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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德富蘇峰의 동아시아 인식 - 청일전쟁부터 한국병합 시기를 중심으로- = Tokutomi Soho's Views on East Asia : focused on era from the Sino-Japanese War to the annex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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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study examines the views on East Asia held by Tokutomi Soho (1863-1957), an influential journalist and historian in modern Japan. This study focuses on his views of East Asian countries like China and Korea especially from the Sino-Japanese War (1...

      The study examines the views on East Asia held by Tokutomi Soho (1863-1957), an influential journalist and historian in modern Japan. This study focuses on his views of East Asian countries like China and Korea especially from the Sino-Japanese War (1894-95) to the annexation of Korea (1910), when he shifted to nationalistic and imperialist logics.
      Tokutomi's views on East Asia were related to the Datsuaron (Advocacy of Escape from Asia) He argued that Japan equipped with Western civilization could be separated from its East Asian neighbors like China and Korea, which were still barbaric and lacked the ability to transform themselves into civilized countries. Then, China and Korea were seen not so much a part of alliance with Japan in resistance against the inroad of Western powers as an object of Japanese expansionism. As an influential journalist, Tokutomi played a leading role in promoting these imperialist views.
      Such Tokutomi's views remained unchanged even after his firsthand contacts with China and Korea. He travelled China for a long time in 1906 (right after the Russo-Japanese War) and again in 1917 (right after the World War I). Although, he subscribed to the policy of friendly relation with China, rescinding the idea of dividing China, he repeated his unchanging views on China that the Chinese lacked modern consciousness of nation, and that they were imbued with debilitating literary values and private personal interests, which hindered them from reforming their country and society.
      With regard to Korea, he maintained that Koreans were so corrupt and lazy that they were unable to achieve civilization on their own, thus justifying its annexation by Japan. In justifying Japan's aggression against Korea by its role of civilizing mission, lied his deep sense of disdain and discrimination against Korea, which remained uncivilized to his eyes.
      The views of Tokutomi were also shared by contemporary Japanese leaders and intellectuals. He tried to be an initiator in proposing a variety of imperialist foreign policy suited to changing circumstances. Therefore, he put forth the theory of harmony of Eastern and Western civilizations, when his Datsuaron lost practical significance due to the Russo-Japanese War and the theory of yellow peril. Later, when Japan pursued with expansionist policy after the World War I, he advanced pan-Asianism, departing from the idea of Peaceful expansionism. His views on East Asia were in line with the course of Japanese imperialism, maintaining consistency in rationalizing and theorizing the expansionism of Japanese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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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에서는 언론인자 역사가로서 근대일본의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친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의 동아시아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한국병합 시기에 걸쳐 도쿠토미...

      본 연구에서는 언론인자 역사가로서 근대일본의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친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의 동아시아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한국병합 시기에 걸쳐 도쿠토미가 국가주의, 제국주의의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구체화시켜 나갔는지를 추적하였다.
      도쿠토미의 동아시아 인식은 ‘脫亞論’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과 같은 문명을 구비하고 있어 ‘아시아적’이지 않으며, 중국과 조선 등 주변 아시아 국가는 기본적으로 야만적이어서 스스로 문명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주변 나라가 일본과 마찬가지로 구미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측면은 무시되고 구미열강과 일본의 팽창의 대상으로만 파악했다. 도쿠토미는 언론활동을 통해 이러한 제국주의적 동아시아 인식을 주도했다.
      도쿠토미의 동아시아 인식은 직접적인 견문을 통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7년 두 차례에 걸쳐 장기간 중국을 여행했다. 그 사이 ‘지나분할론’에서 ‘지나친선’론으로 대외정책론은 변모를 보였으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인에게는 근대적인 국가의식이 없다든가 중국은 ‘文弱’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만 앞세워 스스로 개혁의 가능성이 없다고 파악했다.
      조선에 관해서도 조선은 매우 부패하고 조선인은 게으르므로 스스로 문명화할 수 없으며 시대의 대세로 보아 일본에 의한 병합은 어쩔 수 없다며 식민통치를 정당화했다. 그 밑바탕에는 조선사회를 ‘야만’사회로 보는 멸시감과 차별의식이 뿌리 깊게 깔려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 의한 ‘문명화’를 강조하며 침략을 합리화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일본정부나 대부분의 일본지식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도쿠토미는 ‘제국주의’국가 일본의 전략을 미리 제시하고 그것을 선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대외정책론을 변화시켜 나갔다. 러일전쟁과 ‘황화론’을 통해 ‘탈아론’이 논리적 현실성을 잃자 ‘동서문명조화론’을 내세웠으며, 제1차대전 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실행해나가자 ‘평화적 팽창주의’에서 ‘아시아주의’로 나아갔다. 그는 꾸준히 일본의 대외팽창을 합리화하고 이론화하며 일본제국주의와 운명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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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朴羊信, "청일이후 일본 지식인의 대외인식론- 陸 南과 德富蘇峰을 중심으로 -" 동양학연구소 31 (31): 189-206, 2001

      2 和田守, "近代日本と德富蘇峰" 御茶の水書房 1990

      3 德富猪一郞, "蘇峰自傳" 中央公論社 1935

      4 渡部昇一, "歷史家としての德富蘇峰. in: 國語のイデオロギー" 中央公論社 1997

      5 神谷昌史, "東西文明調和論’の三つの型-大隈重信·德富蘇峰·浮田和民 (政治學篇)" 大東文化大學 9 : 2001

      6 澤田次郞, "日露戰爭後をめぐる德富蘇峰のアメリカ觀" 慶應義塾大學 31 : 1996

      7 齋藤洋子, "日淸戰爭後の德富蘇峰-「變節」 問題と歐米漫遊" 早稲田大學大學院社會科學硏究科 11 : 2005

      8 柴崎力榮, "日淸戰爭を契機とする德富蘇峰の転換について-海軍力と國際情報への着目" 人文社會 36 (36): 1991

      9 梅津順一, "文明開化と日本-福澤諭吉と德富蘇峰" 40 : 1990

      10 神谷昌史, "文明·大勢·孤立-德富蘇峰における‘支那’認識" 10 : 2002

      1 朴羊信, "청일이후 일본 지식인의 대외인식론- 陸 南과 德富蘇峰을 중심으로 -" 동양학연구소 31 (31): 189-206, 2001

      2 和田守, "近代日本と德富蘇峰" 御茶の水書房 1990

      3 德富猪一郞, "蘇峰自傳" 中央公論社 1935

      4 渡部昇一, "歷史家としての德富蘇峰. in: 國語のイデオロギー" 中央公論社 1997

      5 神谷昌史, "東西文明調和論’の三つの型-大隈重信·德富蘇峰·浮田和民 (政治學篇)" 大東文化大學 9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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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齋藤洋子, "日淸戰爭後の德富蘇峰-「變節」 問題と歐米漫遊" 早稲田大學大學院社會科學硏究科 11 : 2005

      8 柴崎力榮, "日淸戰爭を契機とする德富蘇峰の転換について-海軍力と國際情報への着目" 人文社會 36 (36):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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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德富猪一郞, "支那漫遊記" 民友社 1918

      12 澤田次郞, "慶應義塾大學" 慶應義塾大學 30 : 1996

      13 植手通有, "德富蘇峰集" 筑摩書房 1974

      14 神島二郞, "德富蘇峰集" 筑摩書房 1978

      15 伊藤, "德富蘇峰關係文書" 山川出版社 1982

      16 鄭大成, "德富蘇峰テクストにおける「朝鮮」表象-日本型オリエンタリズムと植民地主義" 5 : 2004

      17 藪田謙一郞, "德富蘇峰の見た淸末中國" 12 : 2001

      18 杉井六郞, "德富蘇峰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7

      19 李京錫, "德富蘇峰の亞細亞モンロー主義" 73 : 2003

      20 杉井六郞, "德富蘇峰の中國觀-とくに日淸戰爭を中心として" 明治期の日本と中國 30 : 1970

      21 齋藤洋子, "德富蘇峰の“The Far East”について" 早稲田大學 5 : 2005

      22 宮本盛太郞, "德富蘇峰の‘転校’とイギリス" 蒼林社 1983

      23 中村尙美, "德富蘇峰の‘アジア主義’" 108 : 1992

      24 梶田明宏, "德富蘇峰における言論と政治-思想と行動の原型をめぐって. in: 明治日本の政治家群像" 吉川弘文館 1993

      25 花立三郞, "德富蘇峰と大江義塾" ぺりかん社 1982

      26 有山輝雄, "德富蘇峰と國民新聞" 吉川弘文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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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梅津順一, "德富蘇峰と「力の福音」: 『將來之日本』から『時務一家言』へ" 19 (19): 2006

      29 米原謙, "德富蘇峰-日本ナショナリズムの軌跡" 中公新書 2003

      30 松本三之介, "德富蘇峰 『時代の流れと言論人』. in: 日本の思想家 2" 朝日新聞社 1963

      31 松本三之介, "平民主義の思想像-德富蘇峰. in: 明治精神の構造" 日本放送出版協會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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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國民新聞"

      34 "國民之友"

      35 德富猪一郞, "兩京去留誌" 民友社 1915

      36 德富猪一郞, "七十八日遊記" 民友社 1906

      37 澤田次郞, "ウィルソンの國際理想主義と德富蘇峰の反應" 慶應義塾大學 29 : 1996

      38 米原謙, "‘膨脹’する‘大日本’-日淸戰爭後の德富蘇峰" 50 (50): 2000

      39 요네하라 겐, "4개의 전쟁과 일본 내셔널리즘의 변용 -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를 소재로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1) : 115-133, 2008

      40 야가사키 히데노리, "21세기 일본의 선택-대일본주의인가? 소일본주의인가?" 41 (41): 2001

      41 朴羊信, "19·20세기 전환기 일본에서의 ‘제국주의’론의 諸相-서양사상과의 관련에서" 9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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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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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18 1.18 1.1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06 0.98 2.15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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