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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衛滿朝鮮 시기 濊族 사회의 동향과 滄海郡路 -‘滄海郡 在沃沮說’에 대한 최근 비판의 반론을 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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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논문은 기원전 128년에 전개된 薉君 南閭 집단의 “畔右渠” 움직임과 漢의 滄海郡 설치 기도를 주목하고, 이를 실마리 삼아 기원전 2세기 무렵 위만조선 주변 濊族 사회의 동향을 검토한 것이다.
      衛滿朝鮮 성립 이전 고조선 동쪽 嶺西와 嶺東 지역에 걸쳐 넓게 퍼져 있던 예족 사회는 臨屯과 그 동북쪽의 沃沮(夫租)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초에 위만조선이 성립하자 임둔과 옥저 사회는 곧 위만조선에 복속되고 만다. 이후 2세기 후반 右渠 시대에 이르러 위만조선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는데, 이것은 결국 예군 남려를 중심으로 한 예족 사회의 저항을 불러왔다. 예군 남려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한 예족 사회는 임둔과 옥저, 그리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句麗 집단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 이들은 위만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요동군과 접촉하였다. 이에 漢은 이들을 대상으로 창해군 설치를 기획하였다.
      예군 남려 집단을 대상으로 설치된 창해군의 중심지는 함경남도 동해안 지역, 즉 옥저(부조)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이해된다. 기원전 1세기 전반기의 자료인 「夫租薉君」 銀印의 존재는 당시 옥저 사회 ‘薉君’의 존재를 보여주는 실물 자료라 할 수 있다. 예군 남려의 정치적 거점이었던 옥저 지역은 위만조선의 영향력에서 일정정도 벗어나 자체적인 세력 규합을 꾀함에 있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옥저 사회가 위만조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가 모색되어야만 했는데, 창해군의 설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교통로의 개척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곧 창해군 설치는 압록강 유역으로부터 함흥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개척해 나가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통로 상에 겹겹이 펼쳐져 있는 산악 지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漢의 창해군은 3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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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기원전 128년에 전개된 薉君 南閭 집단의 “畔右渠” 움직임과 漢의 滄海郡 설치 기도를 주목하고, 이를 실마리 삼아 기원전 2세기 무렵 위만조선 주변 濊族 사회의 동향을 검토한 ...

      본 논문은 기원전 128년에 전개된 薉君 南閭 집단의 “畔右渠” 움직임과 漢의 滄海郡 설치 기도를 주목하고, 이를 실마리 삼아 기원전 2세기 무렵 위만조선 주변 濊族 사회의 동향을 검토한 것이다.
      衛滿朝鮮 성립 이전 고조선 동쪽 嶺西와 嶺東 지역에 걸쳐 넓게 퍼져 있던 예족 사회는 臨屯과 그 동북쪽의 沃沮(夫租)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초에 위만조선이 성립하자 임둔과 옥저 사회는 곧 위만조선에 복속되고 만다. 이후 2세기 후반 右渠 시대에 이르러 위만조선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는데, 이것은 결국 예군 남려를 중심으로 한 예족 사회의 저항을 불러왔다. 예군 남려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한 예족 사회는 임둔과 옥저, 그리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句麗 집단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 이들은 위만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요동군과 접촉하였다. 이에 漢은 이들을 대상으로 창해군 설치를 기획하였다.
      예군 남려 집단을 대상으로 설치된 창해군의 중심지는 함경남도 동해안 지역, 즉 옥저(부조)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이해된다. 기원전 1세기 전반기의 자료인 「夫租薉君」 銀印의 존재는 당시 옥저 사회 ‘薉君’의 존재를 보여주는 실물 자료라 할 수 있다. 예군 남려의 정치적 거점이었던 옥저 지역은 위만조선의 영향력에서 일정정도 벗어나 자체적인 세력 규합을 꾀함에 있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옥저 사회가 위만조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가 모색되어야만 했는데, 창해군의 설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교통로의 개척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곧 창해군 설치는 압록강 유역으로부터 함흥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개척해 나가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통로 상에 겹겹이 펼쳐져 있는 산악 지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漢의 창해군은 3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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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thesis has analyzed the process of collective resistance of the Ye(濊族) society against Wiman Joseon(衛滿朝鮮) and establishment of Changhae Commandery(滄海郡) of Han(漢) Dynasty in 128 BC, and through this endeavor, it has reviewed the trend of the Ye society around Wiman Joseon approximately 2nd century BC.
      Prior to the founding of Wiman Joseon, the Ye society that was broadly spread out in Youngseo(嶺西) and Youngdong(嶺東) region of the eastern Gojoseon was developed around Imdun(臨屯) and its northeastern part in the Okjeo(沃沮) region. However, with Wiman Joseon established in early 2nd century BC, the Imdun and Okjeo societies was subjected to Wiman Joseon. Thereafter, in the era of King Ugeo(右渠) at a later time of the 2nd century, Wiman Joseon strengthened its control over the surrounding Ye society even more and this ultimately brought in the resistance of Yegunnamnye(薉君南閭)-led Ye society. The Ye society that was united with Yegunnamnye leading the way was formed with Imdun and Okjeo as well as the Guryeo(句麗) group in the mid-basic of Amrok River(鴨綠江), and they broke away from the ruling of Wiman Joseon to contact with Liaodong Commandery(遼東郡). Therefore, Han Dynasty had a plan to establish Changhae Commandery with these groups.
      It is understood that the central site of Changhae Commandery that was established with the subject of Yegunnamnye group was the east coastal region of Hangyeongnam-do(咸鏡南道), namely, the Okjeo region. The presence of the silver seal in 「Bujoyegun(夫租薉君)」 that is data in the first half of the 1st century BC is the practical data to display the presence of ‘Yegun(薉君)’ in the Okjeo society at the time. The Okjeo area was the political base of Yegunnamnye was well-equipped to join the independent forces after breaking away from the influence of Wiman Joseon. For the Okjeo society to stand independently by staying away from Wiman Joseon’s control, it had to search for a new route to communicate with outside.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Changhae Commandery was the process of pioneering the new transport route for such purport. Accordingly, the establishment of Changhae Commandery was processed by pioneering the transport route to lead from the Aprok-gang basin to Hamheung. However, it could not overcome many layers of mountainous terrains over the transport route and the establishment of Changhae Commandery for the Han Dynasty came to a screeching stop after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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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thesis has analyzed the process of collective resistance of the Ye(濊族) society against Wiman Joseon(衛滿朝鮮) and establishment of Changhae Commandery(滄海郡) of Han(漢) Dynasty in 128 BC, and through this endeavor, it has reviewed th...

      This thesis has analyzed the process of collective resistance of the Ye(濊族) society against Wiman Joseon(衛滿朝鮮) and establishment of Changhae Commandery(滄海郡) of Han(漢) Dynasty in 128 BC, and through this endeavor, it has reviewed the trend of the Ye society around Wiman Joseon approximately 2nd century BC.
      Prior to the founding of Wiman Joseon, the Ye society that was broadly spread out in Youngseo(嶺西) and Youngdong(嶺東) region of the eastern Gojoseon was developed around Imdun(臨屯) and its northeastern part in the Okjeo(沃沮) region. However, with Wiman Joseon established in early 2nd century BC, the Imdun and Okjeo societies was subjected to Wiman Joseon. Thereafter, in the era of King Ugeo(右渠) at a later time of the 2nd century, Wiman Joseon strengthened its control over the surrounding Ye society even more and this ultimately brought in the resistance of Yegunnamnye(薉君南閭)-led Ye society. The Ye society that was united with Yegunnamnye leading the way was formed with Imdun and Okjeo as well as the Guryeo(句麗) group in the mid-basic of Amrok River(鴨綠江), and they broke away from the ruling of Wiman Joseon to contact with Liaodong Commandery(遼東郡). Therefore, Han Dynasty had a plan to establish Changhae Commandery with these groups.
      It is understood that the central site of Changhae Commandery that was established with the subject of Yegunnamnye group was the east coastal region of Hangyeongnam-do(咸鏡南道), namely, the Okjeo region. The presence of the silver seal in 「Bujoyegun(夫租薉君)」 that is data in the first half of the 1st century BC is the practical data to display the presence of ‘Yegun(薉君)’ in the Okjeo society at the time. The Okjeo area was the political base of Yegunnamnye was well-equipped to join the independent forces after breaking away from the influence of Wiman Joseon. For the Okjeo society to stand independently by staying away from Wiman Joseon’s control, it had to search for a new route to communicate with outside.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Changhae Commandery was the process of pioneering the new transport route for such purport. Accordingly, the establishment of Changhae Commandery was processed by pioneering the transport route to lead from the Aprok-gang basin to Hamheung. However, it could not overcome many layers of mountainous terrains over the transport route and the establishment of Changhae Commandery for the Han Dynasty came to a screeching stop after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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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衛滿朝鮮 성립 전후 濊族 사회의 동향
      • Ⅲ. 薉君 南閭의 지역 기반과 滄海郡路 개척
      • Ⅳ. 맺음말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衛滿朝鮮 성립 전후 濊族 사회의 동향
      • Ⅲ. 薉君 南閭의 지역 기반과 滄海郡路 개척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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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공석구, "현도군위치 옥저지역설을 다시 검토한다- 『삼국지』 사료비판 -" 한국고대사학회 (102) : 207-236, 2021

      2 공석구, "현도군설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고구려발해학회 70 : 9-32, 2021

      3 노태돈,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와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4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5 손영종, "조선단대사(고구려사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6

      6 박준형, "위만조선의 영역과 인구" 백산학회 (99) : 109-143, 2014

      7 김남중, "위만조선의 성립과 발전 과정 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2014

      8 조원진, "위만조선의 대외관계에 대한 검토 -朝·漢 전쟁 이전을 중심으로-" 백산학회 (109) : 59-87, 2017

      9 윤용구,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10 윤선태, "삼국지 동이전의 세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3

      1 공석구, "현도군위치 옥저지역설을 다시 검토한다- 『삼국지』 사료비판 -" 한국고대사학회 (102) : 207-236, 2021

      2 공석구, "현도군설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고구려발해학회 70 : 9-32, 2021

      3 노태돈,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와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4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5 손영종, "조선단대사(고구려사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6

      6 박준형, "위만조선의 영역과 인구" 백산학회 (99) : 109-143, 2014

      7 김남중, "위만조선의 성립과 발전 과정 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2014

      8 조원진, "위만조선의 대외관계에 대한 검토 -朝·漢 전쟁 이전을 중심으로-" 백산학회 (109) : 59-87, 2017

      9 윤용구,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10 윤선태, "삼국지 동이전의 세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3

      11 윤선태,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12 윤용구,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13 박준형, "고조선사의 전개" 서경문화사 2014

      14 김광수, "고조선 관명의 계통적 이해" 56 : 1994

      15 장병진, "고구려의 성립과 전기 지배체제 연구" 연세대학교 2019

      16 임기환,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 동북아역사재단 2020

      17 여호규,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2014

      18 김미경, "고구려 전기의 대외관계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7

      19 이승호, "고구려 내륙 수운 교통의 형성과 변동" 2019

      20 이종록, "高句麗와 玄菟郡의 관계와 幘溝漊 설치 배경 검토" 한국고대학회 (55) : 403-438, 2018

      21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 1 : 1994

      22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5

      23 최슬기, "蒼海郡 위치비정의 쟁점과 전제" 고조선단군학회 44 (44): 169-204, 2021

      24 김미경, "第1玄菟郡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24 : 2002

      25 和田淸, "玄菟郡考" 1 : 1951

      26 이준성, "濊君 南閭의 동향과 滄海郡․玄菟郡 설치" 백산학회 (116) : 91-116, 2020

      27 이승호, "漢의 沃沮 지배와 토착 지배층의 동향" 동국역사문화연구소 (57) : 246-290, 2014

      28 白鳥庫吉, "漢の朝鮮四郡疆域考" 岩波書店 3 : 1970

      29 池內宏, "滿鮮史硏究(上世第一冊)" 吉川弘文館 1951

      30 권오중, "滄海郡과 遼東東部都尉" 168 : 2000

      31 日野開三郞, "東北民族史, 上" 三一書房 1988

      32 윤용구, "平壤出土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 硏究" 3 : 2009

      33 김기흥, "夫租薉君에 대한 고찰" 12 : 1985

      34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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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2-18 학회명변경 한글명 : 단군학회 -> 고조선단군학회
      영문명 : Dangun Studies Association -> Gojoseon & Dangun Studies Association
      KCI등재
      2021-02-18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단군학연구 -> 고조선단군학
      외국어명 : Journal of Dangun Studies -> The Journal of Gojoseon & Dangun Studies
      KCI등재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4-03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고조선단군학 -> 단군학연구
      외국어명 : The Journal of Gojoseon & Dangun Studies -> Journal of Dangun Studies
      KCI등재
      2017-06-27 학회명변경 한글명 : 고조선단군학회 -> 단군학회
      영문명 : Gojoseon & Dangun Studies Association -> Dangun Studies Association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기타) KCI등재후보
      2011-04-11 학회명변경 한글명 : 단군학회 -> 고조선단군학회
      영문명 : 미등록 -> Gojoseon & Dangun Studies Association
      KCI등재
      2011-04-11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단군학연구 -> 고조선단군학
      외국어명 : Journal of Dangun Studies -> The Journal of Gojoseon & Dangun Studies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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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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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29 0.29 0.2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1 0.33 0.741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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