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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공신학(荊公新學)과 희녕공거개혁(熙寧貢擧改革) -형공신학(荊公新學)이 관학(官學)의 교재(敎材) 변동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 荊公新學與熙寧貢擧改革 -以荊公新學對官學敎材變動的影響爲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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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글은 王安石 學術思想의 형성 배경을 검토하고, 아울러 이 새로운 학술사상이 熙寧연간의 貢擧改革을 통해 이른바 “荊公新學”의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다각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북송 중기 공거와 학교정책을 둘러싼 독특한 정치문화의 원형을 추적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우선 이를 구명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왕안석의 학술사상이 당시의 공거와 학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첫째, 왕안석의 새로운 학술사상은 이른바 “宋學”의 출현이라는 학술사적 맥락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왕안석의 학술 정신은 經典 속에 내포된 義理를 밝히는 데만 집중하였던 것이 아니라, 魏晉 이래 현실과 괴리된 空疏와 空談을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현실에 부합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른바 “學以致用”, “經世濟用” 등의 정신은 곧 왕안석 학술사상의 기본 원칙이자 “송학”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였다.
      둘째, 宋神宗은 熙寧 4년(1071)에 왕안석이 제출한 개혁 방안을 기초로 “貢擧新制”를 제정하여 천하에 반포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오직經義 및 論, 策으로 進士를 선발토록 한 데 있었다. 아울러 응시자들로 하여금 『詩』ㆍ『書』ㆍ『易』ㆍ『禮記』ㆍ『周禮』 중에 하나의 경전을 선택하여 공부하되, 반드시 『論語』와 『孟子』를 겸하여 익히도록 하였다. 이 개혁의 중점 목표는 응시자들로 하여금 “章句訓詁之學”의 질곡으로 부터 탈피하여 경전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면모를 더욱 심도 있게 탐구하게 함으로써 현실 요구에 부합하는 치국 인재를 선발하는 데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공거개혁에 의해 시험 내용이 변경됨에 따라 관학 교재에도 중대한 변동이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그중 『春秋』 3傳이 일거에 시험 과목과 교재 범주에서 탈락하고, 『孟子』가 “兼經”의 지위를 획득하여 관학의 교재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와 같은 조치는 왕안석의 학술적 지향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였고, 이는 앞서 언급한 “학이치용”, “경세제용” 등의 근본원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셋째, 공거와 학교 방면의 개혁은 모든 변법의 시발점이자 토대였다. 왕안석은 이미 범중엄 등의 개혁 실패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고, 이러한 실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개혁의 당위성을 찾아야만 했다. 이른바 “荊公新學”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형공신학은 개혁 실천의 착안점이 되었으며, 모든 변법 영역에서 이론적인 근거로서 활용되었다. 전면적인 개혁의 실현을 위해 왕안석은 매우 의식적으로 “학이치용”과 “경세제용”의 학술 원칙을 고수하였다. 변법 사상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춘 치국 인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또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을 때, 그 개혁은 비로소 유구한 생명력을 담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개혁 실천의 당위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왕안석은 이른바 “一道德, 同風俗”이라는 정치적 이념을 설정하고, 학술사상과 정치인식의 통일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즉 공거와 학교 개혁을 기회의 장으로 삼아 사상과 인식을 통일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그 구체적 표현이 바로 『三經新義』의 편찬이었다. 왕안석은 『삼경신의』의 편찬과 반포를 통해 자신의 학술 사상을 국가의 치국 철학으로 확립시켰으며, 이를 통해 이른바 “新學”의 사상체계를 출현시켰다. 즉 왕안석 학술사상의 官學化는 이른바 “형공신학”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학술사상과 정치인식의 통일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형공신학의 형성 배경은 학술이 현실로부터 괴리하는 모순으로부터 탈피하여 사회 문제의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배출된 치국인재들로 인해 선순환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內聖外王”의 이상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형공신학은 이른바 “송학”의 중점 사상과 이론적 특징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이면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 사회 속에서 실현해 내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그러나 북송 중후기의 정치문화속에서 왕안석의 “一道德” 관념은 이에 저항하는 세력과의 지속적인 이념 대립을 야기하였고, 송신종과 왕안석이 역사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에도 공거와 학교정책을 둘러싼 이들의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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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王安石 學術思想의 형성 배경을 검토하고, 아울러 이 새로운 학술사상이 熙寧연간의 貢擧改革을 통해 이른바 “荊公新學”의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다각적으로 추적함으로...

      이 글은 王安石 學術思想의 형성 배경을 검토하고, 아울러 이 새로운 학술사상이 熙寧연간의 貢擧改革을 통해 이른바 “荊公新學”의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다각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북송 중기 공거와 학교정책을 둘러싼 독특한 정치문화의 원형을 추적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우선 이를 구명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왕안석의 학술사상이 당시의 공거와 학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첫째, 왕안석의 새로운 학술사상은 이른바 “宋學”의 출현이라는 학술사적 맥락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왕안석의 학술 정신은 經典 속에 내포된 義理를 밝히는 데만 집중하였던 것이 아니라, 魏晉 이래 현실과 괴리된 空疏와 空談을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현실에 부합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른바 “學以致用”, “經世濟用” 등의 정신은 곧 왕안석 학술사상의 기본 원칙이자 “송학”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였다.
      둘째, 宋神宗은 熙寧 4년(1071)에 왕안석이 제출한 개혁 방안을 기초로 “貢擧新制”를 제정하여 천하에 반포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오직經義 및 論, 策으로 進士를 선발토록 한 데 있었다. 아울러 응시자들로 하여금 『詩』ㆍ『書』ㆍ『易』ㆍ『禮記』ㆍ『周禮』 중에 하나의 경전을 선택하여 공부하되, 반드시 『論語』와 『孟子』를 겸하여 익히도록 하였다. 이 개혁의 중점 목표는 응시자들로 하여금 “章句訓詁之學”의 질곡으로 부터 탈피하여 경전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면모를 더욱 심도 있게 탐구하게 함으로써 현실 요구에 부합하는 치국 인재를 선발하는 데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공거개혁에 의해 시험 내용이 변경됨에 따라 관학 교재에도 중대한 변동이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그중 『春秋』 3傳이 일거에 시험 과목과 교재 범주에서 탈락하고, 『孟子』가 “兼經”의 지위를 획득하여 관학의 교재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와 같은 조치는 왕안석의 학술적 지향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였고, 이는 앞서 언급한 “학이치용”, “경세제용” 등의 근본원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셋째, 공거와 학교 방면의 개혁은 모든 변법의 시발점이자 토대였다. 왕안석은 이미 범중엄 등의 개혁 실패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고, 이러한 실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개혁의 당위성을 찾아야만 했다. 이른바 “荊公新學”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형공신학은 개혁 실천의 착안점이 되었으며, 모든 변법 영역에서 이론적인 근거로서 활용되었다. 전면적인 개혁의 실현을 위해 왕안석은 매우 의식적으로 “학이치용”과 “경세제용”의 학술 원칙을 고수하였다. 변법 사상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춘 치국 인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또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을 때, 그 개혁은 비로소 유구한 생명력을 담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개혁 실천의 당위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왕안석은 이른바 “一道德, 同風俗”이라는 정치적 이념을 설정하고, 학술사상과 정치인식의 통일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즉 공거와 학교 개혁을 기회의 장으로 삼아 사상과 인식을 통일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그 구체적 표현이 바로 『三經新義』의 편찬이었다. 왕안석은 『삼경신의』의 편찬과 반포를 통해 자신의 학술 사상을 국가의 치국 철학으로 확립시켰으며, 이를 통해 이른바 “新學”의 사상체계를 출현시켰다. 즉 왕안석 학술사상의 官學化는 이른바 “형공신학”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학술사상과 정치인식의 통일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형공신학의 형성 배경은 학술이 현실로부터 괴리하는 모순으로부터 탈피하여 사회 문제의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배출된 치국인재들로 인해 선순환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內聖外王”의 이상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형공신학은 이른바 “송학”의 중점 사상과 이론적 특징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이면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 사회 속에서 실현해 내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그러나 북송 중후기의 정치문화속에서 왕안석의 “一道德” 관념은 이에 저항하는 세력과의 지속적인 이념 대립을 야기하였고, 송신종과 왕안석이 역사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에도 공거와 학교정책을 둘러싼 이들의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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