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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 삼국시대 考古資料의 양상과 성격 = The Patterns and Nature of Archeological Data of Three Kingdoms Period at the North gate Area of Mongchon Earthen Fort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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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947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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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에 대한 최근 발굴조사에서는 몽촌토성의 축조시점과 성격, 변천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삼국시대 유구와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유구는 도로와 수혈유구·건물지 등이 일정한 공간 분포상의 정형성을 띠며 확인되었다. 즉, 도로는 격자상으로 구획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수혈유구와 건물지 등은 북문지 내측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의 도로로 둘러싸인 공간에 분포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부분은 백제 漢城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 이후의 시기에 고구려가 백제의 유구를 修改築하여 사용하거나 폐기된 백제 유구 위에 성토대지를 조성하고 수혈유구, 건물지 등을 시설하여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구의 양상은 한성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일정기간 동안 점유하고 활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유물상의 특징은 3가지 점에서 몽촌토성의 북서쪽에 인접하여 위치한 풍납동토성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원삼국기의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편이 거의 확인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삼국시대 문화층에서 출토되는 백제 토기는 한성 Ⅰ기에 해당하는 4세기 중엽 이전의 것들은 극히 드물며, 대부분 4세기 후반~5세기대의 한성 Ⅱ기에 해당하고 있다. 셋째, 풍납동토성에서는 고구려 유물의 출토 빈도가 극히 낮은데 비하여 몽촌토성에서는 1980년대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고구려 토기·철촉 등의 유물이 상대적으로 출토빈도가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구와 유물의 양상은 몽촌토성이 축조된 지역은 원삼국기~한성Ⅰ기에는 거의 활용되지 않다가 4세기 중엽 이후 몽촌토성이 축조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판단되며,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한 이후에도 몽촌토성을 일정시기 동안 남방진출의 중심기지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몽촌토성 북서벽 구간의 성벽 외측 하단에 대한 조사에서는 기존에 목책으로 인식되었던 柱穴이 土城의 축조와 관련된 협판을 고정하는 목주의 주혈일 가능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벽에서 출토된 유물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를 고려할 때, 조사지점의 성벽 축조시점은 4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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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에 대한 최근 발굴조사에서는 몽촌토성의 축조시점과 성격, 변천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삼국시대 유구와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유구는 도로와 수혈유구·건물�...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에 대한 최근 발굴조사에서는 몽촌토성의 축조시점과 성격, 변천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삼국시대 유구와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유구는 도로와 수혈유구·건물지 등이 일정한 공간 분포상의 정형성을 띠며 확인되었다. 즉, 도로는 격자상으로 구획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수혈유구와 건물지 등은 북문지 내측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의 도로로 둘러싸인 공간에 분포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부분은 백제 漢城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 이후의 시기에 고구려가 백제의 유구를 修改築하여 사용하거나 폐기된 백제 유구 위에 성토대지를 조성하고 수혈유구, 건물지 등을 시설하여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구의 양상은 한성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일정기간 동안 점유하고 활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유물상의 특징은 3가지 점에서 몽촌토성의 북서쪽에 인접하여 위치한 풍납동토성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원삼국기의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편이 거의 확인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삼국시대 문화층에서 출토되는 백제 토기는 한성 Ⅰ기에 해당하는 4세기 중엽 이전의 것들은 극히 드물며, 대부분 4세기 후반~5세기대의 한성 Ⅱ기에 해당하고 있다. 셋째, 풍납동토성에서는 고구려 유물의 출토 빈도가 극히 낮은데 비하여 몽촌토성에서는 1980년대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고구려 토기·철촉 등의 유물이 상대적으로 출토빈도가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구와 유물의 양상은 몽촌토성이 축조된 지역은 원삼국기~한성Ⅰ기에는 거의 활용되지 않다가 4세기 중엽 이후 몽촌토성이 축조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판단되며,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한 이후에도 몽촌토성을 일정시기 동안 남방진출의 중심기지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몽촌토성 북서벽 구간의 성벽 외측 하단에 대한 조사에서는 기존에 목책으로 인식되었던 柱穴이 土城의 축조와 관련된 협판을 고정하는 목주의 주혈일 가능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벽에서 출토된 유물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를 고려할 때, 조사지점의 성벽 축조시점은 4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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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recent excavation at the North gate area of Mongchon Earthen Fortress produced relics and artifacts from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to shed light on the construction time, nature, and changes of the Fortress. As for the relics from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life relics, including roads, pit relics and building sites, have shown a fixed distribution in certain spaces. It is noteworthy that Goguryeo renovated and used relics left by Baekje and established embankment land on top of relics discarded by Baekje to use such facilities as pit relics and building sites after it took Hanseong from Baekje. These relic patterns indicate that Goguryeo occupied and utilized the Fortress for a certain amount of time even after the fall of Hanseong Baekje.
      Its artifact characteristics have differences from those of Pungnap Earthen Fortress adjacent to it in the northwest in three aspects: first, there was almost no hard plain pottery and pottery of Proto-Three Kingdoms; second, most of Baekje pottery excavated in the cultural layer of Three Kingdoms fell in Hanseong Period II between the latter half of the fourth century to the fifth century with only a few pieces before Hanseong Period I in the middle fourth century; and third, unlike the Pungnap Earthen Fortress where the excavation frequency of Goguryeo artifacts was extremely low, the Fortress recorded a relatively higher excavation frequency of Goguryeo artifacts including pottery and iron arrowheads as demonstrated in the excavation projects in the 1980s.
      These relic and artifact patterns indicate that the area where the Fortress was built was hardly used from the period of Proto-Three Kingdoms to Hanseong Period I and was developed in full scale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in the middle fourth century. It is estimated that Goguryeo made use of the Fortress as its central base for the management and rule of its southern territory for a while even after it took Hanseong(漢城) of Baekje.
      An examination into the external bottom of the northwestern wall section in the Fortress raises a good possibility that the column pits were made to support wood board for the Fortress. Based on the artifacts excavated in the fortress walls and their radiocarbon dating results, it is estimated that the fortress wall, at the point of survey, was built in the latter half of the four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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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ecent excavation at the North gate area of Mongchon Earthen Fortress produced relics and artifacts from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to shed light on the construction time, nature, and changes of the Fortress. As for the relics from the period of...

      The recent excavation at the North gate area of Mongchon Earthen Fortress produced relics and artifacts from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to shed light on the construction time, nature, and changes of the Fortress. As for the relics from the period of Three Kingdoms, life relics, including roads, pit relics and building sites, have shown a fixed distribution in certain spaces. It is noteworthy that Goguryeo renovated and used relics left by Baekje and established embankment land on top of relics discarded by Baekje to use such facilities as pit relics and building sites after it took Hanseong from Baekje. These relic patterns indicate that Goguryeo occupied and utilized the Fortress for a certain amount of time even after the fall of Hanseong Baekje.
      Its artifact characteristics have differences from those of Pungnap Earthen Fortress adjacent to it in the northwest in three aspects: first, there was almost no hard plain pottery and pottery of Proto-Three Kingdoms; second, most of Baekje pottery excavated in the cultural layer of Three Kingdoms fell in Hanseong Period II between the latter half of the fourth century to the fifth century with only a few pieces before Hanseong Period I in the middle fourth century; and third, unlike the Pungnap Earthen Fortress where the excavation frequency of Goguryeo artifacts was extremely low, the Fortress recorded a relatively higher excavation frequency of Goguryeo artifacts including pottery and iron arrowheads as demonstrated in the excavation projects in the 1980s.
      These relic and artifact patterns indicate that the area where the Fortress was built was hardly used from the period of Proto-Three Kingdoms to Hanseong Period I and was developed in full scale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in the middle fourth century. It is estimated that Goguryeo made use of the Fortress as its central base for the management and rule of its southern territory for a while even after it took Hanseong(漢城) of Baekje.
      An examination into the external bottom of the northwestern wall section in the Fortress raises a good possibility that the column pits were made to support wood board for the Fortress. Based on the artifacts excavated in the fortress walls and their radiocarbon dating results, it is estimated that the fortress wall, at the point of survey, was built in the latter half of the four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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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權五榮, "한성백제의 처음과 끝, In 한일 삼국·고분시대의 연대관(Ⅱ)" 2007

      2 余昊奎, "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 2014

      3 임영진, "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 2014

      4 권오영, "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 2014

      5 이혁희, "한성백제기 토성의 축조기법과 그 의미" 한국고고학회 (89) : 173-215, 2013

      6 이홍종, "한성 백제기 도성권의 지형경관" 중부고고학회 14 (14): 45-67, 2015

      7 서정석, "위례성(慰禮城)과 한산(漢山)에 대하여" 백산학회 (95) : 105-135, 2013

      8 이도학,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한성의 도시구조-" 2014

      9 최종택, "아차산 보루와 고구려 남진경영" 서경문화사 122-, 2013

      10 권오영, "삼국시대 壁柱建物 연구" 한국고고학회 (60) : 158-21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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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홍종, "한성 백제기 도성권의 지형경관" 중부고고학회 14 (14): 45-6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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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박순발, "백제의 도성" 충남대학교 출판부 2010

      12 신희권,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서경 2003

      13 김성남, "백제 한성양식토기의 형성과 변천에 대하여" 서울경기고고학회 3 (3): 2004

      14 李知根, "백제 사비기 토제연통의 연구" 忠南大學校 大學院 2014

      15 성정용, "백제 관련 연대결정자료와 연대관" 호서고고학회 (22) : 76-90, 2010

      16 김용민, "백제 煙家에 대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 (35) : 58-81, 2002

      17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Ⅱ-2014년 몽촌토성 북서벽 舊 목책재설치구간 발굴조사 보고서" 2016

      18 이혁희, "몽촌토성 Ⅱ2014년 몽촌토성 북서벽 舊 목책설치구간 발굴조사 보고서" 한성백제박물관 2016

      19 임영진, "동아시아속의 풍납동토성" 학연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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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朴淳發, "漢城百濟 考古學의 硏究 現況 點檢" 서울경기고고학회 3 (3): 2004

      43 김일규, "漢城期 百濟土器 編年再考" 한국고대학회 (27) : 111-1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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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박중균, "夢村土城Ⅱ-2014년 몽촌토성 북서벽 舊 목책 설치구간 발굴조사 보고서-" 한성백제박물관 2016

      47 한성백제박물관, "夢村土城Ⅰ-2013·2014년 몽촌토성 북문지 내측 발굴조사 보고서-" 2016

      48 박중균, "夢村土城Ⅰ-2013·2014년 몽촌토성 북문지 내측 발굴조사 보고서-" 한성백제박물관 2016

      49 최종택, "夢村土城 內 高句麗遺蹟 再考" 고려사학회 (12) : 1-40, 2002

      50 韓芝守, "中國 六朝의 陶磁" 국립공주박물관 2011

      51 魏楊菁, "中國 六朝의 陶磁" 국립공주박물관 2011

      52 鄭相基, "中國 六朝의 陶磁" 국립공주박물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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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25 0.25 0.2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21 0.34 0.727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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