mountaintop of Bukhansan. It was called 〈Bukhansan Silla Jinheungwang sunsubi〉. In 568.8, King Jinheung patrolled the Hwangchoryeong in Hamgyeongnam-do. subsequently In 568.10, He patrolled the Mounryeong in Hamgyeongnam-do. He also erected sunsubi at there. It was called 〈Hwangchoryeong Silla Jinheungwang sunsubi〉·〈Mounryeong Silla Jinheungwang sunsubi〉. King Jinheung went throuth Chugaryeong route at there.
      After the patrol in 568.10, King Jinheung abolished Bukhansanju and Biyeolheulju. Instead, He established Namcheonju[Icheon-si in Gyeonggi-do] and Dalhoju[Goseong-gun in Gangwon-do]. Because Hamheung reigion was indefensable area. Besides, It need to strengthen defense line to Baekje. Finally, Goguryeo and Silla’s Territorial Trend in the middle 6th century was standed fact to face Bukhansanju&Gwangjusanmaek as its starting point.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진흥왕의 北漢山 巡狩
      • Ⅲ. 진흥왕의 북진 경로와 그 범위
      • Ⅳ. 진흥왕의 州治所 후퇴와 신라·고구려 간 영역향방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진흥왕의 北漢山 巡狩
      • Ⅲ. 진흥왕의 북진 경로와 그 범위
      • Ⅳ. 진흥왕의 州治所 후퇴와 신라·고구려 간 영역향방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徐榮一, "利川 雪城山城에 대한 고찰" 32 : 58-60, 1999

      2 徐榮一, "利川 雪城山城에 대한 고찰" 32 : 42-43, 1999

      3 "六堂 崔南善 全集 6" 역락 2003

      4 신형식,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이해" 주류성출판사 2009

      5 신형식,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이해" 주류성출판사 463-, 2009

      6 박성현, "특집논문:5~6세기 고구려·신라의 경계와 그 양상" 한국역사연구회 82 (82): 57-96, 2011

      7 주경미, "중국 고대 불사리장엄 연구" 일지사 76-77, 2003

      8 김영하, "일제시기의 진흥왕순수비론-‘滿鮮’의 경역인식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학회 (52) : 435-466, 2008

      9 이부오,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신라사연구" 서경문화사 398-, 2008

      10 박윤선, "위덕왕대 백제와 남북조의 관계" 한국역사연구회 (61) : 87-117, 2006

      1 徐榮一, "利川 雪城山城에 대한 고찰" 32 : 58-60, 1999

      2 徐榮一, "利川 雪城山城에 대한 고찰" 32 : 42-43, 1999

      3 "六堂 崔南善 全集 6" 역락 2003

      4 신형식,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이해" 주류성출판사 2009

      5 신형식,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이해" 주류성출판사 463-, 2009

      6 박성현, "특집논문:5~6세기 고구려·신라의 경계와 그 양상" 한국역사연구회 82 (82): 57-96, 2011

      7 주경미, "중국 고대 불사리장엄 연구" 일지사 76-77, 2003

      8 김영하, "일제시기의 진흥왕순수비론-‘滿鮮’의 경역인식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학회 (52) : 435-466, 2008

      9 이부오,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신라사연구" 서경문화사 398-, 2008

      10 박윤선, "위덕왕대 백제와 남북조의 관계" 한국역사연구회 (61) : 87-117, 2006

      11 임효재, "아차산성-시굴조사보고서" 서울시광진구・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서울대학교박물관 210-212, 2000

      12 전덕재,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73) : 99-144, 2009

      13 李仁哲,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정에 대한 고찰"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57 : 1997

      14 신형식, "신라의 영토확장과 북한산주" 66 : 2005

      15 신형식, "신라의 영토 확장과 북한산주" 66 : 2005

      16 박성현,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 제도의 정비 과정"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0

      17 황보경, "신라문화연구" 주류성 41-56, 2009

      18 이인철,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일지사 2003

      19 강봉룡, "순수비에 담긴 진흥왕의 꿈과 야망, In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3

      20 "삼국시대 금석문 연구" 서경문화사 218-235, 2009

      21 서영일, "산성 분포로 본 신라의 한강유역 방어체계" 중부고고학회 9 (9): 115-143, 2010

      22 서영일, "산성 분포로 본 신라의 한강유역 방어체계" 중부고고학회 9 (9): 115-143, 2010

      23 김윤우, "북한산 역사지리" 범우사 19-23, 1995

      24 "백제중흥을 꿈꾸다 능산리사지" 국립부여박물관 147-, 2010

      25 주경미, "백제의 사리신앙과 미륵사지 출토 사리장엄구, 대발견 사리장엄! 彌勒寺의 再照明" 164-165, 2009

      26 "백제 사비성 시대 연구" 일지사 42-49, 2010

      27 박진욱, "동해안일대의 신라무덤에 대하여, In 고고민속" 사회과학원출판사 17-19, 1967

      28 김희선, "동아시아 도성제와 고구려 장안성" 지식산업사 77-, 2010

      29 신광섭, "능사 다시 찾은 백제의 마지막 모습, 泗沘都邑期의 百濟, In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5"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33-234, 2007

      30 전덕재,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신라문화연구소 34 (34): 31-76, 2009

      31 김창호, "고신라 금석문의 연구" 서경문화사 70-, 2007

      32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32-434, 1999

      33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34 김진한,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0

      35 임기환, "고구려 신라의 한강 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소 18 (18): 1-33, 2002

      36 李昊榮, "高句麗・新羅의 漢江流域 進出 問題" 檀國大學校 史學會 18 : 1984

      37 盧泰敦, "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韓國史硏究會 13 : 1976

      38 盧泰敦, "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13 : 1976

      39 "韓國古代社會의 軍事와 政治"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0-199, 2002

      40 姜眞周, "附加口緣臺附長頸壺를 통해 본 新羅의 漢江流域 진출, In 경기도의 고고학" 주류성 659-, 2007

      41 金正喜, "阮堂先生全集"

      4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제2권, 신라1・가야 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43 鄭求福, "譯註 三國史記 3"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16-, 1997

      44 金周成, "聖王의 漢江流域 占領과 喪失, In 百濟史上의 戰爭" 書景文化社 2000

      45 양기석, "管山城 戰鬪의 樣相과 影響"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12 : 2008

      46 津田左右吉, "眞興王征服地域考, In 朝鮮歷史地理 1"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09-118, 1913

      47 池內宏, "眞興王の戊子巡境碑と新羅の東北境" 朝鮮總督府 1929

      48 李丙燾, "眞興大王의 偉業, In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672-, 1976

      49 김수태, "百濟 威德王의 정치와 외교" 한국인물사연구소 2 : 168-173, 2004

      50 梁起錫, "百濟 威德王代의 對外關係-對中關係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學會 19 : 232-, 2003

      51 김병남, "百濟 威德王代 정치상황과 대외관계" 한국상고사학회 43 : 68-69, 2004

      52 양기석, "百濟 威德王代 王興寺의 創建과 背景" 한국문화사학회 31 (31): 5-23, 2009

      53 김수태, "百濟 威德王代 扶餘 陵山里 寺院의 創建"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27 : 44-, 1998

      54 李道學, "王興寺址 舍利器 銘文 分析을 통해서 본 百濟 威德王代의 政治와 佛敎" 142 : 2009

      55 "滿鮮史硏究 上世 第二冊" 吉川弘文館 18-23, 1960

      56 韓鎭書, "海東繹史續 卷7, 地理考7"

      57 韓鎭書, "海東繹史續 卷7, 地理考7"

      58 "月山 李昊榮의 韓國史學 遍歷" 서경문화사 2007

      59 盧重國, "昌寧 眞興王拓境碑, In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64-, 1992

      60 "日本書紀"

      61 李道學, "新羅의 北進經略에 관한 新考察" 慶州史學會 6 : 1987

      62 金甲童, "新羅와 百濟의 管山城 戰鬪" 白山學會 52 : 1999

      63 今西龍, "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考, In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33

      64 노용필,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一潮閣 53-, 1996

      65 崔南善, "新羅眞興王の在來三碑と新出現の磨雲嶺碑" 2 : 1930

      66 金瑛河, "新羅時代 巡狩의 성격" 14 : 1979

      67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신서원 104-106, 1998

      68 姜鳳龍, "新羅 地方統治體制 연구" 서울大學校 大學院 1994

      69 강경구, "新羅 北漢山州의 新考察, In 신라의 북방 영토와 김유신" 학연문화사 97-98, 2007

      70 金昌謙, "新羅 中祀의 ‘四海’와 海洋信仰" 한국고대사학회 (47) : 159-196, 2007

      71 金昌鎬, "新羅 中古期 金石文의 人名表記(1)" 22 : 1983

      72 皇甫慶, "新州 位置에 대한 연구" 53 : 1999

      73 葛城末治, "揚州新羅眞興王巡狩碑, In 朝鮮金石攷" 아세아문화사 영인 150-151, 1979

      74 김태식, "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왕 ‘순수비’" 68 : 2004

      75 "大東地志"

      76 이우태, "北漢山碑의 新考察" 서울학연구소 12 : 8-, 1999

      77 金昌鎬, "北漢山碑에 보이는 甲兵 문제" 25 : 1992

      78 盧重國, "北漢山 眞興王巡狩碑, In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1992

      79 李丙燾, "北漢山 文殊寺 內의 石窟" 61 : 1-3, 1986

      80 서영일, "京畿北部地域 高句麗 堡壘 考察" 한국문화사학회 17 (17): 63-80, 2002

      81 주보돈, "二聖山城 출토 木簡과 道使, In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298-301, 2002

      82 權悳永, "三國時代 新羅의 海洋進出과 國家發展" 2 (2): 210-, 1999

      83 "三國史記"

      84 張彰恩,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會 111 : 10-18, 2011

      85 朱甫暾, "6世紀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 11 : 1997

      86 徐榮一, "6~7世紀 高句麗 南境 考察" 高句麗硏究會 11 : 2001

      87 "6~7世紀 高句麗 南境 考察" 11 : 32-, 2001

      88 盧泰敦, "5~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 8 : 1996

      89 朱甫暾, "5~6세기 중엽 高句麗와 新羅의 관계-신라의 漢江流域 진출과 관련하여-" 11 : 2006

      90 徐榮一, "5~6세기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경영" 檀國大學校 石宙善紀念博物館 20 : 2005

      91 盧重國, "5~6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과 상실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재단 11 : 2006

      92 李成制, "570年代 高句麗의 對倭交涉과 그 意味-새로운 對外戰略 추진 배경과 내용에 대한 재검토"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 : 59-, 2009

      93 李丙燾, "(僞)北漢山州의 置廢問題, In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705-709, 1976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 0.5 0.4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1 0.58 0.981 0.08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