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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년사료를 통해 본 조선시대 울릉도・독도 = Ulleungdo and Dokdo in the Joseon Dynasty appeared in Chronological mate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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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26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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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nmusa and Gyeongchagwan and the repatriation of residents in the year of Taejong and Sejo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chieved policy results in preventing the looting and killing of the Japanese raiders in Ulleungdo and Dokdo, and the collusion of...

      Anmusa and Gyeongchagwan and the repatriation of residents in the year of Taejong and Sejo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chieved policy results in preventing the looting and killing of the Japanese raiders in Ulleungdo and Dokdo, and the collusion of the people with the Japanese in advance. However, the Ulleungdo waters was blocked, and the coastal residents who could not cross the border produced rumors about Yodo and Sambongdo.
      On the other hand, after Territorial Dispute over Ulleungdo, the Joseon government raised interest in Ulleungdo and Dokdo from the end of the 17th to the 18th century by regularly doing Suto and seeking ways to utilize it, such as digging ginseng. And Ulleungdo and Dokdo became a little closer. It is no longer a rumor about an unknown island, but information and stories about Ulleungdo have piled up.
      In the background of the different appearances of the waters of Ulleungdo and Dokdo between early Joseon Dynasty and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 was an increase in the number of civilians visiting and living on the islands nationwide, and there was a change that was recognized as a space for production. And, for external factors, above all else, unlike the 15th century, when Japanese raiders were rampant, the East Sea in the 17th century was a saf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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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전기 태종~세종 연간의 안무사, 순심경차관의 파견과 주민 쇄환은 울릉도・독도에서 왜구의 약탈과 살상, 그리고 백성들이 왜구와 결탁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정책상 성과를 거...

      조선전기 태종~세종 연간의 안무사, 순심경차관의 파견과 주민 쇄환은 울릉도・독도에서 왜구의 약탈과 살상, 그리고 백성들이 왜구와 결탁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정책상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울릉도 해역이라는 공간은 차단되었고, 경계를 넘어설 수 없었던 연해 주민들은 요도와 삼봉도에 관한 풍문을 생산해냈다.
      그에 반해 울릉도 쟁계 이후 17세기 말~18세기의 울릉도・독도에 대해서 조선 조정은 정기적으로 수토를 하고, 제한적이나마 채삼 등 활용 방안을 모색하면서 관심을 높여갔다. 그리고 울릉도・독도는 좀 더 가까운 공간이 되어갔다. 이제는 미지의 섬에 대한 풍문이 아니라, 울릉도에 관한 정보와 이야기가 쌓여갔다.
      조선전기와 후기 울릉도・독도 해역이 그처럼 상이하게 다가온 배경에는 전국적으로 도서 지역에 대한 민간인의 왕래와 거주가 늘고, 생산의 공간으로 재인식되는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또 대외적 요인으로는 무엇보다 왜구가 횡행하던 15세기와는 달리 17세기 동해는 안전한 바다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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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손승철, "중・근세 조선인의 島嶼 경영과 경계인식 고찰" 한일관계사학회 (39) : 205-260, 2011

      2 신태훈, "조선후기 월송만호와 울릉도 수토제" 한일관계사학회 (72) : 43-78, 2021

      3 고동환, "조선후기 島嶼政策과 元山島의 변화" 호서사학회 (45) : 27-62, 2006

      4 손승철, "조선전기 요도와 삼봉도의 실체에 관한 연구" 한일관계사학회 (44) : 43-82, 2013

      5 유미림,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와 수토제의 추이에 관한 고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31 (31): 147-175, 2009

      6 김강일, "울릉도・독도 일본 사료집Ⅰ" 동북아역사재단 2012

      7 유미림, "울릉도·독도의 명칭 변천과 ‘독도’ 인식의 연속성" 한국해양수산개발원 36 (36): 27-60, 2021

      8 김태훈, "숙종대 대일정책의 전개와 그 성과" 47 : 2002

      9 신태훈, "삼척영장과 울릉도 수토제" 15 : 2019

      10 독도사료연구회, "독도 관계 한국 사료 총서 1~3" 경상북도 2021

      1 손승철, "중・근세 조선인의 島嶼 경영과 경계인식 고찰" 한일관계사학회 (39) : 205-260, 2011

      2 신태훈, "조선후기 월송만호와 울릉도 수토제" 한일관계사학회 (72) : 43-78, 2021

      3 고동환, "조선후기 島嶼政策과 元山島의 변화" 호서사학회 (45) : 27-62, 2006

      4 손승철, "조선전기 요도와 삼봉도의 실체에 관한 연구" 한일관계사학회 (44) : 43-82, 2013

      5 유미림,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와 수토제의 추이에 관한 고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31 (31): 147-175, 2009

      6 김강일, "울릉도・독도 일본 사료집Ⅰ" 동북아역사재단 2012

      7 유미림, "울릉도·독도의 명칭 변천과 ‘독도’ 인식의 연속성" 한국해양수산개발원 36 (36): 27-60, 2021

      8 김태훈, "숙종대 대일정책의 전개와 그 성과" 47 : 2002

      9 신태훈, "삼척영장과 울릉도 수토제" 15 : 2019

      10 독도사료연구회, "독도 관계 한국 사료 총서 1~3" 경상북도 2021

      11 송병기, "鬱陵島와 獨島" 단국대출판부 1999

      12 田保橋潔, "鬱陵島その發見と領有" 3 : 1931

      13 "高麗史"

      14 "邊例集要"

      15 "朝鮮王朝實錄"

      16 장준혁, "朝鮮 世宗期 1·2차 通信使와 對日政策의 기조" 역사실학회 (69) : 253-286, 2019

      17 "日省錄"

      18 "承政院日記"

      19 "同文彙考"

      20 "備邊司謄錄"

      21 남호현, "18세기 조선의 위기의식과 海防 논의의 양상" 조선시대사학회 (87) : 257-296, 2018

      22 장순순, "17세기 조일관계와 ‘鬱陵島 爭界’" 부산경남사학회 (84) : 37-71, 2012

      23 정연식, "15세기의 蓼島, 三峯島와 울릉도" 조선시대사학회 (92) : 41-9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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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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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5 1.5 1.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17 1.09 1.872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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