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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인물됨과 처신에 대한 일고 = A Study on Bobaekdang Kim Gye-haeng’s Noble Spirit and Sensible De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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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Bobaekdang Kim Gye-haeng’s noble spirit and sensible deeds. Bobaekdang entered government service at the age of 50 as a Saheonbu Gamchal and maintained his public office for about 20 years. Except for his app...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Bobaekdang Kim Gye-haeng’s noble spirit and sensible deeds. Bobaekdang entered government service at the age of 50 as a Saheonbu Gamchal and maintained his public office for about 20 years. Except for his appointment as Goryeonghyeongam, one of the provincial government posts, he passed through all the key posts referred to as Samsa: Saheonbu, Saganwon, and Hongmungwan. Also, in his later years, he served as a Daesaseong and Daesagan, too. In his senescence, he faced a series of political confusion, for example, Yeonsangun’s tyranny and massacre of scholars or Jungjongbanjeong, but despite all the hardships, he cultivated his body and soul grounded on Manhujeong built in his hometown and led his family amicably and stably.
      Based on review over advanced research as well as materials including Silgi and Silrok, this author has considered Bobaekdang’s noble spirit and sensible deeds in three aspects: practicing ‘Geojungyakgyeong’, pursuing ‘Nandeukhodo’, and avoiding ‘Seongmungwajeong’. From many parts of them, we can find the fact that he was not a person outdated or narrow-minded but a figure valuing those that are practical and substantial. He said, “I don’t have any treasure in my house, but if I have to choose one, it is integrity.” He never sought decades of wealth and prosperity from his personal embarrassment but always behaved himself for the sake of Yubangbaekse.
      Being true to the name, Bobaekdang, he lived his life integrally. Although his posthumous work is hardly left and not much has been transmitted up to now, we can still see his character was noble enough to motivate coming scholars regardless of factions. As a result, around the reign of Cheoljong, he was promoted from Ijochampan up to Ijopanseo, and in the reign of Gojong, he was finally granted the posthumous epithet of Jeongheongong. Going through all the hardships in his government service, he behaved himself consistently to his own faith and lived out his allotted span of life. Therefore, the survivals of his have been constantly maintained in the mind of later generations up until now although hundreds of years have passed since 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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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에서는 보백당 김계행의 인물됨과 처신에 대해 고찰했다. 보백당은 50세에 사헌부 감찰로 벼슬길에 나아가 20년 가까운 세월을 관직에 몸담았다. 외직인 고령현감에 부임한 것을 제외하...

      본고에서는 보백당 김계행의 인물됨과 처신에 대해 고찰했다. 보백당은 50세에 사헌부 감찰로 벼슬길에 나아가 20년 가까운 세월을 관직에 몸담았다. 외직인 고령현감에 부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삼사로일컬어지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만년에는 대사성과 대사간을 지냈다. 비록 그의 노년이 연산군의 폭정과 사화, 중종반정 등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맞물려 있었지만 그는 이러한고난 가운데서도 고향에 세운 만휴정을 기반으로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며, 화락하고 안정되게 가문을 이끌어 나갔다.
      본고에서는 실기, 실록 등의 자료와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보백당의 인물됨과 처신을 ‘거중약경擧重若輕’의 실천, ‘난득호도難得糊塗’의 지향, ‘성문과정聲聞過情’의 경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했다. 그가 고루하고 편협한 사고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실질과 실제적 가치를 중시했던 인물임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집안에 보물은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개인적치부를 통해 수십 년의 부귀영화를 기약하기보다는 유방백세流芳百世 를 위해 청렴하게 처신했다.
      이처럼 보백당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명실상부한 인생을 살았기에, 비록 유고가 일실되어 전해지는 것이 영성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품은 당색黨色을 초월해서 후학들의 마음을 흥기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철종 무렵에는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고종 때는정헌공定憲公이라는 시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환로에서 파란을 겪는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처신하며 천수를 누린 인물답게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유풍은 후인들의 마음속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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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최은주,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 종가" 예문서원 2013

      2 鄭燮, "鄭板橋全集" 新興書局 1956

      3 "論語"

      4 "朝鮮王朝實錄"

      5 최은주, "嶺南士林들, 보백당을 추모하다" 동양예학회 29 : 2013

      6 "寶白堂先生實紀"

      7 김시황, "寶白堂 金係行 先生의 生涯와 儒學思想" 동양예학회 29 : 2013

      8 박명숙, "寶白堂 金係行 先生의 學問과 文學" 동양예학회 29 : 2013

      9 "周易"

      10 "中庸"

      1 최은주,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 종가" 예문서원 2013

      2 鄭燮, "鄭板橋全集" 新興書局 1956

      3 "論語"

      4 "朝鮮王朝實錄"

      5 최은주, "嶺南士林들, 보백당을 추모하다" 동양예학회 29 : 2013

      6 "寶白堂先生實紀"

      7 김시황, "寶白堂 金係行 先生의 生涯와 儒學思想" 동양예학회 29 : 2013

      8 박명숙, "寶白堂 金係行 先生의 學問과 文學" 동양예학회 29 : 2013

      9 "周易"

      10 "中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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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8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8-01 학회명변경 영문명 : Korea Studies Adancement Center -> The Korean Studies Institute KCI등재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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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5 0.65 0.6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6 0.62 1.324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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