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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조선시대 官窯로의 백자원료 조달방식 = Procurable System of White Porcelain Materials to the Royal Kiln in Jose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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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049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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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글은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자료들을 활용하여 관요로의 백자원료 조달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관요에서는 처음에 廣州白土를 활용하였으나 17세기 전반 이후부터는 백토의 품질저하로 전국 각지의 좋은 흙을 구해 사용하였다. 특히 肅宗 이후부터는 우수한 품질과 다량의 土脈을 보유했던 楊口백토가 선호되면서 관요백자의 제작에서 중요한 胎土로 자리잡았다.
      둘째, 백토는 대부분 산 정상에서 굴취되어 해당 군·읍의 백성들에게 많은 민폐를 끼쳤다. 백토의 分定量은 지역에 따라 달랐으며 양구는 해마다 500석을 바쳤다. 흙은 암석상태로 운반했는데 국가에서 긴급히 器皿을 만들 경우, 소량의 흙을 水飛하여 운반하기도 했다. 백토굴취는 해당 지역 백성이 담당했으나 민폐를 줄이기 위해 當領水軍이나 掘取軍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셋째, 水土·水乙土는 사료분석 결과 백토와 다른 것으로 보이며 유약토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였다.
      넷째, 백자원료는 대부분 내륙수운이나 해로를 이용하였고 백토 굴취지역 인근의 군·읍들은 운송의 의무로 인해 인적, 물적 폐해가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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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자료들을 활용하여 관요로의 백자원료 조달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관요에서는 처음에 廣州...

      이 글은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자료들을 활용하여 관요로의 백자원료 조달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관요에서는 처음에 廣州白土를 활용하였으나 17세기 전반 이후부터는 백토의 품질저하로 전국 각지의 좋은 흙을 구해 사용하였다. 특히 肅宗 이후부터는 우수한 품질과 다량의 土脈을 보유했던 楊口백토가 선호되면서 관요백자의 제작에서 중요한 胎土로 자리잡았다.
      둘째, 백토는 대부분 산 정상에서 굴취되어 해당 군·읍의 백성들에게 많은 민폐를 끼쳤다. 백토의 分定量은 지역에 따라 달랐으며 양구는 해마다 500석을 바쳤다. 흙은 암석상태로 운반했는데 국가에서 긴급히 器皿을 만들 경우, 소량의 흙을 水飛하여 운반하기도 했다. 백토굴취는 해당 지역 백성이 담당했으나 민폐를 줄이기 위해 當領水軍이나 掘取軍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셋째, 水土·水乙土는 사료분석 결과 백토와 다른 것으로 보이며 유약토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였다.
      넷째, 백자원료는 대부분 내륙수운이나 해로를 이용하였고 백토 굴취지역 인근의 군·읍들은 운송의 의무로 인해 인적, 물적 폐해가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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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aim of this paper is to research about procurable system of the white porcelain materials to the Royal Kiln in Joseon Period by analyzing on documentary records. The concluding remarks of that analyzing are these.
      Firstly, the Royal Kiln used the White clay of the Gwang-ju Province at first. But after the first half of 17th Century, the Royal Kiln used other good clays of various Provinces because of quality deterioration of the White clay of the Gwang-ju Province. Especially, after the reign of King Sukjong(肅宗), the Royal Kiln preferred the White clay of the Yang-gu Province. Because the Yang-gu Province had much white clay lodes and the quality from that lodes was superiority than others. As a result, the White clay of the Yang-gu Province settled down as important basis clay in the Royal Kiln.
      Secondly, the people of regions corresponding with the extraction of white clays had many public nuisances because white clays were extracted in the peak of mountains mostly. The quota of white clays are various, and the quota of Yang-gu Province was 500 straw bag(石). In most cases, the extraction of white clays were charged to the people of corresponding region, but in some cases to the naval forces or extraction forces in order to decrease public nuisance.
      Thirdly, Suto(水土) and Sueulto(水乙土) are different with white clay. And we estimate that those are the material of glaze is more possible.
      Fourthly, most white porcelain materials were transferred by water transport or sea transport. Neighboring counties or towns of extraction of white clay had much nuisances by the duty of transpor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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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aim of this paper is to research about procurable system of the white porcelain materials to the Royal Kiln in Joseon Period by analyzing on documentary records. The concluding remarks of that analyzing are these. Firstly, the Royal Kiln used t...

      The aim of this paper is to research about procurable system of the white porcelain materials to the Royal Kiln in Joseon Period by analyzing on documentary records. The concluding remarks of that analyzing are these.
      Firstly, the Royal Kiln used the White clay of the Gwang-ju Province at first. But after the first half of 17th Century, the Royal Kiln used other good clays of various Provinces because of quality deterioration of the White clay of the Gwang-ju Province. Especially, after the reign of King Sukjong(肅宗), the Royal Kiln preferred the White clay of the Yang-gu Province. Because the Yang-gu Province had much white clay lodes and the quality from that lodes was superiority than others. As a result, the White clay of the Yang-gu Province settled down as important basis clay in the Royal Kiln.
      Secondly, the people of regions corresponding with the extraction of white clays had many public nuisances because white clays were extracted in the peak of mountains mostly. The quota of white clays are various, and the quota of Yang-gu Province was 500 straw bag(石). In most cases, the extraction of white clays were charged to the people of corresponding region, but in some cases to the naval forces or extraction forces in order to decrease public nuisance.
      Thirdly, Suto(水土) and Sueulto(水乙土) are different with white clay. And we estimate that those are the material of glaze is more possible.
      Fourthly, most white porcelain materials were transferred by water transport or sea transport. Neighboring counties or towns of extraction of white clay had much nuisances by the duty of transpor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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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백토의 조달지
      • Ⅲ. 백토의 굴취와 인력
      • Ⅳ. 백토와 水土ㆍ水乙土와의 관계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백토의 조달지
      • Ⅲ. 백토의 굴취와 인력
      • Ⅳ. 백토와 水土ㆍ水乙土와의 관계
      • Ⅴ. 백토(원료)의 운반
      • Ⅵ.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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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六典條例"

      2 張南原, "흙으로 빚은 우리역사" 용인대학교 박물관 2004

      3 강경숙,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 시공사·시공아트 2005

      4 김정애, "조선후기 지방 백자 가마와 공방의 성격" 목포대학교 대학원 2007

      5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6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의 마지막 관요, 廣州 分院里 白磁窯址"

      7 박형순, "조선시대 지방의 백자가마에 대한 연구 : 충청·전라·경상도를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대학원 2004

      8 김정선, "조선시대 자기가마 구조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3

      9 全德在, "조선시대 영남지역 포구와 나루의 변천-낙동강유역의 포구와 나루를 중심으로-"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8 : 2008

      10 고준휘, "조선시대 경상도지역 자기가마 연구 : 구조변화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2012

      1 "六典條例"

      2 張南原, "흙으로 빚은 우리역사" 용인대학교 박물관 2004

      3 강경숙,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 시공사·시공아트 2005

      4 김정애, "조선후기 지방 백자 가마와 공방의 성격" 목포대학교 대학원 2007

      5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6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의 마지막 관요, 廣州 分院里 白磁窯址"

      7 박형순, "조선시대 지방의 백자가마에 대한 연구 : 충청·전라·경상도를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대학원 2004

      8 김정선, "조선시대 자기가마 구조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3

      9 全德在, "조선시대 영남지역 포구와 나루의 변천-낙동강유역의 포구와 나루를 중심으로-"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8 : 2008

      10 고준휘, "조선시대 경상도지역 자기가마 연구 : 구조변화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2012

      11 강경인, "조선시대 17~19世紀 官窯白磁의 原料特性에 대한 硏究" (재)세계도자기엑스포 조선관요박물관 2006

      12 강경인, "과학적 분석에 의한 백자 공방유구의 성격" 재단법인세계도자기엑스포 조선관요박물관 2005

      13 이종민, "麗末~鮮初 硬質白磁로의 이행과정 연구" 호서사학회 (50) : 355-394, 2008

      14 강경숙, "韓國陶磁史" 예경 2012

      15 中央文化財硏究院‧, "靑陽 大朴地區 農村用水開發事業敷地內 靑陽 大朴理 白磁窯址"

      16 "萬機要覽"

      17 "肅宗實錄"

      18 "竹窓閑話"

      19 "河齋日記"

      20 조재경, "朝鮮時代 가마터 作業場의 構造와 特徵" 중앙문화재연구원 (5) : 51-83, 2009

      21 최경화, "朝鮮後期 分院里 時期 官窯白磁 硏究 : 1752-1895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4

      22 "日省錄"

      23 "新增東國輿地勝覽"

      24 "承政院日記"

      25 "彛尊錄"

      26 "夢窩集"

      27 "中宗實錄"

      28 "世祖實錄"

      29 전승창,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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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12-06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호서사학 -> 역사와 담론
      외국어명 : HO-SUH SAHAK -> HISTORY AND DISCOURSE(Journal of Historycal Review)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9-29 학술지등록 한글명 : 호서사학
      외국어명 : HO-SUH SAHAK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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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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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6 0.56 0.4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6 0.46 0.953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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