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사회적 열광에 비해 학술적 관심은 낮았던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혼혈인 담론 연구를 보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해당 시기의 신문기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
본 연구는 사회적 열광에 비해 학술적 관심은 낮았던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혼혈인 담론 연구를 보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해당 시기의 신문기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한국사회의 혼혈인을 구성하는 담론 지형과 혼혈인 재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를 확인하려 했다. 일상의 미디어를 대표하는 신문과 사회 행위자들의 담론을 분석하기 위해, 푸코의 배제와 홀의 접합이라는 이론적 개념을 기반으로 삼았다. 또한 혼혈인 관련 보도에서 대표성을 띠는 다섯 개 신문을 선정한 후, 비판적 담론분석과 국면분석을 활용하여 혼혈인 관련 기사의 보도 관행과 담론의 전개 경향을 분석하였다.
2000년부터 2005년 사이 한국 사회의 혼혈인에게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은 2003년 5월 28일에 벌어진 한 혼혈 방송인의 “고백”이었다. 이에 시기를 구분하고, 일차로 2003~2005년의 신문 기사 텍스트를 ‘어휘’와 ‘발화자’로 나눈 후 분석하고 담론전개 경향을 살펴보았다. 또한 “고백” 사건을 둘러싼 1년 3개월의 국면(conjuncture)에서 나타난 언론 및 시민단체, 혼혈인 개인, 국가인권위원회, 정부의 사회문화적 실천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본고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신문 및 사회 전반에서 색맹에 가까운 인종주의가 실현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신문이 강조하여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 따라 혼혈인에 대한 한 사회의 지식이 구성된다고 한다면, 유달리 나타나는 혼혈인 보도 경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문은 혼혈인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온정주의적이고 관용적인 보도를 반복했다. 담론 지배력을 가진 언론이나 정부보다도 혼혈인들과 시민단체 등 소수자와 일반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방편을 사용한다. 이는 마치 ‘다름’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사회의 모습처럼 나타난다.
둘째, 한국사회의 순혈주의와 수치심을 과도한 수준으로 자극하고, 이를 서둘러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셋째, 고정관념과 관련된 단어를 변경하고 새로운 단어를 활용함으로써, 혼혈인에게 가해진 과거의 차별을 지워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한다. 넷째, 일부 백인계 혼혈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성공의 가치를 부각시키고, 혼혈인의 일상을 극화하고자 한다.
반면 신문은 백인·흑인계 혼혈인이 겪어온 사회문화적 차별과 배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아시아 권역의 이주민과 그 자녀들을 새로운 차별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이에 비해 백인·흑인계 혼혈인들은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들은 이미 사회에서 성공하고 차별을 극복한 개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차별의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하지 않는 현상은 현재에도 익숙한 모습이다. 차별의 인식을 변경하기 위해 일부 신문과 시민 단체가 정부와 시민 사회의 직접적인 개선을 요구하였음에도, 변화는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수자가 직접 사회적 터부를 깨고 용감하게 발언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인권과 인종주의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는 터무니없이 낮았던 것이다. 또한 혼혈인 개인은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온순하고 씩씩한 모델 소수자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정제했다. 무엇보다 거시적이고 구조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언론은 개인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을 통해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수사를 활용했다. 정부 역시 혼혈인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보여주기식 인종감수성을 부추기면서 개인의 통치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혼혈인을 위시로 한 모든 인권 관련 문제는 귀찮을 만큼 경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단지 일방향적으로 반복되는 언론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지름길만을 선택하는 국가, 그에 동의하는 시민 사회의 모습이 반복된다면, 소수자의 사건을 문제화하고 담론을 개진하며 교차할 수 있는 헤게모니 쟁탈전이란 그저 이론적 환상에 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