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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사업에서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역할 = Historic spot investigation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Fujita Ryosaku(藤田亮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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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1918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부성 유신사료편찬소 및 궁내청 제릉료를 거쳐 1922년 신설된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에 부임했다. 그는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의 후임으로 박물관 및 고적조사 사업을 비롯해 고적조사과 사업 전반을 기획했던 인물이다. 후지타 료사쿠가 기획한 조사 중 주목되는 것은 외부 자금과 사적 자금으로 발굴한 사례이다. 외부 자금으로 발굴한 것은 평양 낙랑 왕우묘와 서봉총 남분(데이비드총)이며, 금령총과 식리총, 서봉총 북분은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齊藤實)가 제공한 사적 자금으로 발굴했다. 이 발굴의 기획과 추진에는 후지타 료사쿠가 깊이 개입하였는데, 이러한 조사방식은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되는데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조선고적연구회는 1931년 설립 이후부터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조선고적조사 사업을 대행해 왔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외부 자금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후지타 료사쿠는 1931년부터 조선고적연구회의 간사가 되어 지방 연구소와 박물관 사업을 지원하고,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와 같은 새로운 조사원을 양성하고 연구회 성과를 토대로 총독부 출판 사업을 도왔다. 후지타 료사쿠는 부임 이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업을 실제로 기획하고 업무를 시행했다. 하지만 그가 기획한 고적조사 사업은 조선총독부의 인력 상황 등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무리한 사업이었다. 또 발굴 자체가 유물을 수집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문화재에 대한 기본 가치관과 인식에 큰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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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1918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부성 유신사료편찬소 및 궁내청 제릉료를 거쳐 1922년 신설된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에 부임했다. 그는 야쓰이 ...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1918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부성 유신사료편찬소 및 궁내청 제릉료를 거쳐 1922년 신설된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에 부임했다. 그는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의 후임으로 박물관 및 고적조사 사업을 비롯해 고적조사과 사업 전반을 기획했던 인물이다. 후지타 료사쿠가 기획한 조사 중 주목되는 것은 외부 자금과 사적 자금으로 발굴한 사례이다. 외부 자금으로 발굴한 것은 평양 낙랑 왕우묘와 서봉총 남분(데이비드총)이며, 금령총과 식리총, 서봉총 북분은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齊藤實)가 제공한 사적 자금으로 발굴했다. 이 발굴의 기획과 추진에는 후지타 료사쿠가 깊이 개입하였는데, 이러한 조사방식은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되는데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조선고적연구회는 1931년 설립 이후부터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조선고적조사 사업을 대행해 왔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외부 자금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후지타 료사쿠는 1931년부터 조선고적연구회의 간사가 되어 지방 연구소와 박물관 사업을 지원하고,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와 같은 새로운 조사원을 양성하고 연구회 성과를 토대로 총독부 출판 사업을 도왔다. 후지타 료사쿠는 부임 이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업을 실제로 기획하고 업무를 시행했다. 하지만 그가 기획한 고적조사 사업은 조선총독부의 인력 상황 등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무리한 사업이었다. 또 발굴 자체가 유물을 수집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문화재에 대한 기본 가치관과 인식에 큰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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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Fujita Ryosaku (藤田亮策) graduated from Department of History of Tokyo Empire University in 1918 and worked at Revitalizing Reform Historical Material Research Center (維新史料編纂所) of Board of Education (文部겛), and Imperial Household Agency (宮內廳). He started for his new post at investigation division for historical remains of The Education and Management Bureau(學務局) in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Fujita was in charge of general investigation work for historical remains and museums as a successor to Yatsui Seyiyitsu (谷井濟一). A notable investigation he planned is that he excavated with external and private funds. With the external funds, he excavated Pyongyang Nakrang King’s Tomb(王旴墓) and Seobongchong (瑞鳳塚) Nambun (南 墳, so-called David’s tomb). With the private funds from the voernor, Saiko Mako, he excavated Geumnyeongchong(金鈴塚), Singnichong (飾履塚) and Seobongchong(瑞鳳塚) North Tomb. Fujita Ryosaku was highly responsible for planning and works of the excavation and research method played a significant role to build Korean Historical Site Research Institute(朝鮮古蹟硏究會). The Korean Historical Site Research Institute replaced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dealt with Korean historic spot investigation after its establishment in 1931. The largest feature of the institute was that it was run by external funds. Fujita Ryosaku became an assistant administrator of Korean Historical Site Research Institute in 1931, supported local laboratories and museum projects, educated a new researcher such as Arimitsu Kyoichi(有光敎一) and helped publishment work by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based on the institute’s achievements. In fact, he planned and managed historic spot investigation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since he took over. The historic spot investigation that he planned, nevertheless, was not pratically available considering manpower situation. As the excavation was a means of to collect ruins, there was a severe problem with a basic value and attitude for the cultural proper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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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ujita Ryosaku (藤田亮策) graduated from Department of History of Tokyo Empire University in 1918 and worked at Revitalizing Reform Historical Material Research Center (維新史料編纂所) of Board of Education (文部겛), and Imperial Ho...

      Fujita Ryosaku (藤田亮策) graduated from Department of History of Tokyo Empire University in 1918 and worked at Revitalizing Reform Historical Material Research Center (維新史料編纂所) of Board of Education (文部겛), and Imperial Household Agency (宮內廳). He started for his new post at investigation division for historical remains of The Education and Management Bureau(學務局) in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Fujita was in charge of general investigation work for historical remains and museums as a successor to Yatsui Seyiyitsu (谷井濟一). A notable investigation he planned is that he excavated with external and private funds. With the external funds, he excavated Pyongyang Nakrang King’s Tomb(王旴墓) and Seobongchong (瑞鳳塚) Nambun (南 墳, so-called David’s tomb). With the private funds from the voernor, Saiko Mako, he excavated Geumnyeongchong(金鈴塚), Singnichong (飾履塚) and Seobongchong(瑞鳳塚) North Tomb. Fujita Ryosaku was highly responsible for planning and works of the excavation and research method played a significant role to build Korean Historical Site Research Institute(朝鮮古蹟硏究會). The Korean Historical Site Research Institute replaced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dealt with Korean historic spot investigation after its establishment in 1931. The largest feature of the institute was that it was run by external funds. Fujita Ryosaku became an assistant administrator of Korean Historical Site Research Institute in 1931, supported local laboratories and museum projects, educated a new researcher such as Arimitsu Kyoichi(有光敎一) and helped publishment work by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based on the institute’s achievements. In fact, he planned and managed historic spot investigation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since he took over. The historic spot investigation that he planned, nevertheless, was not pratically available considering manpower situation. As the excavation was a means of to collect ruins, there was a severe problem with a basic value and attitude for the cultural proper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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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요약
      • Ⅰ. 머리말
      • Ⅱ. 후지타 료사쿠의 생애와 연보
      • Ⅲ. 총독부박물관 공문서로 본 고적조사과
      • Ⅳ. 조선고적조사 사업과 후지타 료사쿠
      • 요약
      • Ⅰ. 머리말
      • Ⅱ. 후지타 료사쿠의 생애와 연보
      • Ⅲ. 총독부박물관 공문서로 본 고적조사과
      • Ⅳ. 조선고적조사 사업과 후지타 료사쿠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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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인덕, "한국박물관100년사" 국립중앙박물관·(사)한국박물관협회 2009

      2 김경민, "제국주의와 고고학 :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8

      3 쓰데히로시, "전방후원분과사회" 학연문화사 2013

      4 박현수, "일제의식민지조사기구와조사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 (21): 1998

      5 이순자, "일제강점기고적조사사업연구" 서경문화사 2009

      6 이성주, "일제강점기고고학조사와그성격" 영남고고학회 2012

      7 정인성, "일제강점기 ‘慶州古蹟保存會’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대구사학회 95 : 1-39, 2009

      8 吉井秀夫, "일본고고학사에서 본 조선고적사업과 조선총독부박물관–교토제국대학 고고학연구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립중앙박물관 2009

      9 하지연,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한국근대사 연구와 식민사학" 한국근현대사학회 (63) : 71-105, 2012

      10 박광현, "식민지 조선과 박물관의 정치학 -재조선(在朝鮮) 식민 사회의 형성 과정과 관련하여-" 일본연구소 27 : 59-89, 2009

      1 김인덕, "한국박물관100년사" 국립중앙박물관·(사)한국박물관협회 2009

      2 김경민, "제국주의와 고고학 :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8

      3 쓰데히로시, "전방후원분과사회" 학연문화사 2013

      4 박현수, "일제의식민지조사기구와조사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 (21): 1998

      5 이순자, "일제강점기고적조사사업연구" 서경문화사 2009

      6 이성주, "일제강점기고고학조사와그성격" 영남고고학회 2012

      7 정인성, "일제강점기 ‘慶州古蹟保存會’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대구사학회 95 : 1-39, 2009

      8 吉井秀夫, "일본고고학사에서 본 조선고적사업과 조선총독부박물관–교토제국대학 고고학연구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립중앙박물관 2009

      9 하지연,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한국근대사 연구와 식민사학" 한국근현대사학회 (63) : 71-105, 2012

      10 박광현, "식민지 조선과 박물관의 정치학 -재조선(在朝鮮) 식민 사회의 형성 과정과 관련하여-" 일본연구소 27 : 59-89, 2009

      11 하지연, "식민사학과한국근대사–우리역사를왜곡한일본지식인들" 지식산업사 2015

      12 후지이조지, "쇼군천황국민–에도시대부터현재까지일본의역사" 서해문집 2012

      13 도미니크풀로, "박물관의탄생" 돌베개 2014

      14 이성시, "구로이타가쓰미를통해본식민지와역사학" 23 : 1999

      15 함순섭, "경주신라유적의어제와오늘–석굴암·불국사·남산" 성균관대학교박물관 2007

      16 함순섭, "경북대학교고고인류학과30주년기념고고학논총" 경북대학교고고인류학과 30주년 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11

      17 정인성, "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 연구 재검토 - 일제강점기「古蹟調査」의 기억 1 -" 호남고고학회 24 : 139-156, 2006

      18 藤田亮策, "歐美の博物館と朝鮮(上)·(下)" 朝鮮總督府 164·170 : 1929

      19 朝鮮總督府, "朝鮮總覽"

      20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21 金泰蓮, "朝鮮總督府博物館の設立と運營" (43) : 2015

      22 藤田亮策, "朝鮮學論考" 藤田先生記念事業會 1963

      23 藤田亮策, "朝鮮學論考" 藤田先生記念事業會 1963

      24 吉井秀夫, "朝鮮古蹟調査事業と「日本」考古學" 考古學硏究會 60 (60): 2013

      25 오영찬, "朝鮮古蹟硏究會의 설립과 운영 - 1931~1932년을 중심으로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55) : 223-251, 2011

      26 藤田亮策, "朝鮮古蹟硏究會の創立と基の事業" 靑丘學會 6 : 1931

      27 小泉顯夫, "朝鮮古代遺蹟の遍歷–發掘調査三十年の回想" 大興出版 1986

      28 강인욱, "日帝强占期 咸鏡北道 先史時代유적의 조사와 인식" 한국상고사학회 61 (61): 5-34, 2008

      29 小泉顯夫, "慶州瑞鳳塚の發掘" 史學會 38 (38): 1927

      30 藤田亮策, "古文化の保存と硏究" 黑板博士記念會 1952

      31 桑田六鄭, "先學を語る: 藤田亮策先生" 東方學會 64 : 1982

      32 穴澤和光, "伊藤秋男先生古稀記念考古學論文集"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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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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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 0.7 0.7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2 0.89 1.572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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