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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미군정기 자치적 소방제도의 도입과 역할 = A Study On The Fire-Fighting Activities and Introduction of Self-Governing Fire-Fighting System During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Period(1945-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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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84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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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When korea was liberated in 1945, military rule by the U.S. military was implemented until 1948. The implementation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served as a transitional stepping stone to the new Republic of Korea from Japanese colonial era. Thus, the fire-fighting system established during this period has also become connection to the next period.
      Along with the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alization, fire outbreaks sharply increased in the large cities including Seoul and Busan. As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nsidered that the existing fire-fighting system was outdated and inefficient to deal with frequent fire outbreaks, it started a full-fledged reform of the existing fire-fighting system.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government organization, fire-fighting service was transferred to the department of civil engineering. Local fire-fighting committees were organized under province governors. Also fire-fighting offices as executive bodies were established nationwide. About 50 extra fire-fighting services were established nationwide although there were only 8 during the Japanese Colonialization Period. As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tended to graft American-style self-governing fire-fighting system into Korean system, fire-fighting organizations were established and fire-fighting services were enlarged eve to small districts.
      As most of the Japanese influential men who had been officials of fire-fighting services returned home after the 1945 Liberation, the leadership of fire-fighting services was vacant. Therefore, ex-police officials or common people who was related with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were appointed as new fire-fighting officers and executives. For those who did not have sense of duty conformed to reduction of fire-fighting organizations.
      Despite of those problems, introduction of fire-fighting committees, establishment of fire-fighting offices and enlargement of fire-fighting stations during the U.S. Military Government were developmental efforts of the civil engineering department that was in charge of fire-fighting service. Introduction of the self-governing and autonomous system became a basis for the present establishment of fire-fighting offices and self-governing fire-fighting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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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en korea was liberated in 1945, military rule by the U.S. military was implemented until 1948. The implementation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served as a transitional stepping stone to the new Republic of Korea from Japanese colonial era. Thus, ...

      When korea was liberated in 1945, military rule by the U.S. military was implemented until 1948. The implementation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served as a transitional stepping stone to the new Republic of Korea from Japanese colonial era. Thus, the fire-fighting system established during this period has also become connection to the next period.
      Along with the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alization, fire outbreaks sharply increased in the large cities including Seoul and Busan. As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nsidered that the existing fire-fighting system was outdated and inefficient to deal with frequent fire outbreaks, it started a full-fledged reform of the existing fire-fighting system.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government organization, fire-fighting service was transferred to the department of civil engineering. Local fire-fighting committees were organized under province governors. Also fire-fighting offices as executive bodies were established nationwide. About 50 extra fire-fighting services were established nationwide although there were only 8 during the Japanese Colonialization Period. As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tended to graft American-style self-governing fire-fighting system into Korean system, fire-fighting organizations were established and fire-fighting services were enlarged eve to small districts.
      As most of the Japanese influential men who had been officials of fire-fighting services returned home after the 1945 Liberation, the leadership of fire-fighting services was vacant. Therefore, ex-police officials or common people who was related with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were appointed as new fire-fighting officers and executives. For those who did not have sense of duty conformed to reduction of fire-fighting organizations.
      Despite of those problems, introduction of fire-fighting committees, establishment of fire-fighting offices and enlargement of fire-fighting stations during the U.S. Military Government were developmental efforts of the civil engineering department that was in charge of fire-fighting service. Introduction of the self-governing and autonomous system became a basis for the present establishment of fire-fighting offices and self-governing fire-fighting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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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948년까지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의 실시는 일제강점기에 신생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마련된 소방제도 또한 어떤 형태로든 다음 시기로 연결되거나 영향을 미치는 단초가 되었다.
      해방과 함께 서울・부산 등 대도시에는 화재가 급증하였다. 다발하는 화재를 대처하기 위하여 미군정기간 동안 소방활동 및 소방제도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시행된 소방제도가 비효율적이라고 여겼던 미군정은 소방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정부기구 개편에서 소방업무를 토목부에 이관하고 중앙과 지방에 소방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소방청도 만들어지면서 전국에 걸쳐 50여개의 소방서가 증설되었다. 이것은 미국식의 자치소방을 한국에 접목하려는 미군정의 의도였다. 신설된 소방서 간부들은 일제강점기 경찰 간부나 미군정과 친교가 있는 우익인물들이 취임하였다. 소방에 대한 사명감이 부족한 이들은 정부의 조직개편에서 소방기구 축소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기에 추진된 소방위원회 도입 소방청의 설립, 소방서의 증가 등은 매우 긍정적인 시도였다. 이러한 자치적인 소방제도의 도입은 오늘날 소방청의 설립과 자치소방 정착의 토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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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948년까지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의 실시는 일제강점기에 신생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마련된 소...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948년까지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의 실시는 일제강점기에 신생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마련된 소방제도 또한 어떤 형태로든 다음 시기로 연결되거나 영향을 미치는 단초가 되었다.
      해방과 함께 서울・부산 등 대도시에는 화재가 급증하였다. 다발하는 화재를 대처하기 위하여 미군정기간 동안 소방활동 및 소방제도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시행된 소방제도가 비효율적이라고 여겼던 미군정은 소방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정부기구 개편에서 소방업무를 토목부에 이관하고 중앙과 지방에 소방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소방청도 만들어지면서 전국에 걸쳐 50여개의 소방서가 증설되었다. 이것은 미국식의 자치소방을 한국에 접목하려는 미군정의 의도였다. 신설된 소방서 간부들은 일제강점기 경찰 간부나 미군정과 친교가 있는 우익인물들이 취임하였다. 소방에 대한 사명감이 부족한 이들은 정부의 조직개편에서 소방기구 축소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기에 추진된 소방위원회 도입 소방청의 설립, 소방서의 증가 등은 매우 긍정적인 시도였다. 이러한 자치적인 소방제도의 도입은 오늘날 소방청의 설립과 자치소방 정착의 토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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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議事局資料編纂課, "歷代國會議員總覽: 制憲國會~第九代國會"

      2 김상욱, "한말·일제강점기(1899~1929) 목포소방조의 결성과 활동" 호남사학회 (34) : 121-148, 2008

      3 김수자, "주한미군사와 미군정" 백산서당 2002

      4 서울신문사, "주한미군 30년" 1979

      5 "조선일보"

      6 "제주신보"

      7 "자유신문"

      8 김상욱, "일제강점기 호남지역 소방조 연구" 목포대학교 대학원 2020

      9 김상욱, "일제강점기 소방기구의 변천과 역할" 한국행정사학회 (43) : 185-212, 2018

      10 "영남일보"

      1 議事局資料編纂課, "歷代國會議員總覽: 制憲國會~第九代國會"

      2 김상욱, "한말·일제강점기(1899~1929) 목포소방조의 결성과 활동" 호남사학회 (34) : 121-148, 2008

      3 김수자, "주한미군사와 미군정" 백산서당 2002

      4 서울신문사, "주한미군 30년" 1979

      5 "조선일보"

      6 "제주신보"

      7 "자유신문"

      8 김상욱, "일제강점기 호남지역 소방조 연구" 목포대학교 대학원 2020

      9 김상욱, "일제강점기 소방기구의 변천과 역할" 한국행정사학회 (43) : 185-212, 2018

      10 "영남일보"

      11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災害史" 2013

      12 조계표, "미군정시대의 사회상황과 행정조직의 변화" 한국행정사학회 (39) : 131-154, 2016

      13 김석준, "미군정시대의 국가와 행정"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14 한국법제연구회, "미군법령총람"

      15 안 진, "미 軍政警察의 형성 과정과 그 성격에 관한 고찰" 서울사회사학회 1988

      16 "동아일보"

      17 "남조선민보"

      18 "광주민보"

      19 "공업신문"

      20 鄭東根, "韓國行政體制의 近代化 要素導入과 그 影響에 관한 硏究: 美軍政期를 中心으로" 5 : 1997

      21 內務部, "韓國消防行政史" 내무부 치안국 1979

      22 "釜山新聞"

      23 國史編纂委員會, "資料 大韓民國史 제3권" 1998

      24 國會公論社, "行政幹部全貌"

      25 김수자, "美軍政期(1945-1948) 통치기구와 官僚任用政策 : 중앙행정기구 개편과 행정관료의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梨花女子大學校 大學院 1994

      26 "漢城日報"

      27 "漢城日報"

      28 "水産經濟新聞"

      29 "水産經濟新聞"

      30 "民主衆報"

      31 "東光新聞"

      32 "朝鮮消防"

      33 內尾直二, "朝鮮人事興信錄" 朝鮮新聞社 1935

      34 康晋和, "建國十年誌" 建國十年誌刊行會 1956

      35 康晉和, "大韓民國人事錄" 內外弘報社 1949

      36 大韓年鑑社, "大韓年鑑"

      37 "大邱時報"

      38 "大東新聞"

      39 行政自治部, "外國의 消防行政體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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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4-10-01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Journal of Association for Korean Public Administration History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2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한국행정사학회 -> 한국행정사학지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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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22 0.22 0.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6 0.43 0.55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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