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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정 초상 : 중국과 조선에서 그린 조선 문인의 초상화 = Yi Gwangjeong and Portraits of Joseon Envoys by Chinese Painters from the Ming and Qing Peri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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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54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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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609년 사은사로서 북경에 파견된 이광정은 이곳에서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원승광이라는 북경의 화가가 제작한 그의 초상화는 조선의 관복을 착용하였으나 두 손은 허리와 무릎에 얹은 채 ...

      1609년 사은사로서 북경에 파견된 이광정은 이곳에서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원승광이라는 북경의 화가가 제작한 그의 초상화는 조선의 관복을 착용하였으나 두 손은 허리와 무릎에 얹은 채 정면을 응시하는 명청대의 초상화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에 돌아온 이광정은 1604년 호성공신에 녹훈되며 하사받은 공신화상과 중국본의 초상을 비교하였다. 그의 공신화상은 엄격한 제도적 규정을 따라 정형화된 도상과 형식으로 제작된 초상화였다. 두 그림을 비교한 이광정은 중국본의 초상이 자신의 모습을 더욱 근접하게 재현하였다고 결론 내렸다.
      17세기 들어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절들 사이에는 중국본 초상화를 제작해오는 풍조가 성행하였다. 사절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초상화에 주목한 기존 연구자들은 이들 초상이 지닌 명말청초의 초상화 양식에 관심을 두었으며 이들이 조선의 초상화 제작에 미친 회화적 영향을 집중적으로 규명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다수의 초상화는 중국 특유의 초상화 양식을 향한 문인들의 선호를 반영한다. 그러나 북경에서 초상을 제작하는 데에는 화가와의 만남 외에도 제작비, 사절의 체류 기간 등 현실적인 제약이 따랐다. 이와 같은 다양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초상을 제작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단순한 선호를 넘어서는 의식적 차원의 강한 동기를 목격할 수 있다. 이 연구는 17-18세기 중국을 방문한 조선 사절들이 남긴 중국본 초상화가 지닌 문화적 함의를 논구하며 각국의 초상화 제작 방식, 형식적 특징을 비롯하여 초상 제작의 이면에 놓인 문사들의 인식에 주목하였다. 중국과 조선에서 모두 초상을 제작하고 양자를 비교 · 평가하였던 이광정을 중심으로 조선 사절이 남긴 중국본 초상화와 관련 기록을 섬세하게 살펴보며 이들이 지닌 초상화를 향한 의식적 측면에 접근하고자 시도하였다.
      이광정 외에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1735에 중국을 방문한 이덕수이다. 그는 남경출신의 직업화가인 시옥이 그린 중국본과 도화서 화원으로 추정되는 장학주가 그린 조선본의 초상화를 모두 소장하였다. 두 초상을 비교한 이덕수는 섬세하지만 규범적으로 그려진 조선의 초상화보다 닮음은 부족하지만 생동감 있는 시옥의 초상화를 높이 평가하였다. 중국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는 당시에 관찰한 바에 의거하여 그려졌으며 여기에는 주인공의 개성과 감정이 표현될 여지가 높았다. 이 때문에 초상화가 자신의 진면모를 보여주기를 기대한 문사들에게 중국본은 더 높은 만족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광정이 남긴 자신의 초상에 관한 소회에서 그가 초상화를 후대와 관계 맺는 매체로서 여기고 있음이 간취된다. 후대와 보다 긴밀한 소통을 위하여 그에게는 자신이 핍진하게 재현된 초상화가 필요하였다. 공신화상은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최적화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자 할 때 공신화상의 추상적이고 정형화된 회화 표현은 이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이것은 이광정이 중국에서 초상을 제작한 이유일 것이며 다수의 문인들이 중국본 초상화를 높이 평가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17세기의 시작과 함께 제작된 이광정의 두 초상은 초상화가 자신의 존재를 후대에 전하는 시각적 매체로서 작용하기를 기대하였던 조선 문인의 초상화 인식의 일단을 확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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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Yi Gwangjeong (李光庭,1552-1629) had his portrait painted in Beijing, the capital of Ming China, while he was dispatched there as an envoy in 1609. In this portrait by a Beijing-based professional painter Yuan Chengguang (袁承光), Yi is depicted...

      Yi Gwangjeong (李光庭,1552-1629) had his portrait painted in Beijing, the capital of Ming China, while he was dispatched there as an envoy in 1609. In this portrait by a Beijing-based professional painter Yuan Chengguang (袁承光), Yi is depicted as a Joseon envoy in formal attire. However, his posture follows a typical Chinese portrait style wherein a figure is seated on a chair covered with the tiger skin rug, facing at the front and exposing the hands to the audience. After returning to Joseon, Yi Gwangjeong compared this portrait with his other portrait produced in 1604 to commemorate his designation as Hoseong gongsin, an honorable title granted to meritorious vassals who escorted the King in 1592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hereafter, “gongsin portrait”). His gongsin portrait followed the formal style and iconography strictly prescribed by rules and regulations. Yi considered that the Chinese-style portrait represented him closer to his true self than the formal gongsin portrait.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it was popular among Joseon envoys to commission Chinese-style portraits in Beijing. Existing studies on such portraits from China generally pay attention to the styles and techniques of Ming- and Qing-period portraits reflected in these examples and also investigate the artistic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China. The portraits of Joseon envoys produced in Beijing clearly reflect the Joseon literati’s preference for Chinese culture. However, high production cost, short period of stay in Beijing, lack of skilled artists, and other factors must have imposed constraints on commissioning portraits in Beijing. Considering these limitations, it is likely that stronger motivation beyond cultural preferences was behind the commission of Chinese-style portraits. This essay investigates portraits of Joseon envoys produced in Ming-Qing China from the seventeenth to eighteenth century. Focusing on Yi Gwangjeong’s two portraits, it will closely examine the extant Chinese portraits of Joseon envoys and related records to understand Joseon literati’s perceptions of portraits in the seventeenth century.
      Yi Gwangjeong’s remarks on his portraits reveal that he saw a portrait as a visual medium to make a relationship with posterity. For better communication with later generations, Yi wanted to leave a lifelike portrait of him. While his formal gongsin portrait was made in accordance with high standards of the royal academy, another portrait by the Chinese painter faithfully described what the painter observed. The Joseon literati of the time, who expected an authentic portrayal of one’s true self from a portrait, must have been hardly satisfied with conventional Joseon portraits. That is why Yi Gwangjeong intended to make another portrait of him in China even though he already had a gongsin portrait, the most authoritative portrait in Joseon. The two portraits of Yi Gwangjeong painted in Joseon and China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represent Joseon literati’s belief that a portrait should serve as a visual medium that expresses the true self of the subject and forges a link between the subject and poste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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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Ⅱ. 이광정과 중국본 초상화의 제작
      • Ⅲ. 이광정의 호성공신화상 제작
      • Ⅳ. 중국에서 제작한 조선 사절의 초상과 그에 관한 인식
      • Ⅴ. 맺음말
      • Ⅰ. 머리말
      • Ⅱ. 이광정과 중국본 초상화의 제작
      • Ⅲ. 이광정의 호성공신화상 제작
      • Ⅳ. 중국에서 제작한 조선 사절의 초상과 그에 관한 인식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국문초록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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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閔鼎重, "老奉集"

      2 장진성, "화원" 삼성미술관 리움 2011

      3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열화당 1983

      4 정민, "한국산문선 5" 민음사 2018

      5 이태호, "표암 강세황" 예술의 전당 2003

      6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7 김기완, "조선후기 사대부 초상화찬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9

      8 권혁산, "조선중기 공신화상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8

      9 강관식, "조선시대 초상화의 圖像과 心像" 한국미술사교육학회 15 : 2001

      10 김경록, "조선과 중국(명・청)의 사행외교" 한일관계사학회 (55) : 227-269, 2016

      1 閔鼎重, "老奉集"

      2 장진성, "화원" 삼성미술관 리움 2011

      3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열화당 1983

      4 정민, "한국산문선 5" 민음사 2018

      5 이태호, "표암 강세황" 예술의 전당 2003

      6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7 김기완, "조선후기 사대부 초상화찬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9

      8 권혁산, "조선중기 공신화상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8

      9 강관식, "조선시대 초상화의 圖像과 心像" 한국미술사교육학회 15 : 2001

      10 김경록, "조선과 중국(명・청)의 사행외교" 한일관계사학회 (55) : 227-269, 2016

      11 이성훈, "전의 이씨 청강공파 대종회 소장 초상화 4점에 대하여" 태학사 74 : 2016

      12 김육, "잠곡 김육 문중 소장 고문서: 실학박물관 기증기념 도록" 경기문화재단 및 경기도 2007

      13 심초롱, "윤증 초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0

      14 부산박물관, "소장품도록" 부산박물관 2005

      15 동양고전학회, "국역 槿域書畵徵 下" 시공사 2001

      16 李晩榮, "雪海集"

      17 정은주, "赴京使行에서 제작된 朝鮮使臣의 肖像" 명청사학회 (33) : 1-40, 2010

      18 李德壽, "西堂私載"

      19 鄭琢, "藥圃集年譜"

      20 盧宣妃, "蒙元江南畫家的高麗文臣肖像: 陳鑑如<李齊賢像>(1319)研究" 國立故宮博物院 35 (35): 2017

      21 "英祖實錄" 국사편찬위원회

      22 李睟光, "芝峯類說"

      23 문동수, "肅宗・英祖년간의 肖像畵 연구" 서울대학교 2016

      24 "神宗實錄"

      25 李植, "澤堂先生別集"

      26 宋秉璿, "淵齋集"

      27 정만조, "朝鮮後期 延安李氏 三陟公派의 근거지 확산과 坡州정착" 한국학연구소 35 : 107-14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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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강관식, "朝鮮 中期의 宋言愼 景影幀" 미술사학연구회 (19) : 91-122, 2003

      30 馮世坤, "文化月刊" 天津美術學院中國畫學院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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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扈聖宣武淸難功臣都監儀軌; 扈聖宣武原從三功臣都監儀軌"

      33 金錫胄, "息庵先生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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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첨사공파대보간행위원회, "延安李氏詹事公派大譜" 回想社 1985

      36 蔡彭胤, "希菴集"

      37 "宣祖實錄" 국사편찬위원회

      38 單國強, "古宮博物院院刊" 古宮博物院 1997

      39 "光海君日記" 국사편찬위원회

      40 권혁산, "光海君代(재위: 1608-1623)의 공신화상과 이모본 제작 -<조공근 초상>과 초본을 중심으로-" 국립중앙박물관 (88) : 63-90, 2015

      41 於玉安, "中國歷代畫史匯編 1-12" 天津古籍出版社 1997

      42 조인수, "(위대한) 얼굴: 한·중·일 초상화 대전" 아주문물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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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45 0.45 0.5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5 0.5 0.831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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