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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세기 프랑스 리무쟁 지역 귀족사회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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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5061988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 2019. 2

      • 발행연도

        2019

      • 작성언어

        한국어

      • 주제어
      • 발행국(도시)

        서울

      • 기타서명

        The reorganization of the aristocracy in the 10th~12th centuries : Limousin of France

      • 형태사항

        iii, 309 p. : 삽화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유희수
        부록: 1. 주요 가문들의 가계도, 2. 위제르쉬 수도원 증서대장
        참고문헌: p. 233-256

      • UCI식별코드

        I804:11009-000000083542

      • DOI식별코드
      • 소장기관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 고려대학교 세종학술정보원 소장기관정보
        •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우편복사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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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루도비쿠스 1세 때부터 시작된 카롤루스 왕가의 갈등으로 인해 아키텐의 분리주의적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아키텐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내정에 간섭하려던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

      루도비쿠스 1세 때부터 시작된 카롤루스 왕가의 갈등으로 인해 아키텐의 분리주의적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아키텐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내정에 간섭하려던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결과 9세기 후반의 아키텐은 ‘왕국’에서 ‘공국’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왕권을 대리하던 아키텐의 대귀족들은 오랜 내전으로 왕가의 정통성과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다수의 백령들을 병합했으며, 관직 및 토지 분배를 통해 토착 귀족을 길들이고 이들을 부백으로 삼아 각 지방을 다스렸다. 서프랑크 왕으로부터 ‘아키텐 공’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완벽한 왕권을 사용했던 경건공 기욤은 리모주 백령을 장악하고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가신이었던 일드베르를 첫번째 리모주 부백으로 임명했으며, 여타의 리무쟁 부백들도 아키텐 공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력, 그리고 결혼을 통해 확보한 인적 관계망 및 토지를 활용하면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리무쟁에서는 1000년을 전후하여 구체제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폭력의 증가 현상이 나타났으며 주교들은 무기력한 왕권을 대신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세속 귀족들의 부당한 간섭과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의 평화’ 운동을 개시했는데, 이는 공권력이 해체되고 성주와 기사들이 득세하는 성주령의 시대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리무쟁의 봉건적 주종 관계는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군소 귀족들은 리모주 부백에게 종속되었던 반면, 유력 봉신들은 부백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그리고 11~12세기 초반의 리모주 부백들 역시 주군이었던 아키텐 공과 느슨하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아키텐 공을 겸하게 된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리모주 부백 가문의 계승 문제에 차례로 간섭하면서 리무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한편 헨리 2세와 그의 아들 리처드가 노골적으로 추진했던 중앙집권화 정책을 위협으로 받아들인 리무쟁 및 인근의 주요 귀족들은 12세기 후반 내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의 저항은 관습을 통해 존중되어 오던 기존 관계가 일방적으로 파기된 것을 항의하는 정치적 제스쳐였으며, 군주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제후와 지역 귀족들 간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10~12세기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은 리무쟁의 귀족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가족 구조를 변화시켰다.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두 이름 체계에서 식별 기능을 담당했던 첫번째 구성 요소는 ‘개인 이름’이 되었으며 가족의 수장은 집안 고유의 특정한 이름을 장남에게 부여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의 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차남의 개인 이름 역시 어느 정도 제한된 이름 창고를 활용했던 반면 딸을 위한 가문 고유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11세기부터 여성을 배제한 남성 우위의 가족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姓)으로 발전한 이름의 두번째 요소는 해당 가문이 보유한 성채나 영지의 이름을 활용하거나 시조의 이름 또는 별명을 사용함으로써 가문의 표지가 되었다. 이처럼 개인 이름과 성 모두 리무쟁 귀족들의 친족 구조가 11세기부터 장남을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름의 전달 관행에서 드러난 장남 우위의 가족 체계는 장자상속제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11세기 중반까지는 엄격한 부계 친족 구조를 도입하지 않고 양계제적 상속 원칙을 활용했는데, 이는 가산의 공동 상속, 여성의 토지 상속, 부백 칭호의 공동 보유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2세기에는 장남이 모든 가산을 장악했으며 차남 이하의 아들과 딸은 원칙적으로 배제되었다. 한편 결혼은 권력과 재산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갈등을 종식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은 다양한 전략을 활용하여 장남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처럼 장자 상속제와 결혼 전략을 통해 수평적이었던 가족 구조가 수직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구성원들은 가문 의식을 체화했다. 리무쟁의 주요 가문들은 특정 수도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상들의 영혼 구제를 부탁했고, 그 대가로 증여를 받은 수도사들은 망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정기적인 기도를 통해 추모를 이어갔다. 특히 가문의 유구한 역사 그 자체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기 원했던 유력한 귀족들은 기록에 의존하여 더 오래된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다. 따라서 구전과 기록을 모두 이용하여 가계도를 재구성한 족보는 가문 의식의 강화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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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머리말 1
      • 제1부 카롤루스 왕조적 질서의 붕괴와 리무쟁 부백 가문들의 형성 14
      • 제1장 카롤루스 가문의 아키텐 지배 및 상실 17
      • 1. 아키텐 왕국의 수립 17
      • 2.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아키텐 정책 20
      • 머리말 1
      • 제1부 카롤루스 왕조적 질서의 붕괴와 리무쟁 부백 가문들의 형성 14
      • 제1장 카롤루스 가문의 아키텐 지배 및 상실 17
      • 1. 아키텐 왕국의 수립 17
      • 2.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아키텐 정책 20
      • 제2장 권력의 토착화: 제후령과 부백령의 탄생 26
      • 1. 기욤 가문의 아키텐 제후령 26
      • 1) 아키텐의 정착과 확장(8세기 중반~9세기 후반) 26
      • 2) 전성기: 경건공 기욤의 아키텐 공국(9세기 말~10세기 초) 31
      • 3) 몰락: 기욤 2세와 악프레드(10세기 초) 35
      • 2. 리모주 부백령의 탄생 37
      • 1) 리모주 백령의 소멸 37
      • 2) 최초의 리모주 부백들 43
      • 3) 푸아티에 백 가문의 영향력 확대 50
      • 제3장 리무쟁의 부백 가문들의 기원과 인적 관계망 55
      • 1. 리모주 부백 가문 56
      • 1) 제로의 아내 로틸드의 기원 56
      • 2) 제로의 자녀들 57
      • 3) 세귀르 부백 가문의 흡수 59
      • 2. 아르샹보 가문의 후손들 61
      • 1) 콩보른∙튀렌∙방타두르 부백 가문 61
      • 2) 튀렌 부백령의 기원 65
      • 3. 오뷔송 부백 가문 68
      • 제2부 리무쟁 귀족들의 봉건적 관계 73
      • 제1장 전통적 질서의 해체 73
      • 1. 봉건 변화에 대한 논의들 73
      • 2. 신의 평화 운동 81
      • 1) 샤루 공의회(989) 82
      • 2) 리모주 공의회(994)와 세속 귀족들의 분쟁 84
      • 3) 푸아티에 공의회(1000년경) 86
      • 4) 리모주 공의회(1031) 89
      • 3. 리무쟁 귀족들의 폭력 91
      • 1) 폭력의 사례 92
      • 2) 교회의 개입 95
      • 제2장 리모주 부백의 봉건 관계망 99
      • 1. 봉토 수여를 통한 영향력 확대 99
      • 2. 리모주 부백의 봉신들 102
      • 1) 주요 가문들 102
      • 2) 부백과 봉신들의 관계 108
      • 3. 성(城): 권력의 기반 112
      • 1) 성의 기능 112
      • 2) 성의 분류 117
      • 제3장 군주권의 회복과 리무쟁 귀족들의 저항 123
      • 1. 리모주 부백과 아키텐 공의 전통적 관계(10~11세기) 124
      • 2. 리모주 부백 가문의 위기와 아키텐 공의 개입(12세기) 128
      • 1) 아키텐 공의 권력 강화 128
      • 2) 루이 7세와 아데마르 3세의 계승 문제 130
      • 3) 헨리 2세와 아데마르 5세의 후견권 분쟁 135
      • 3. 리무쟁 귀족들의 반란 140
      • 1) 반란의 사례들 142
      • 2) 갈등의 주요 원인들 146
      • 3) 리모주 부백 기 5세와 존 결지왕 150
      • 제3부 리무쟁 귀족층의 가족 구조 변화 154
      • 제1장 개인의 이름과 가족 구조 156
      • 1. 9~10세기의 이름 159
      • 2. 두 이름 체계의 등장 163
      • 1) 개인 이름과 성 163
      • 2) 주요 귀족 가문 구성원들의 이름 분석 167
      • 3. 이름의 계승과 가문 의식의 성장 173
      • 1) 리모주 부백 가문의 작명 방식 173
      • 2) 장남의 이름 계승 176
      • 3) 특정 이름의 선호 178
      • 제2장 수직적 가족 구조의 확립 182
      • 1. 장자 상속제의 확립 182
      • 1) 11세기 182
      • 2) 12세기 이후 185
      • 2. 결혼 전략 189
      • 1) 장남의 결혼 189
      • 2) 차남 이하 아들의 결혼과 방계 형성 195
      • 3) 딸의 결혼 198
      • 제3장 가문 의식의 내면화 202
      • 1. 망자와 생자의 관계 202
      • 1) 가족 납골당의 등장 202
      • 2) 기억의 한계 206
      • 2. 족보 208
      • 1) 리모주 부백 가문 208
      • 2) 라투르 가문 212
      • 3. 궁정문학 214
      • 맺음말 219
      • 참고문헌 226
      • 부 록 250
      • 1. 주요 가문들의 가계도 250
      • 1) 부백 가문들 250
      • 2) 주요 귀족 가문들 255
      • 2. 위제르쉬 수도원 증서대장 263
      • 1) 증여문서의 사례들 263
      • 2) 위제르쉬 수도원 증서대장에 나타난 친족관계 분석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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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논문관계도

      1 강일휴, "「‘봉건혁명론’ 논쟁」", 『서양중세사연구』, vol. 16 , pp. 86-111, 2005

      2 유희수, "『사제와 광대. 중세 교회문화와 민중문화』", 서울, 2009

      3 이기영,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 서유럽 농노제와 봉건적 주종관계의 형성 및 인종문제』", 서울, 2017

      1 강일휴, "「‘봉건혁명론’ 논쟁」", 『서양중세사연구』, vol. 16 , pp. 86-111, 2005

      2 유희수, "『사제와 광대. 중세 교회문화와 민중문화』", 서울, 2009

      3 이기영,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 서유럽 농노제와 봉건적 주종관계의 형성 및 인종문제』", 서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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