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양 세력이 동점하기 이전인 18세기를 전후한 250년 동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던 평화시기였다는 점에서 착안되었다. 그 당시 동아시아 삼국이 평화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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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Korean
KCI우수등재
학술저널
219-240(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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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양 세력이 동점하기 이전인 18세기를 전후한 250년 동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던 평화시기였다는 점에서 착안되었다. 그 당시 동아시아 삼국이 평화체제...
이 글은 서양 세력이 동점하기 이전인 18세기를 전후한 250년 동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던 평화시기였다는 점에서 착안되었다. 그 당시 동아시아 삼국이 평화체제를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있었던 평화 유지 전략은 무엇이었는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18세기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조공체제로 규정하고, 당시에 중국과 일본 지역을 다녀왔던 조선 사행원들의 기록을 통해 조공체제를 유지시켰던 유교적 관념과 국제관계 상황을 서술한다. 특히 18세기를 전후한 조선의 공식적인 사행의 파견이 청조와 일본 막부에 동시기적으로 중복된 점을 주목하고 조청관계와 조일관계의 성격과 의의를 비교 또는 연계시킨다.
조청관계는 명분을 통한 교섭이었고 우호의 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청조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천하관에 기초한 이상적인 국제관계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조를 염두에 두고 정통왕조라고 하는 전통적 인식이 분명히 잔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과의 관계를 현실적인 조건들을 수용하는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자 했다.
대청사행에 비해서 대일사행은 시작 자체가 명분보다는 7년 전쟁의 전후처리와 평화구축이라는 현실적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조선 왕조는 교련을 이상으로 삼고 막부에 대해 화친정책을 지속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선진 문물의 중개 역할을 담당해서 일본을 유교 국제권에 포섭한 결과를 낳았다. 막부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과 국교를 맺음으로써, 동아시아 국제 사회와 연결을 맺을 수 있었다. 조선왕조와 대등하고 정식의 외교관계를 맺고, 네덜란드와 류큐를 조공국으로 간주하는 일본형 화이질서를 재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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