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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과정의 재구성 : '심행일기(沁行日記)'와 몇 가지 미간문헌에 기초하여 = Revisiting the Negotiation Process of the Kangwha Treaty of 1876 – Based on primary sources including Simhang-i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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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50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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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article, based on some primary sources including Shin-Hun’s Simhang-ilki (Daily record of Kangwha negotiation), reconstructs the negotiation process of the Kangwha Treaty of 1876. It has been generally regarded as an unequal treaty coerced by Japan. A close examination on the primary sources, however, indicates that the aim of Japan’s delegation was very limited from the beginning and reveals that it often resorted to conciliatory measures or deceptions under the table. The Okubo Toshimichi regime at that time, as a means of escaping from the domestic political predicament and of bringing Chǒsun problem to a conclusion, tried to “open” Chǒsun by the so-called gunboat diplomacy following the precedent of Commodore Matthew C. Perry. But the fundamental dilemma that the regime faced was that it actually had no power or will to attack Chǒsun. It was such a dilemma that made the Kangwha Treaty an imperfect unequal treaty, neither the mistake of the Japan envoy Kuroda Kiyotaka nor the effective response of the Chǒsun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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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article, based on some primary sources including Shin-Hun’s Simhang-ilki (Daily record of Kangwha negotiation), reconstructs the negotiation process of the Kangwha Treaty of 1876. It has been generally regarded as an unequal treaty coerced by J...

      This article, based on some primary sources including Shin-Hun’s Simhang-ilki (Daily record of Kangwha negotiation), reconstructs the negotiation process of the Kangwha Treaty of 1876. It has been generally regarded as an unequal treaty coerced by Japan. A close examination on the primary sources, however, indicates that the aim of Japan’s delegation was very limited from the beginning and reveals that it often resorted to conciliatory measures or deceptions under the table. The Okubo Toshimichi regime at that time, as a means of escaping from the domestic political predicament and of bringing Chǒsun problem to a conclusion, tried to “open” Chǒsun by the so-called gunboat diplomacy following the precedent of Commodore Matthew C. Perry. But the fundamental dilemma that the regime faced was that it actually had no power or will to attack Chǒsun. It was such a dilemma that made the Kangwha Treaty an imperfect unequal treaty, neither the mistake of the Japan envoy Kuroda Kiyotaka nor the effective response of the Chǒsun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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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글은 신헌(申櫶)의 '심행일기(沁行日記)'와 '을병일기(乙丙日記)', 그리고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미간문헌들에 기초해서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체결과정을 재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에 강요된 불평등조약 또는 조선 정부의 자주적 개국의지의 산물로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검토한 문헌들은 조약체결에 임하는 일본 측의 목표가 처음부터제한적이었으며, 공식 협상과정의 이면에서 여러 가지 회유와 기만책이 사용됐음을 폭로한다. 당시일본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정권은 메이지 유신 이래 수년 간 이어진 조선 문제의 결착(結 着)을 짓고, 또 국내의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의 선례를 모방해서 포함외교 방식으로 조선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하지만그들이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는 현실적으로 조선에 대해 전쟁을 벌일 능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조일수호조규가 결국 불완전한 불평등조약이 된 것은, 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의 실착이나 조선정부의 능동적 대응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러한 딜레마가 빚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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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신헌(申櫶)의 '심행일기(沁行日記)'와 '을병일기(乙丙日記)', 그리고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미간문헌들에 기초해서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체결과정을 재구성한...

      이 글은 신헌(申櫶)의 '심행일기(沁行日記)'와 '을병일기(乙丙日記)', 그리고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미간문헌들에 기초해서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체결과정을 재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에 강요된 불평등조약 또는 조선 정부의 자주적 개국의지의 산물로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검토한 문헌들은 조약체결에 임하는 일본 측의 목표가 처음부터제한적이었으며, 공식 협상과정의 이면에서 여러 가지 회유와 기만책이 사용됐음을 폭로한다. 당시일본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정권은 메이지 유신 이래 수년 간 이어진 조선 문제의 결착(結 着)을 짓고, 또 국내의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의 선례를 모방해서 포함외교 방식으로 조선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하지만그들이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는 현실적으로 조선에 대해 전쟁을 벌일 능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조일수호조규가 결국 불완전한 불평등조약이 된 것은, 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의 실착이나 조선정부의 능동적 대응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러한 딜레마가 빚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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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종학,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역사문제연구소 (114) : 25-56, 2016

      2 김종학, "을병일기" 국립중앙도서관 2014

      3 김흥수, "운요호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한일관계사학회 (33) : 237-274, 2009

      4 신헌, "심행일기: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 조약" 푸른역사 2010

      5 김경태, "병자개항과 불평등조약관계의 구조" (111) : 1-33, 1973

      6 손형부, "박규수의 개화사상 연구" 일조각 1993

      7 이완재, "박규수연구" 집문당 1999

      8 근대한국외교문서 편찬위원회, "근대한국외교문서" 동북아역사재단 2012

      9 다보하시 기요시,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상" 일조각 2013

      10 김종학, "근대 일본의 조선정책의 단면(斷面)-‘자주지방(自主之邦)의 의미와 그 해석" (8) : 30-55, 2016

      1 김종학,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역사문제연구소 (114) : 25-56, 2016

      2 김종학, "을병일기" 국립중앙도서관 2014

      3 김흥수, "운요호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한일관계사학회 (33) : 237-274, 2009

      4 신헌, "심행일기: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 조약" 푸른역사 2010

      5 김경태, "병자개항과 불평등조약관계의 구조" (111) : 1-33, 1973

      6 손형부, "박규수의 개화사상 연구" 일조각 1993

      7 이완재, "박규수연구" 집문당 1999

      8 근대한국외교문서 편찬위원회, "근대한국외교문서" 동북아역사재단 2012

      9 다보하시 기요시,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상" 일조각 2013

      10 김종학, "근대 일본의 조선정책의 단면(斷面)-‘자주지방(自主之邦)의 의미와 그 해석" (8) : 30-55, 2016

      11 제홍일, "근대 여명기 일본의 조선정책과 宮本小一" 효원사학회 37 : 149-217, 2010

      12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일조각 2017

      13 이병천, "개항과 불평등조약체제의 확립" 8 (8): 61-107, 1984

      14 박은식, "韓國痛史" 大同編譯局 1915

      15 月脚達彦, "近代朝鮮の條約における‘平等’と‘不平等’-日朝修好條規と朝米修好通商條約を中心に" (13) : 76-91, 2010

      16 野村靖, "渡韓日記"

      17 古宮博物院文獻館,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古宮博物院文獻館 1970

      18 강위, "沁行雜記"

      19 이태진, "朝鮮의 政治와 社會-崔承熙敎授 停年記念 論文集" 집문당 435-476, 2002

      20 奧義制, "朝鮮交際始末" 外務省 1877

      21 姜在彦, "朝鮮の開化思想" 岩波書店 1980

      22 이근관, "朝日修好條規(1876)의 再評價 ―아 國際秩序의 觀點으로부터" 서울국제법연구원 11 (11): 57-79, 2004

      23 日本外務省,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 外務省 1965

      24 日本外務省, "日本外交文書" 外務省 1963

      25 최남선, "故事通" 三重堂 1943

      26 多田好問, "岩倉公實記" 皇后宮職 1906

      27 藤村道生, "国際政治37 日本外交史の諸問題 Ⅲ" 有斐閣 1-22, 1968

      28 黑田淸隆, "使鮮日記"

      29 伊藤博文關係文書硏究會, "伊藤博文關係文書" 塙書房 1973

      30 檜山幸夫, "伊藤博文文書(祕書類纂朝鮮交涉)" ゆまに書房 2006

      31 春畝公追頌會, "伊藤博文傳" 原書房 1970

      32 毛利敏彦, "『岩波講座 日本通史 第16巻 近代I』月報 5" 岩波書店 1994

      33 鈴木淳, "‘雲揚’艦長井上良馨の明治八年九月二十九日付け江華島事件報告書" 111 (111): 1947-1957, 2002

      34 "FO(Foreign Office Records) 46(General Correspondence before 1906, Japan)/ 405(China and Taiwan Confidential Print)"

      35 이태진, "1876년 강화도조약의 명암" (36) : 124-13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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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1999-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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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98 0.98 1.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08 1.03 1.653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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