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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하대와 신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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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신라하대를 신라의 쇠퇴기인 羅末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진성여왕 3년 농민봉기 이전의 신라하대 중기 사회의 안정을 언급한 사료들도 다수 있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사료들의 ...

      신라하대를 신라의 쇠퇴기인 羅末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진성여왕 3년 농민봉기 이전의 신라하대 중기 사회의 안정을 언급한 사료들도 다수 있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사료들의 의미를 과소 평가했으며,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도하였다. 하지만 사료에 근거한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당대의 사회적 상황을 다면적으로 검증해볼 여지도 있다.
      『삼국사기v』에서 三代의 시기구분은 王系를 근거로 한 것으로 하대를 말세, 또는 말기의 의미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말세라는 표현은 하대 전후시기에도 등장하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리 전개될 수 있는 것으로 하대 시기와 직결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신무왕의 즉위 이후 하대 초기의 왕위계승 분쟁은 일단락되고 신라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당은 신라에 원군을 청할만큼 하대시기 신라를 군자국으로 인식하였고, 이것은 당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때문에 이른바 ‘羅末’의 시간적 범위와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이를 하대와 동일시하는 시각은 좀 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진성여왕 3년의 농민봉기는 시작부터 왕조 부정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조건과 조응하여 신라체제를 붕괴시키고 신라를 삼국으로 분열시켰다. 이때를 신라말과 후삼국의 시대적 전환기로 인식한 기록들이 보인다.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멸망한 백제,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는 신라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내부에서 붕괴되었다. 5대 10국과 당 말기가 구분되는 중국과는 달리 우리는 신라의 분열과 후삼국의 재편, 신라의 말기가 동시에 진행되었고, 신라말과 후삼국시대라는 인식도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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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Hadae period(下代) of Silla(新羅) is often understood to be the late Silla dynasty which means the decline phase of Silla. However, various historical records have been found to reveal the social stability before the peasant uprising in the th...

      The Hadae period(下代) of Silla(新羅) is often understood to be the late Silla dynasty which means the decline phase of Silla. However, various historical records have been found to reveal the social stability before the peasant uprising in the third year of Queen Chin-sung(眞聖女王). Although the previous literature had a tendency to reduce the significance of these historical records and even interpret them as if they have different meanings, it seems to be reasonable to triangulate the social situation based on historical materials in those days.
      As the division of the period in Samdea(三代), according to 『Samguksagi(三國史記)』?, is on the basis of royal lineage, it didn"t establish the Hadae period as a meaning of degenerate age or last period. Also, considering the expression ‘degenerate age(末世)’ appears in the period both before and after the Hadae period, which means the age can be understood differently depending on historical context, the direct link between the Hadae period and degenerate age seems to fail to be appropriate. As the contention for the throne in the early Hadae period ceased after king Shinmu(神武王)"s accedence, the Silla society regained its stability. Tang (唐) recognized Silla as a land of gentleman(君子國). Hence, the current study aimed at investigating the temporal range and the political character in the so-called ‘closing years of Silla’ and verifying whether the Hadae period could be identified with the closing years of Silla.
      The peasant uprising during the third year of Queen Chin-sung didn"t aim to deny dynasty from the beginning, but led to the collapse of Silla and the division of Silla into three states, in response to the historical contexts. The records show that this period was recognized as the historical turning point of the late Silla dynasty and the Late Three Kingdoms(後三國).
      Silla collapsed internally because of the expanding perception that Silla was closing among the people. In China"s history, there has been a clear distinction between Wu-Tai Shoh-Kuo(五代十國) and the late Tang dynasty. In contrast, several incidents such as Silla"s division, Late Three Kingdoms" reorganization, and Silla"s closing years were progressed simultaneously in the Hadae period so that the late Silla dynasty and Late Three Kingdoms have been mixed and used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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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신라하대의 설정과 신라말
      • Ⅲ. 하대의 안정과 신라말 인식의 등장
      • Ⅳ. 신라말 인식의 확산과 후삼국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신라하대의 설정과 신라말
      • Ⅲ. 하대의 안정과 신라말 인식의 등장
      • Ⅳ. 신라말 인식의 확산과 후삼국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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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全基雄, "羅末麗初의 政治社會와 文人知識層" 혜안 1996

      2 金英美, "羅末麗初崔彦撝의 現實認識" 50 : 1995

      3 신호철, "후삼국사" 개신(충북대출판부) 2008

      4 신호철,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5 권영오, "후백제군의 포석정 습격과 경순왕 옹립" 한국고대사탐구학회 (13) : 175-224, 2013

      6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7 이우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8 전덕재, "한국사 4" 한길사 1994

      9 최병헌,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8

      10 정청주,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96

      1 全基雄, "羅末麗初의 政治社會와 文人知識層" 혜안 1996

      2 金英美, "羅末麗初崔彦撝의 現實認識" 50 : 1995

      3 신호철, "후삼국사" 개신(충북대출판부) 2008

      4 신호철,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5 권영오, "후백제군의 포석정 습격과 경순왕 옹립" 한국고대사탐구학회 (13) : 175-224, 2013

      6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7 이우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8 전덕재, "한국사 4" 한길사 1994

      9 최병헌,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8

      10 정청주,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96

      11 김철준,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12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13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3"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14 崔英成, "역주 최치원전집 2 고운문집" 아세아문화사 1999

      15 최영성, "역주 최치원전집 1 사산비명" 아세아문화사 1998

      16 한국역사연구회, "역주 나말여초 금석문 (하)" 혜안 1996

      17 민현구, "역사상의 분열과 재통일 (상)" 일조각 1992

      18 권영오, "신라하대 정치사 연구" 혜안 2011

      19 김두진, "신라하대 선종사상사연구" 일조각 2007

      20 최병헌,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7 : 1972

      21 李基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22 한국사학회,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연구" 주류성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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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황수영, "삼화사의 신라철불좌상의 배각명기" 8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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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金哲埈, "韓國古代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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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전기웅, "新羅의 멸망과 景文王家" 혜안 2010

      31 李佑成, "新羅四山碑銘" 아세아문화사 1995

      32 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33 金英美, "新羅佛敎思想史硏究" 민족사 1994

      34 노태돈, "三韓에 대한 인식의 변천" 38 : 1982

      35 이기동, "9세기 신라사 이해의 기본과제- 왜 신라는 농민반란의 일격으로 쓰러졌는가? -" 신라문화연구소 (26) : 7-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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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52 0.52 0.5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5 0.67 1.012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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