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들을 기리는 비석에 대한 관점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비석이 세워진 ‘지역’을 중심으로 건립을 주도한 ‘세력’을 세밀하게 살펴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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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진 (공주시청 학예연구사)
2025
Korean
Monument to commemorat ; General of the the Ming Dynasty Military Master. ; 명나라 장수 비석 ; 명장비 ; 조선후기 ; 임진왜란 ; 재조지은 ; 재지세력 ; 재지사족 ; 향촌사회 ; 임진왜란 비석 건립
KCI등재
학술저널
459-49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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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이 논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들을 기리는 비석에 대한 관점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비석이 세워진 ‘지역’을 중심으로 건립을 주도한 ‘세력’을 세밀하게 살펴본 연구...
이 논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들을 기리는 비석에 대한 관점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비석이 세워진 ‘지역’을 중심으로 건립을 주도한 ‘세력’을 세밀하게 살펴본 연구이다. 지금까지 명나라 장수를 기리는 비석(이하 명장비)들은 임진왜란 당시 파병으로 조선을 구원해준 명나라에 대한 보은 의식, 즉 재조지은의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부분 명군 측에서 스스로 공적 남기기에 주력한 결과 또는 조선을 압박하여 만들어낸 산물이라 여겨지곤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군 지휘부가 재조지은을 상기시키기 위해 독단적으로 세운 다양한 기념시설들에 대한 당대 조선 조정의 비판적인 인식 등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가운데 임진왜란 기간에 명군 측 이외 전국 각 향촌 사회 일원들이 주도하여 건립한 명장비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거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1593년부터 1600년까지 전국 각 지역에 명장비가 세워졌고 이 사실은 각종 문헌과 현존하는 비를 토대로 26기가 확인된다. 건립된 시기는 명장이 조선에 파병되었던 기간과 일치한다. 필자는 지역적 관점에서 임진왜란 기간 명장비가 건립된 시기별 특징과 장소, 건립 주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향촌사회 재지세력의 명장비 건립 주도 정황을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우선 명장비가 건립된 시기는 총 3기로 구분되었다. 1기는 명장비가 처음 확인되는 초기 단계로 임진왜란으로 명군의 파병이 시작된 1593년부터 1594년까지이다. 2기는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재파병된 사건과 관련 깊고 전란 중 가장 많은 명장비가 건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3기는 일본군이 철수한 1598년부터 1600년 사이로 명군의 철수가 한창 논의되던 때였다. 크게 명장비는 명군의 전승지 또는 주둔지에 세워졌다. 즉, 명장비가 건립된 장소는 해당 지역이 겪었던 임진왜란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구체적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전투가 벌어진 전승지에 건립된 비들은 명군이 직접 또는 독단적으로 건립한 성격이었지만, 그 비율은 적었다. 오히려 명군이 주둔했던 장소에 건립된 비석이 더 많은 수를 차지했고, 주도세력은 모두 지역민들이었다.
지역민이 건립 주체로 확인되는 명장비는 향촌사회에 생활 기반을 두고 일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지녔던 세력들이 있었다. 건립을 발의한 이들은 대부분 ‘고을 어른’, ‘父老’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여자 명단이 세밀하게 기록된 공주의 명국삼장비를 통해 사족과 유생들을 중심이 되었던 이들의 구체적 실체에도 접근 해 볼 수 있었다. 그 외 비문 작상자들은 성리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향론을 주도하였던 재지사족들이었다. 비문작성자로 동참한 이들의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다. 그들 향촌 지식인층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창의와 같은 적극적인 수호 활동으로 이어졌다. 일부는 명 부대를 지원하거나 군량을 공급하는 일을 지원하며 국난극복의 현장에 있었던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무너지고 황폐화된 향촌 사회 재건과 복구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즉, 명장비 건립을 주도한 지역민들은 각 향촌사회를 담당하며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던 재지세력들이었고, 전란 중임에도 향촌 사회의 결집과 재건을 위해 노력한 자신들의 흔적을 명장비에 남겼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Focusing on the change of perspective on the monument honoring the generals of the Ming Dynasty who came to Joseon during the Imjin War, this paper aims to take a closer look at the “power” that led the construction in the “region” where the m...
Focusing on the change of perspective on the monument honoring the generals of the Ming Dynasty who came to Joseon during the Imjin War, this paper aims to take a closer look at the “power” that led the construction in the “region” where the monument was erected. Until now, the tombstones honoring the generals of the Ming Dynasty (hereinafter referred to as the Myeongjang Monument) have not been free from the notion of a reward for the Ming Dynasty, or Jaejo Ji-eun, who saved Joseon by sending troops during the Imjin War. From 1593, the nationwide cost of each region and this fact, this fact is confirmed based on various literature and existing rain.The period matches the period is consistent to the Joseon Dynasty. As a result of this, it was confirmed that it was built in the Ming Dynasty Military, and there was a historical place where they were dispatched at the time of the Imjin War. However, they were built on the transfer site, but the proportion of the proportion of the battle, but the proportion of the Ming Dynasty Military, the proportion of the Ming Dynasty Military was built by the region.
The Construction of Monumental Architecture the Ming Dynasty Military Master which is confirmed as Local Noble Family have a certain social economic status, is confirmed as the maintenance of the local residents who have a certain social economic status and participated. The Myeongjang Monument, built during the Imjin War, was not only a product of the Ming Dynasty Military side to honor the achievements of the master, but was also a meaningful research material that could interpretation the movements of the less well-known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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