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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백제 개로왕의 여성 節行觀에 담긴 역사성 검토 = A Study on Historicity Represented in Baekje King Gaero’s Perspective On Chastity of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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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17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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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history of King Gaero period with a theme of the perspective on chastity of women the king talked to Domi. It was understood that the king suggested that women’s integrity is not reliable because it may be easily changed and it h...

      This study examined history of King Gaero period with a theme of the perspective on chastity of women the king talked to Domi. It was understood that the king suggested that women’s integrity is not reliable because it may be easily changed and it has a certain intention. Baekje in the King Gaero’s period suffered from wars with Goguryeo and he was active in overseas policies to gain a breakthrough. He sent ambassadors to Song Dynasty in the southern area to request official ranks and Bukwei Dynasty in the northern area to request military supports to defeat Goguryeo. He also sent his brother named Gonji to Japan.
      The problem is the record that Gonji got married to King Gaero’s wife and took her with him. It was recorded that she delivered a baby while she was going to Japan. 『Ilbonseogi』 records that the baby was King Muryong. However, 『SamgukSagi』 and 『SamgukYusa』 record that King Muryong is the second son of King Dongsung, one of Gonji’s sons.
      Whatever the reason was, King Gaero’s wife was remarried with Gonji although her husband was alive and it was far from women’s chastity. Therefore, King Gaero put an emphasis on that women’s integrity is not valuable to gain his dignity and position as a king. Furthermore, to solve the problem that might occur to the prince to be delivered during the trip in respect to orthodoxy of royal lineage, he was active in distributing the discourse that women’s chastity is not impor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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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백제 개로왕이 도미와 나눈 여성의 절행관을 매개로 개로왕대 역사에 접근해 보았다. 개로왕이 여성의 절행을 변하기 쉬운 그래서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에는 어떤 의도를 내포하였다고 ...

      백제 개로왕이 도미와 나눈 여성의 절행관을 매개로 개로왕대 역사에 접근해 보았다. 개로왕이 여성의 절행을 변하기 쉬운 그래서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에는 어떤 의도를 내포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개로왕대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그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남조 송에는 사신을 보내 관작을 요청하였다. 북조 북위에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였다. 왜에는 동생 곤지를 보냈다.
      문제는 왜에 사신으로 간 곤지가 개로왕의 부인과 혼인하고 동행하였다는 기록이다. 당시 개로왕의 부인은 출산이 얼마남지 않은 상태였고 왜로 가는 도중에 출산하였다고 한다. 『日本書紀』에는 태어난 아이가 무령왕이라는 전승을 보인다. 반면 국내측 기록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는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는 전혀 다른 정보를 전한다.
      이유가 무엇이건, 개로왕의 부인이 남편 개로왕이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곤지와 혼인했다는 그 자체는 여성의 절행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개로왕은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처지와 국왕으로서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여성의 절행이 실상은 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개로왕의 부인이 재혼한 후 왜에 가는 도중에 낳은 왕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왕계보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의 절행이란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담론을 적극적으로 양산하여 유포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예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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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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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양서"

      9 "송서"

      10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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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복순, "한국 고대불교사 연구" 민족사 2002

      3 김덕원, "제1부 한국고대사의 복원 : 신라 진지왕대의 정국운영" 이화사학연구소 (30) : 49-6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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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위서"

      6 윤용혁, "연구논문 : 무령왕 "출생전승"에 대한 논의" 백제문화연구소 (32) : 1-17, 2003

      7 이재석, "연구논문 : 5 세기말 곤지의 도왜 시점과 동기에 대한 재검토" 백제문화연구소 (30) : 19-3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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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6 0.97 2.484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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