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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西游錄」 所在 漢詩에 나타난 韓溪 李承熙의 文明意識 = A Study on the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 in the poem of 「Seoyu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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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505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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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is to figure out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文明意識) in the poem of 「Seoyurok(西游錄)」. Lee seung hui i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1909, He established a base of independence movement which is called ‘Han heung dong(韓興洞)’ in Mishan of Jilin province, but he m oved a base of independence movement to Andong of Fengtan province. He found out Gonggyo Movement(孔敎運動) in Andong, so he established Korean Organization of Confucius Religion in Manchuria(東三省 韓人孔敎會). His branch was officially approved by Gonggyohoe (孔敎會) where there is a main branch in Beijing, which made him visit Qufu.
      「Seoyurok」 is the record of journey in Beijing and Qufu. It is the travel essay, and he expressed his feeling about his journey in the poem . We found out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 in the poem of 「Seoyurok」. When he moved from Andong to Beijing, he mentioned Dangun and Gija. He said that Dangun founded the country and Gija is the person who transmitted civilization and gave edification. In addition, it showed that Consciousness of Native Land(故土意識) which recalls previous territory that was part of Korea through Dangunand a sense of self-esteem(自尊意識) that Korea is the only one country with authenticity of confucian culture through Gija.
      He had a pride of Confucian culture through Dangun and Gija. When he experienced westernized china and western culture, he worried about the future, but at the same time he accepted westerniz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Sinocentrism.
      Lee Seung hui tried to keep korean history and tradition, even though he was in difficult situation. A lot of his works he had performed in China could be highly appreciated as a kind of independence movement that dreamed of new beginning and revival of our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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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is to figure out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文明意識) in the poem of 「Seoyurok(西游錄)」. Lee seung hui i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1909, He established a base of independence...

      This study is to figure out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文明意識) in the poem of 「Seoyurok(西游錄)」. Lee seung hui i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1909, He established a base of independence movement which is called ‘Han heung dong(韓興洞)’ in Mishan of Jilin province, but he m oved a base of independence movement to Andong of Fengtan province. He found out Gonggyo Movement(孔敎運動) in Andong, so he established Korean Organization of Confucius Religion in Manchuria(東三省 韓人孔敎會). His branch was officially approved by Gonggyohoe (孔敎會) where there is a main branch in Beijing, which made him visit Qufu.
      「Seoyurok」 is the record of journey in Beijing and Qufu. It is the travel essay, and he expressed his feeling about his journey in the poem . We found out Lee Seung-hui’s Civilization Consciousness in the poem of 「Seoyurok」. When he moved from Andong to Beijing, he mentioned Dangun and Gija. He said that Dangun founded the country and Gija is the person who transmitted civilization and gave edification. In addition, it showed that Consciousness of Native Land(故土意識) which recalls previous territory that was part of Korea through Dangunand a sense of self-esteem(自尊意識) that Korea is the only one country with authenticity of confucian culture through Gija.
      He had a pride of Confucian culture through Dangun and Gija. When he experienced westernized china and western culture, he worried about the future, but at the same time he accepted westerniz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Sinocentrism.
      Lee Seung hui tried to keep korean history and tradition, even though he was in difficult situation. A lot of his works he had performed in China could be highly appreciated as a kind of independence movement that dreamed of new beginning and revival of our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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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연구는 한계 이승희의 「서유록」 소재 한시에 나타난 문명의식을 찾기 위해 시도되었다. 이승희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909년 길림성 밀산부에 ‘한흥동’이라는 정착촌을 건설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3년 봉천성 안동현으로 이동하였다. 안동현에서 중국의 공교 운동에대해 알게 된 이승희는 동삼성한인공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는 곧장 북경으로 가서 공교회의 지부로 승인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곡부도 다녀오게 되었다. 안동현을 떠나 북경과 곡부를 둘러본 여정을 담은 기록이 바로 「서유록」이다. 「서유록」 은 이동 경로와, 각 공간에서 느낀 바를 쓴 한시를 수록한 일기체 기행문이다.
      「서유록」의 한시를 통해 이승희의 문명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현에서 북경으로 이동할 때 단군과 기자가 종종 언급되었다. 기본적으로 단군은 나라를 세운 국조로, 기자는 문명을 전달하고 교화를 펼친 인물로 인식하였다. 단군을 통해 고대의 영토를 떠올리는 고토의식이 주로 드러났으며, 기자를 통해 우리나라가 유교 문화의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나라라는 자존의식이 나타났다. 이승희는 단군과 기자를 통해서우리나라의 오랜 역사를 잊지 않고 유교 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이승희는 서구화된 중국의 현실을 맞닥뜨리고 서양인을 직접 접하면서, 서구화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출하였다. 동시에, 중화의식의 기준에서는 서구를 인정하는 유연한 태도도 보였다. 서구에 대한 낯섦과 거부감을 중화의식으로 극복하며,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는 의식을 드러냈다.
      이승희는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과 험난한 타국에서의 현실 속에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 의식을 지키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새로운 시작과 부흥을꿈꾸며 펼쳤던 중국에서의 다양한 활동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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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는 한계 이승희의 「서유록」 소재 한시에 나타난 문명의식을 찾기 위해 시도되었다. 이승희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909년 길림...

      이 연구는 한계 이승희의 「서유록」 소재 한시에 나타난 문명의식을 찾기 위해 시도되었다. 이승희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909년 길림성 밀산부에 ‘한흥동’이라는 정착촌을 건설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3년 봉천성 안동현으로 이동하였다. 안동현에서 중국의 공교 운동에대해 알게 된 이승희는 동삼성한인공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는 곧장 북경으로 가서 공교회의 지부로 승인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곡부도 다녀오게 되었다. 안동현을 떠나 북경과 곡부를 둘러본 여정을 담은 기록이 바로 「서유록」이다. 「서유록」 은 이동 경로와, 각 공간에서 느낀 바를 쓴 한시를 수록한 일기체 기행문이다.
      「서유록」의 한시를 통해 이승희의 문명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현에서 북경으로 이동할 때 단군과 기자가 종종 언급되었다. 기본적으로 단군은 나라를 세운 국조로, 기자는 문명을 전달하고 교화를 펼친 인물로 인식하였다. 단군을 통해 고대의 영토를 떠올리는 고토의식이 주로 드러났으며, 기자를 통해 우리나라가 유교 문화의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나라라는 자존의식이 나타났다. 이승희는 단군과 기자를 통해서우리나라의 오랜 역사를 잊지 않고 유교 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이승희는 서구화된 중국의 현실을 맞닥뜨리고 서양인을 직접 접하면서, 서구화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출하였다. 동시에, 중화의식의 기준에서는 서구를 인정하는 유연한 태도도 보였다. 서구에 대한 낯섦과 거부감을 중화의식으로 극복하며,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는 의식을 드러냈다.
      이승희는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과 험난한 타국에서의 현실 속에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 의식을 지키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새로운 시작과 부흥을꿈꾸며 펼쳤던 중국에서의 다양한 활동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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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한길로, "한말(韓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의 한시에 나타난 저항과 번민의 일면 - 대구경찰서 투옥 전후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소 (57) : 251-281, 2020

      2 이윤갑, "한말 이승희의 국권회복론 연구" 한국학연구원 (63) : 229-275, 2016

      3 한길로, "한계 이승희의 한시에 나타난 도해(渡海) 전후 시정(詩情)의 전개" 인문학연구원 77 (77): 121-151, 2020

      4 유준기, "한계 이승희의 정치사상" 총신대학교 3 : 159-186, 1983

      5 금장태, "한계 이승희의 생애와 사상(1)"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 : 5-21, 1985

      6 유준기, "한계 이승희의 사회개혁사상" 총신대학교 5 : 69-85, 1985

      7 임종진, "한계 이승희의 사상적 특징에 대한 분석"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33) : 157-181, 2019

      8 김기승, "한계 이승희의 독립운동과 대동사회 건설 구상" 한국민족운동사학회 (50) : 39-80, 2007

      9 유준기, "한계 이승희의 교육사상" 총신대학교 8 : 175-194, 1989

      10 김종석, "한계 이승희의 공자교운동과 유교개혁론 문제" 새한철학회 4 (4): 2004

      1 한길로, "한말(韓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의 한시에 나타난 저항과 번민의 일면 - 대구경찰서 투옥 전후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소 (57) : 251-281, 2020

      2 이윤갑, "한말 이승희의 국권회복론 연구" 한국학연구원 (63) : 229-275, 2016

      3 한길로, "한계 이승희의 한시에 나타난 도해(渡海) 전후 시정(詩情)의 전개" 인문학연구원 77 (77): 121-151, 2020

      4 유준기, "한계 이승희의 정치사상" 총신대학교 3 : 159-186, 1983

      5 금장태, "한계 이승희의 생애와 사상(1)"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 : 5-21, 1985

      6 유준기, "한계 이승희의 사회개혁사상" 총신대학교 5 : 69-85, 1985

      7 임종진, "한계 이승희의 사상적 특징에 대한 분석"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33) : 157-181, 2019

      8 김기승, "한계 이승희의 독립운동과 대동사회 건설 구상" 한국민족운동사학회 (50) : 39-80, 2007

      9 유준기, "한계 이승희의 교육사상" 총신대학교 8 : 175-194, 1989

      10 김종석, "한계 이승희의 공자교운동과 유교개혁론 문제" 새한철학회 4 (4): 2004

      11 한길로, "한계 이승희의 곡부(曲阜) 방문 소회와 현실인식 고찰- 「서유록(西游錄)」 소재 한시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언어학회 (87) : 185-207, 2021

      12 한길로, "한계 이승희(韓溪 李承熙)의 북경행의 배경과 교유시의 일면 -「서유록(西游錄)」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원 (80) : 5-37, 2021

      13 황미숙,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활동과 장시(場市)" 한국교회사학회 (45) : 217-253, 2016

      14 허태용, "조선후기 중화론과 역사인식" 아카넷 2009

      15 이승준, "임진왜란 전후 국문시가의 태고 모티프 연구" 충북대학교 2019

      16 이상호, "대동사회, 변법인가? 수양인가?― 강유위와 이승희의 대동 사회 실현을 위한방법을 중심으로" 한국국학진흥원 (32) : 235-275, 2017

      17 김근호,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의 성리설(性理說)" 한국철학사연구회 (70) : 31-56, 2021

      18 한길로, "대계 이승희의 달폐일기(達狴日記)의 창작 배경과 인물형상 연구" 영남문화연구원 (74) : 137-164, 2020

      19 김태희, "근대 이전 시기 ‘東人’의식의 구조와 그 변천" 한국민족학회 8 : 119-144, 2009

      20 李承熙, "韓溪遺稿 1-9" 국사편찬위원회 1982

      21 성민경, "韓溪 李承熙의 女訓書 편찬에 대한 고찰" 민족어문학회 (78) : 157-193, 2016

      22 정병석, "韓溪 李承熙의 道德的 宗敎觀" 한국유교학회 (39) : 61-87, 2010

      23 정병석, "韓溪 李承熙의 寒洲學 계승과 현실의 대응" 한국학연구원 (66) : 59-87, 2017

      24 정낙찬, "韓溪 李承熙의 學校敎育論" 한국교육철학회 (25) : 99-112, 2004

      25 정낙찬, "韓溪 李承熙의 地域社會敎育論" 한국교육철학회 (27) : 275-295, 2005

      26 황영례, "韓溪 李承熙와 海窓 宋基植의 孔敎 運動의 相異性" 한국유교학회 (39) : 89-130, 2010

      27 김동건, "澹寧 洪義浩의 燕行錄 硏究(2) ­-淸 文人과의 교유를 중심으로-" 영주어문학회 42 : 111-140, 2019

      28 李承熙, "大溪集"

      29 김미정, "<포쇄일기>에 나타난 공간의 양상과 의미" 영주어문학회 37 : 81-108, 2017

      30 홍원식, "19세기 ‘洛上’ 退溪學派와 ‘洛中’ 寒洲學派의 分立과 性理論爭 - 韓溪 李承熙의 ‘條辨’을 중심으로" 한국유교학회 (39) : 169-186, 2010

      31 서동일, "1910년대 중국 안동 성신태 상점 설립과 독립운동 지원" 수선사학회 (56) : 163-200, 2016

      32 왕원주, "1910년대 전반기 韓溪 李承熙의 中華사상과 民族인식 ― 신해혁명에 대한 중국인 李文治와의 논쟁을 중심으로 ―" 역사교육연구회 (103) : 211-244, 2007

      33 서동일, "1910년대 韓中 儒林의 교류와 孔敎運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77) : 145-19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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