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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가동·무동의 개념 정립과 활동 ― 행행(行幸)·강무(講武)·사악(賜樂)을 중심으로 ― = Conceptualization of Gadong and Mudong in Joseon Period and Their Activities - Focused on events of royal parades, martial arts guidance, and royal-granted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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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 초기에 대비와 중궁 및 명부(命婦) 등이 참석하는 내연(內宴)이나 임금과 신하가 참석하는 외연(外宴)을 막론하고, 춤과 노래는 모두 여악이 담당했다. 그런데 여악으로 인한 풍기문란 등의 문제가 종종 발생하므로, 치인(治人)의 위치에 있는 위정자(爲政者)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군신(君臣) 간의 예연(禮宴)에서는 종래 여악이 해오던 춤과 노래를 남자아이로 대체하기로 하고, 1431년(세종 13) 8월에 이들이 입을 관복에 대해 논의하는데, 이때 무동이란 호칭이 처음 등장했다.
      1432년(세종 14)에 공천(公賤) 중에서 10세가량의 어린 소년 60명을 뽑아 1433년(세종 15) 정월 회례연에서 공연한 것이 조선시대 무동제도의 시작이다. 무동은 <몽금척>·<오양선>·<아박>·<무고> 등의 정재를 공연했는데, 이들 정재는 노래와 춤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무동은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무동은 성인 남자의 체격과 목소리를 갖추기 전까지만 활동했으므로 대략 활동 상한선이 15살이었다. 무동을 뽑아서 교육시켜 익숙해질 만하면 또 다른 무동을 뽑아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1447(세종 29)에 10대 초반의 남자아이로 구성되는 무동을 혁파하고, 노래와 춤에 능한 악공으로 하여금 정재를 공연하게 했다. 무동을 뽑지 않은 지 3년 남짓 지난 1450년(문종 즉위) 11월에 박연은 ‘외연과 객인연(客人宴)의 공연에, 아이가 아니면 노래가 맑지 못하고 춤이 볼품없으니 가동을 뽑아야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연이 말한 가동 또한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1447년에 무동을 혁파했으므로, ‘가동’이라는 이름을 쓴 것일 뿐, 실질적인 내용은 ‘무동’과 같다.
      박연의 건의가 채택되었는데, 『악학궤범』에는 ‘경오년(1450)에 무동제도를 회복했다’라고 서술하였다. 즉, 가동이나 무동이 모두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이므로, 서로 통용되었으며 때로는 아예 가무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동이나 가동은 여악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므로, 여악과 대비하여 남악으로도 불렸다. 연향에서 가동·무동이 통용되었지만 ‘외연 남악제도’가 시행된 기간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하는 용어로 무동이 주로 쓰였다.
      태조·태종대는 행행·강무에 여악을 썼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가동을 썼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를 죽음에까지 내몬 세조대(1455~1468)에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제도들이 퇴행되는 것과 더불어, 세조 중년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여악을 썼다. 성종대(1469~1494) 사림의 정계 진출과 맞물려 1473년(성종 4)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남악을 쓰게 되었고, 제도적으로 정립되었다. 비록 연산군대(1494~1506)에 일탈이 있긴 했으나, 중종대(1506~1544)에 다시 회복되어, 지속적으로 행행·강무에는 남악을 썼다.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1433년(세종 15) 이후 25년가량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년간만 시행되었고, 선조대 후반에 정착될 듯하다가 광해군대(1608~1623)에 무너지고, 인조반정(1623) 이후에야 확립되었는데, 행행·강무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성종대에 정립되었고, 연산군대에 흔들렸다가 중종반정(1506년) 이후로 확립되었다.
      한편, 2016년에 <뎡상공 희방긔록(鄭相公回榜紀錄)>을 근거로 ‘조선후기에 사악(賜樂)으로 무동과 함께 기녀를 내려준 것’을 시사하는 논문이 발표되어 위 논지와 정면배치 되는데, 정상공 즉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회방(回榜)을 맞이한 1862년 일기의 어디에도 기녀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동을 여자처럼 꾸민 것을 비난한 바 있으므로, <뎡상공 희방긔록>에 나오는 ‘일대명기 절대기녀 무산신녀 □려온듯’ ‘낙포선녀 하□□듯’이란 구절은 ‘녹의홍상을 입은 무동이 춤추는 자태가 기녀나 선녀처럼 아름다웠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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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초기에 대비와 중궁 및 명부(命婦) 등이 참석하는 내연(內宴)이나 임금과 신하가 참석하는 외연(外宴)을 막론하고, 춤과 노래는 모두 여악이 담당했다. 그런데 여악으로 인한 풍기문란 ...

      조선 초기에 대비와 중궁 및 명부(命婦) 등이 참석하는 내연(內宴)이나 임금과 신하가 참석하는 외연(外宴)을 막론하고, 춤과 노래는 모두 여악이 담당했다. 그런데 여악으로 인한 풍기문란 등의 문제가 종종 발생하므로, 치인(治人)의 위치에 있는 위정자(爲政者)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군신(君臣) 간의 예연(禮宴)에서는 종래 여악이 해오던 춤과 노래를 남자아이로 대체하기로 하고, 1431년(세종 13) 8월에 이들이 입을 관복에 대해 논의하는데, 이때 무동이란 호칭이 처음 등장했다.
      1432년(세종 14)에 공천(公賤) 중에서 10세가량의 어린 소년 60명을 뽑아 1433년(세종 15) 정월 회례연에서 공연한 것이 조선시대 무동제도의 시작이다. 무동은 <몽금척>·<오양선>·<아박>·<무고> 등의 정재를 공연했는데, 이들 정재는 노래와 춤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무동은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무동은 성인 남자의 체격과 목소리를 갖추기 전까지만 활동했으므로 대략 활동 상한선이 15살이었다. 무동을 뽑아서 교육시켜 익숙해질 만하면 또 다른 무동을 뽑아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1447(세종 29)에 10대 초반의 남자아이로 구성되는 무동을 혁파하고, 노래와 춤에 능한 악공으로 하여금 정재를 공연하게 했다. 무동을 뽑지 않은 지 3년 남짓 지난 1450년(문종 즉위) 11월에 박연은 ‘외연과 객인연(客人宴)의 공연에, 아이가 아니면 노래가 맑지 못하고 춤이 볼품없으니 가동을 뽑아야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연이 말한 가동 또한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1447년에 무동을 혁파했으므로, ‘가동’이라는 이름을 쓴 것일 뿐, 실질적인 내용은 ‘무동’과 같다.
      박연의 건의가 채택되었는데, 『악학궤범』에는 ‘경오년(1450)에 무동제도를 회복했다’라고 서술하였다. 즉, 가동이나 무동이 모두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이므로, 서로 통용되었으며 때로는 아예 가무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동이나 가동은 여악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므로, 여악과 대비하여 남악으로도 불렸다. 연향에서 가동·무동이 통용되었지만 ‘외연 남악제도’가 시행된 기간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하는 용어로 무동이 주로 쓰였다.
      태조·태종대는 행행·강무에 여악을 썼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가동을 썼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를 죽음에까지 내몬 세조대(1455~1468)에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제도들이 퇴행되는 것과 더불어, 세조 중년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여악을 썼다. 성종대(1469~1494) 사림의 정계 진출과 맞물려 1473년(성종 4)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남악을 쓰게 되었고, 제도적으로 정립되었다. 비록 연산군대(1494~1506)에 일탈이 있긴 했으나, 중종대(1506~1544)에 다시 회복되어, 지속적으로 행행·강무에는 남악을 썼다.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1433년(세종 15) 이후 25년가량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년간만 시행되었고, 선조대 후반에 정착될 듯하다가 광해군대(1608~1623)에 무너지고, 인조반정(1623) 이후에야 확립되었는데, 행행·강무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성종대에 정립되었고, 연산군대에 흔들렸다가 중종반정(1506년) 이후로 확립되었다.
      한편, 2016년에 <뎡상공 희방긔록(鄭相公回榜紀錄)>을 근거로 ‘조선후기에 사악(賜樂)으로 무동과 함께 기녀를 내려준 것’을 시사하는 논문이 발표되어 위 논지와 정면배치 되는데, 정상공 즉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회방(回榜)을 맞이한 1862년 일기의 어디에도 기녀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동을 여자처럼 꾸민 것을 비난한 바 있으므로, <뎡상공 희방긔록>에 나오는 ‘일대명기 절대기녀 무산신녀 □려온듯’ ‘낙포선녀 하□□듯’이란 구절은 ‘녹의홍상을 입은 무동이 춤추는 자태가 기녀나 선녀처럼 아름다웠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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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Gadong(歌童) and Mudong(舞童) are the output resulting from Joseon-era efforts to realize Neo-Confucian ideal society aimed at establishing decent customs. Relationships between men and women provide a strong base for home and society.
      Early Joseon period saw instrumental performance conducted by Akgong (樂工 musicians), and dance and singing conducted by Yeogi (女妓 female entertainers). To set up an example of separating men and women, king-hosted banquets from 1433 (15th year of King Sejong reign) excluded Yeogi, and made dance and singing conducted by male children, who were referred to as Mudong.
      About 10-year-old children were selected from public slaves, and the age limit was 15 years old when men began to develop their adult physique and voice. It was challenging to continue to select, train, abandon and replace Mudong. Thus, in 1447 (29th year of King Sejong reign), Mudong, consisting of 10 year old or so male children, were revamped to replace them with Akgong good at singing and dance in the events of royal-palace dance and singing.
      About three years later, in November 1450 (at the enthronement of King Munjong), Park Yeon(朴堧) emphasized: "Men other than children cannot offer clear voice in singing while perform dancing poorly, so Gadong must be selected." The term Gadong actually was used as a synonym of Mudong, boys who performed dancing and singing. As such, in banquets, Gadong or Mudong all meant boys who performed singing and dancing, so the two terms were interchangeably used, and sometimes, they were referred to as Gamudong and also Namak (male musicians) opposed to Yeoak (femal musicians).
      In the events of Cheoyong dance,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artial arts, however, Gadong and Mudong were used as different meaning; Gadong undertook dancing, while Mudong undertook singing; they also wore different costumes.
      As banquets between the king and his subjects began to use Namak in 1433 (15th year of King Sejong reign), it began in the King Sejong period (1418~1450) to use Namak(男樂) in the events of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artial art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1455~1468), the trend declined, resulting in using Yeoak(女樂) until 1473 (4th year of King Seongjong reign) when Namak began to be used, resulting in establishing the system. Although the system was deviated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1494~1506), it resumed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1506~1544), allowing Namak to continue to be used in the events of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ilitary arts practice.
      Musical performance was granted to celebrate ministers' congratulatory events or passers of the prestigious official examination Gwageo(科擧). As such, the first half of Joseon period generally saw Akgong and Yeogi granted, and the second half of Joseon period saw Akgong and Mudong gra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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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dong(歌童) and Mudong(舞童) are the output resulting from Joseon-era efforts to realize Neo-Confucian ideal society aimed at establishing decent customs. Relationships between men and women provide a strong base for home and society. Early Joseo...

      Gadong(歌童) and Mudong(舞童) are the output resulting from Joseon-era efforts to realize Neo-Confucian ideal society aimed at establishing decent customs. Relationships between men and women provide a strong base for home and society.
      Early Joseon period saw instrumental performance conducted by Akgong (樂工 musicians), and dance and singing conducted by Yeogi (女妓 female entertainers). To set up an example of separating men and women, king-hosted banquets from 1433 (15th year of King Sejong reign) excluded Yeogi, and made dance and singing conducted by male children, who were referred to as Mudong.
      About 10-year-old children were selected from public slaves, and the age limit was 15 years old when men began to develop their adult physique and voice. It was challenging to continue to select, train, abandon and replace Mudong. Thus, in 1447 (29th year of King Sejong reign), Mudong, consisting of 10 year old or so male children, were revamped to replace them with Akgong good at singing and dance in the events of royal-palace dance and singing.
      About three years later, in November 1450 (at the enthronement of King Munjong), Park Yeon(朴堧) emphasized: "Men other than children cannot offer clear voice in singing while perform dancing poorly, so Gadong must be selected." The term Gadong actually was used as a synonym of Mudong, boys who performed dancing and singing. As such, in banquets, Gadong or Mudong all meant boys who performed singing and dancing, so the two terms were interchangeably used, and sometimes, they were referred to as Gamudong and also Namak (male musicians) opposed to Yeoak (femal musicians).
      In the events of Cheoyong dance,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artial arts, however, Gadong and Mudong were used as different meaning; Gadong undertook dancing, while Mudong undertook singing; they also wore different costumes.
      As banquets between the king and his subjects began to use Namak in 1433 (15th year of King Sejong reign), it began in the King Sejong period (1418~1450) to use Namak(男樂) in the events of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artial art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1455~1468), the trend declined, resulting in using Yeoak(女樂) until 1473 (4th year of King Seongjong reign) when Namak began to be used, resulting in establishing the system. Although the system was deviated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1494~1506), it resumed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1506~1544), allowing Namak to continue to be used in the events of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ilitary arts practice.
      Musical performance was granted to celebrate ministers' congratulatory events or passers of the prestigious official examination Gwageo(科擧). As such, the first half of Joseon period generally saw Akgong and Yeogi granted, and the second half of Joseon period saw Akgong and Mudong gra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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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六典條例" 경문사 1979

      2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3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9

      4 송지원, "조선시대 소년 무동수, 무동의 존재양상" 한국국악학회 48 : 293-312, 2010

      5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3

      6 조경아, "장악원 무동과 기녀의 춤을 사가(私家)에 내려주다: 정원용 회방연(回榜宴)의 사례를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회 43 : 79-111, 2016

      7 손선숙, "궁중정재용어사전" 민속원 2005

      8 "국역경산일록" 보고사 2009

      9 이윤정, "韶巖權五聖博士華甲紀念 音樂學論叢" 韶巖權五聖博士華甲紀念 論文集刊行委員會 2000

      10 "茶山詩文集"

      1 "六典條例" 경문사 1979

      2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3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9

      4 송지원, "조선시대 소년 무동수, 무동의 존재양상" 한국국악학회 48 : 293-312, 2010

      5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3

      6 조경아, "장악원 무동과 기녀의 춤을 사가(私家)에 내려주다: 정원용 회방연(回榜宴)의 사례를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회 43 : 79-111, 2016

      7 손선숙, "궁중정재용어사전" 민속원 2005

      8 "국역경산일록" 보고사 2009

      9 이윤정, "韶巖權五聖博士華甲紀念 音樂學論叢" 韶巖權五聖博士華甲紀念 論文集刊行委員會 2000

      10 "茶山詩文集"

      11 鄭良婉, "淵民 李家源博士 六秩頌壽紀念論叢" 범학도서 1977

      12 송방송, "樂掌謄錄硏究"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0

      13 "樂學軌範"

      14 "朝鮮王朝實錄"

      15 권태욱, "朝鮮前期 掌樂院의 歌舞童考" 韓國音樂史學會 (창간) : 1988

      16 "承政院日記"

      17 "慵齋叢話"

      18 "園幸乙卯整理儀軌"

      19 김종수, "仙華金靜子敎授華甲紀念 音樂學論文集" 선화김정자교수화갑기념 논문집간행위원회 2002

      20 "[高宗]丁亥進饌儀軌"

      21 "[英祖]甲子進宴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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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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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4 0.4 0.4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 0.44 1.065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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