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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타자의 "시선"과 "자유"의 의미 -사르트르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김지녀 ( Ji Nyeo Kim )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2011 한국문예비평연구 Vol.- No.34
김수영의 시에는 수많은 타자가 등장한다. 그의 시에서 타자는 아버지, 여편네, 친구, 식모, 누이 등 다양하게 출현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타자가 언제나 우리가 일상적인 공간에서 마주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주로 ``시선``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타자가 하이데거식의 타자, 즉 ``공동존재(Mit-dasein)``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자는 개별자가 아닌 단순한 동료, 즉 팀워크를 이루지만 어떻게 바꿔도 상관이 없는 하나의 교환가능성으로서의 익명적 다수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박인환과의 관계가 잘 말해주듯이, 그 누구보다 타인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던 시인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에게 타자는 주체와 분리 불가능한 대상이며 상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즉 김수영의 시에 출현하는 타자는 근본적으로 그의 실존의 조건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흥미롭게도 사르트르 사유속에 내재하는 타자 인식을 발견하게 된다. 사르트르처럼, 김수영 또한 타자가 던지는 ``시선``을 예민하게 포착하며 그 ``시선``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한국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유입되고 유행한 시기와 김수영의 시작 활동 시기가 거의 일치하고 그러한 공시성이 양자 사이에 내적인 긴밀함을 형성했으리라는 전제 아래, 타자인식의 관점에서 김수영과 사르트르의 상관성에 주목한다. 먼저 김수영 초기시에 나타나는 타자, 타자의 ``시선``은 수동적 주체를 출현시키는 근본 조건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 「아버지의 사진」, 「도적」등의 초기시에 나타난 ``미국``이나 ``아버지``와 같은 타자는 주체의 절대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강력한 ``시선-존재``로 작동한다. 이때 타자의 ``시선``이나 타자의 ``시선`` 속에서 출현한 주체가 본질로 삼는 감정이 바로 ``수치``이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김수영의 시는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주체와 타자의 ``시선``이 투쟁하는 양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 탄생한 수동적 주체는 김수영의 시작 후기에 이르러 점차 그 ``시선``과 투쟁하여 자기 본연의 ``자유``를 회복하는 주체로 변화하는데, 이는 자신의 삶과 역사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참여하여 주체의 능동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을 해명하기 위해 이 논문은 사르트르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타자의 시선, 수치, 시선끼리의 투쟁, 자유 등의 개념을 활용한다. 김수영의 시에 나타나는 타자 인식의 특성과 자유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이 논문은 궁극적으로 김수영이 역사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시작 후기에 이르러 ``사랑``을 통해 역사현실에 대응해갔는가를 통시적으로 밝힌다. This thesis takes note of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Kim Su Young and Sartre bearing in mine the fact that the time of Sartre`s Existentialism being introduced to, being in vague in Korea and the time of Kim Su Young`s activity of composing poems are almost coincided, and the guess that such simultaneity must have formed an internal intimateness between the two people. Especially, in this thesis, the Other in Kim Su Young`s poems, in other word, the feeling of the Others` ``Gaze``, or ``Shame`` will be looked into in the manner of relating them to Sartre`s thought. The meaning of change in the recognition of the Other appearing in Kim Su Young`s early and later poems will be identified from the view of ``Freedom``. Then, the concepts of the Other`s Gaze, Shame, fighting among Gazes, and Freedom, the core of Sartre`s thought are quoted. This thesis will ultimately reveal how Kim Su Young perceived reality and how he responded to historical reality through ``Love`` in later year of his composing of poems by analyz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cognition on the Other and the meaning of freedom that presented in Kim Su Young`s poems.
타자 이해에 근거하는 국내 이주근로자 선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철학을 중심으로
신성임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23 선교와 신학 Vol.61 No.-
국내 이주근로자 선교는 타문화권 배경으로 한국 사회에서 타자로 살아가는 이주근로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 이해에 근거한 선교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타자 이해에 근거한 선교는 동일화를 강요하는 제국주의 선교를 지양하게 만들고, 복음 수용자를 진정으로 고려한 선교가 되게 한다. 타자 연구에 대표적인 학자인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타자 철학에 따르면, 이주근로자는 절대적 타자성을 소유한 타자, 얼굴의현현으로 호소하는 타자, 자아의 주체성을 바르게 세우는 타자 그리고 자아의 윤리적 책임을 일깨우는 타자이다. 이런 이주근로자에 대한 이해를선교에 적용할 때, 다음과 같은 적용점이 도출된다. 타자는 자아의 범위 내에 구속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을 소유한 자이기에 자아와의 동일화를강요하는 선교는 지양되어야 하고, 그들은 현현 자체로 우리에게 호소하는자이기에 그 호소에 응답하는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우리의 이기주의와 방종을 제한하여 바른 주체성을 가지도록 돕는 자이기에, 그들로 인해 또한 그들과 함께 윤리적 성숙을 이루어가는 선교를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의 표현과 공공성을 창출하는 환대를 실천함으로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선교를 한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진정한 타자 이해에 중점을 두는 선교에 임하고, 그 결과로 더 많은 이주근로자들이 복음에 반응하기를 기대한다. The mission among migrant workers in Korea requires an understanding of migrant workers as the Other with a different cultural background. Such a mission avoids inflicting violence against the Other. According to Levinas, a well-known philosopher in this subject, migrant workers as the Other are the ones who have an absolute alterity, appealing with their faces, helping us to establish self-subjectivity and realize our ethical responsibility. Missional applications that are based on this concept of the Other are following. Firstly, the migrant mission should avoid identifying (assimilating) others with self-understanding, because the Other is the person with absolute alterity. The Other cannot be incorporated into self's boundary Secondly, the Other appeals us by appearing in their face therefore the mission should be the response to the appealing. Thirdly, the aim of the mission should be self-ethical maturity in relation to the Other, and in the process, selfishness and selfindulgence is avoided. Lastly, the mission responsibility is to practice hospitality to the Other. Through such mission based on the understanding the Other, one can hope that more migrant workers respond to the Gospel and the Korean church commits to the mission among the migrant workers.
곽호철(Ho-Chul Kwak) 한신대학교 신학사상연구소 2020 신학사상 Vol.0 No.188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존재한다. 절대적 타자인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인 타자들을 위해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교회는 자기 과시성이나 자기만족을 지양하고 타자를 환대하고 타자를 위해 개방된 공간을 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 안팎의 타자들, 즉 일반 시민, 사회적 약자, 장애인, 여성, 죽은 자, 생태계의 보존 등을 배려한 공간 배정과 건축이 필요하다. 일반 시민들을 위해서는 벽을 낮춘 교회 혹은 벽을 허문 교회가 필요하고, 노숙인들과 가출청 소년들을 위한 공간도 추진해야 하고, 장애인들에게는 휠체어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차하고, 보행하고, 예배드리고, 친교할 수 있는 공간 구조가 필요하며, 여성들에게는 친교와 봉사를 남성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친교실과 주방의 배치와 수유실을 따로 갖춘 자모실, 확장된 화장실 등이 필요하고,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서는 기후 변화의 시대에 에너지 절약을 최대한 할 수 있는 방향의 건축이나 일반 건물의 공유 등이 필요하며, 죽은 자를 위해서는 납골당의 설치와 무연고자도 납골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한다. 언급된 타자의 목록이나 타자에게 필요한 공간 등은 더 많은 대화를 통해 확장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교회 공간을 통해서 구체화되어야 하며 이러한 교회의 노력은 타자를 향한 교회의 사랑이 공간을 통해 구조화될 때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The church exists for the other. It is called to exist for God, the Absolute Other, and the others who are not themselves a part of the church. As a being for the other, the church should avoid selfishness or self-satisfaction, in order to welcome the other and create an open and safe space for the other. The church needs to work toward allocating and creating space for the others within the church: ordinary citizens,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the differently-abled, women, the dead and those grieving them, and the vulnerable nonhumans in an ecosystem. The church should provide homeless people and runaway teens with a welcoming and safe space, and the differently-abled with spacious parking spots. They should work to make the worship space comfortable and friendly with wide corridors for the unhindered movement of wheelchairs, and provide female members with a kitchen directly connected to a community room, a nursing room separated from a breast-feeding room, and more toilets compared to male ones. In the age of climate change, it is necessary to build energy efficient buildings to reduce greenhouse gases. For the dead, the ossuary, which is open to nonmembers, should be installed in and around the church. The mentioned list of the others, or the specified space for the others, should be expanded through more lively discussions. The church space is the show-and-tell of the consideration and concern for the other for whom God’s love is substantiated and materially structured in the world.
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집단의 압력과 사회적 무시 - 곰이라고요 곰! 과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 를 중심으로-
나선희 건국대학교 GLOCAL(글로컬)캠퍼스 동화와번역연구소 2023 동화와 번역 Vol.46 No.-
본 연구는 타자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형성되는 정체성이 개인의 인권은 물론 자아실현을 비롯한 ‘더 좋은 삶’과 사회적 통합에 대해 갖는 중요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출판연도를 기준으로 30년의 시차를 지닌 그림책, 곰이라고요, 곰! 과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 를 대상으로, 특정 사회 및 집단에서 타자의 정체성은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분석하였다. 특정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개인적인 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니며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되며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다(엠케 22-23)”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의 정체성을 둘러싼 타자화의 문제는 집단과 사회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정체성을 공유한 집단이 타자의 정체성에 대해 갖는 사회적 무시와 압력을 살펴, 타자 이해의 문제가 그동안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논의되어온 것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 곰이라고요, 곰! 과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 는 산업화 과정에 따른 생태계 변화와 그 과정에서 서식지를 잃고 위기에 처한 동물의 삶을 통해, 특정 집단이 개인의 정체성에 가하는 압력과 같은 영향 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두 권의 그림책이 곰이 자신의 서식지에 공장을 세운 인간들에 의해 하루 아침에 이방인이자 타자가 되어 공장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받는 이야기를 공통으로 하면서도, 글 텍스트의 세세한 부분과 시각 이미지의 형상화 측면에서 흥미로운 차이를 보여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또 새로운 환경에서 타자가 된 개인은 그 환경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조차 없는 가운데, 집단으로부터 집요하게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받는다. 이 과정은 특히 곰에 대한 공장 사람들의 태도에서 보듯, 집단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공장 사람들로 대변되는 집단은 모두 하나같이 집단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해와 관점에 따라, 타자를 보고 싶은 대로만 보며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하였다. 그들은 반성적 사고나 합리적 추론을 통해 타자를 고려하는 대신 자신들을 절대적인 잣대로 삼아, 타자를 무시하며 자기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무시와 사회적 압력의 과정은 모욕과 낙인찍기를 비롯한 인신공격을 동반하여, 개인의 존엄을 해치며, 종국에는 사회적 죽음의 형태에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30년 후에 출판된 그림책에서 더 심화되어, 산업 발달과 함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곰이 공장 밖으로 나오게 된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곰이라고요, 곰! 에서는 곰이 공장이 폐업함에 따라 일꾼들과 함께 공장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 에서는 공장은 여전히 돌아가고 곰의 해고로만 일단락되어, 현대사회에서 타자가 집단에서 갖는 위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또 결말 부분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집단의 압력은 단순히 개인의 정체성 혼란 및 상실에 그치지 않고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해악임을 보여주었다. This study was conducted considering identity formed in an inseparable relationship with others as a starting point for individual human rights as well as “better life” and social integration including self-realizat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social pressure and the neglect of others‘ identities. To achieve this, we examined how the identity of others is perceived in specific societies and groups in The bear That Wasn’t and The Bear Who Wanted to be a Bear.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Both picturebooks depict the changes in the ecosystem and the lives of animals in crisis after losing their habitats due to the industrialization process. They also illustrate the impact of a specific group on individual identity. Although the two picturebooks share the story of a bear forced to become a stranger and ‘other’ in a single day by humans who establish factories in their habitats, as well as a new identity imposed by factory people, they exhibit intriguing differences in the details of the text and visual imagery. Social pressure and disregard for the identity of other are closely related to the group's interests. All groups represented by factory people impose a new identity on the ‘other’ based on the homogeneity of the group, perceiving the ‘other’ only as they wish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and perspective. Instead of considering the other through reflective thinking or rational reasoning, they use themselves as an absolute standard, ignoring the other. In addition, this process of neglect of the identity of others and social pressure is accompanied by personal attacks, including insults, stigmatization, harm to individual dignity, and eventually taking the form of social death. This phenomenon intensifies in The Bear Who Wanted to be a Bear, a picture book published 30 years later, reflecting socioeconomic changes alongside industrial development.
최진석(Choi, Jin Seok)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4 서강인문논총 Vol.0 No.40
20세기 초엽 바흐친이 몰두했던 것은 윤리의 문제였다. 문화와 삶의 분열이라는 시대적 곤혹에 맞서 그는 행위철학과 사건의 윤리를 통해 응답하려 했지만, 타자라는 문제에 봉착하며 사유의 전기를 맞이한다. 존재론적으로 타자는 주체의 외부이고 선차적이기에 나-주체와 교통할 수 없으나, 바흐친은 작가와 주인공의 틀을 빌어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사유했던 것이다. 존재론적 미학은 여기서 성립하는 바, 무정형하게 열려 있는 우리의 삶은 타자의 관여를 통해서만 완결되고 통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우월성은 그가 타자의 자리에 있음에서 기인하고, 이러한 타자-화야말로 삶의 일관성을 이루어내는 중요한 계기임이 밝혀진다. 주체-화는 타자-화의 효과이자, 그 다음 타자-화의 경로로서 의미를 갖는다. 대화주의 역시 이 관점에서 재조명되는데, 대화는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이행의 운동인 까닭이다. This article aims to trace a trajectory of the early Bakhtinian thought in the light of “Becoming-Other” and “Becoming-Subject.” It was the ethical problems that engaged young Bakhtin’s mind in 1920s. He tried to overcome the problem of the division between culture and life, and he finally got the first solution in “Philosophy of Act” and “Ethics of Events.” But the existence of “other” appears as a fatal problem in this phase, because all the events of our life are filled with the participations of others. Bakhtin wanted to solve it with the plan for the ontological aesthetics, which was carefully and complicatedly described in Author and Hero in Aesthetic Activity. According to him, I-subject is always oriented to other (people), through which one can be real subject in his life. This could be named as “Becoming-Other” that turned out to be a critical moment for the “Becoming-Subject.” In this sense, we can also find the key point to the core of Bakhtin’s Dialogism. For he argues that the dynamics of dialogue consists in the ceaseless tendency to the position and function of “other.” That’s why we have to investigate the early Bakhtinian thought from a vantage point of “Becoming-Other” and “Becoming-Subject.”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과 책임 : 윌리엄 스타이그의 그림책을 중심으로
나선희 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2022 다문화콘텐츠연구 Vol.- No.42
본 연구는 현대 사회에서 타자 이해 및 수용이 자아 성장은 물론 민주사회 발전과 삶의 질 향상에 대해 갖는 의미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윌리엄 스타이그의 그림책, 아모스와 보리스, 치과의사 드소토 선생님,아프리카에 간 드소토 선생님을 대상으로 일상을 떠나 낯선 타자와 만나는 인물들의 존재론적 모험을 분석하였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세 권의 그림책을 통해 타자의 문제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 그림책 사이의 상호텍스트성과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를 바탕으로 정리해보았다. 분석 결과, 윌리엄 스타이그는 세 권의 그림책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며 책임지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삶을 다채롭고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생쥐와 고래의 만남과 생쥐와 여우의 만남과 같이 다소 극단적인 설정을통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타자들 사이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있었다. 다시 말해 물리적 공간으로 은유되는 우리와 아주 ‘먼 거리’에 있는낯선 타자이자, 우리의 삶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낯선 타자와의 만남을통해 주체와 타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타자화의 양상과 견주어 볼 때 매우 의미 있는 설정으로 여겨진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세 권의 그림책에서 모두 가장 왜소한 형태의 생쥐를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며 책임지는 인물로 그려,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는 비록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일지라도 가능함을 역설한다. 또 아모스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누구나 고통받는 타자이자,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고 책임지는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드소토를 잡아먹고자 한 여우나 홍키통크를 모욕한 무담보의 예에서 보듯,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은, 타자는 내가 판단하고 규정할 수없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타자에 대한 판단과 인식 이전에 우선되어야 함을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보리스와 치과의사 드소토의 예에서 보듯, 고통받고 있는타자의 호소에는 자신의 일상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원칙을 넘어서는,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응답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는 결국 타자는보리스와 드소토의 예에서 보듯, 거주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 및 안전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주체 대신, 타자를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 서 살 것을 촉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윌리엄 스타이그의 그림책, 아모스와 보리스, 치과의사드소토 선생님, 아프리카에 간 드소토 선생님은 타자 이해와 수용과 관련한 다양한 쟁점들을 담아, 여러 교육 현장에서 타자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때 보다 쉽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기대된다.
박규태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2021 비교일본학 Vol.51 No.-
오늘날 노리나가 국학에 대한 재평가는 주로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의 『모토오리 노리 나가』(本居宣長)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종종 내셔널리즘의 문제를 우회하여 노리나가의 가론(歌論) 및 겐지모노가타리론(源氏物語論)에서 적극적인 의의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주의적 맥락에서 ‘인정론(人情論)’을 읽는다든지 순수문학론의 맥락에서 ‘모노노아와레’(物哀れ)를 해 석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거기서 모노노아와레는 오직 미학적 가론이나 겐지모노가타 리론의 범주 내에서만 거론되며, 광신적인 고도론(古道論)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고도론의 전제인 ‘가라고코로’(漢意) 담론과의 연관성은 별로 문제 시된 적이 없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노리나가의 모노노아와레 담론이 ‘타자배제’의 감추어진 지향성에 있어 실은 가라고코로 담론과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고의 목적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특히 가라타니 타자론의 다시읽기를 통해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의 문학적・미학적 개념에 내포된 근본적인 한계와 함께 그 가능성을 확인함으로써 모노노아와레의 타자성에 내포된 중층적 의미를 규명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 해 본고는 모노노아와레론과 가라고코로론의 공모관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이 때 본고에서 말하는 타자는 크게 일반적인 ‘현상적 차이로서의 타자’와 가라타니 고진이 말 하는 ‘순수차이로서의 타자’라는 두 가지 차원을 내포한다. 양자는 흔히 혼동되거나 경계가 애매하게 말해지기 십상이지만, 후자 즉 ‘순수차이로서의 타자성’의 은폐나 상실은 대개 타자 배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노리나가의 모노노아와레 담론에 등장하는 ‘고토’(事)가 주로 ‘현 상적 차이로서의 타자성’을 가리킨다면, ‘모노’(物)는 두 가지 차원 모두에 관여되어 있다고 볼 만하다. 그런데 노리나가는 이 고토와 모노를 동일시했다. 이 점은 모노에 내포된 ‘순수차 이로서의 타자성’의 소거를 예감케 한다. 그 결과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미는 특히 근대 이 후 타자배제적인 가라고코로 담론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만의 독아론적인 모노노아와레 공동 성에 갇혀버릴 위험성을 증대시켰다. Nowadays, the revaluation of Norinaga's National Study has often been made after the model of Hideo Kobayashi(小林秀雄)'s Motoori Norinaga(本居宣長). Some say about the discourse on human nature(人情) from the humanistic perspective and others say about mono-no-aware from the context of pure literature, frequently taking a long way around the issue of nationalism. They tend to find somewhat affirmative meanings from the discourse on Uta(歌) and Kejimonogatari(源氏物語). In so doing, mono-no-aware has been discussed only within the perspective of aesthetic discourse on Uta(歌) and Kejimonogatari(源氏物語) or regarded as an independent thing having no connection with that fanatical discourse on Ancient Way(古道). Therefore the relationship between mono-no-aware and karagokoro, the premise of the discourse on Ancient Way(古道), has not been properly noticed until now. However, this essay will pay special attention to the fact that Norinaga's notion of mono-no-aware is secretly connected with that of karagokoro in the hidden orientation excluding the Other. The purpose of this essay, based on the above-mentioned concern especially referring to Kojin Karatani(柄谷行人), is to examine the complex meanings of the Otherness in mono-no-aware, making sure that mono-no-aware, the Japanese literatural and aesthetical concept, has some fundamental limits as well as possibilities. Finally, I will also discuss the conspiracy between mono-no-aware and karagokoro.
문흥술(Moon Heung-Sul) 구보학회 2020 구보학보 Vol.0 No.26
2020년 최근에 이르러 한국소설은 타자지향적인 새로운 윤리적 주체로 그 소설적 주제를 심화 확장하고 있다. 이 작품들의 소설사적 의의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첫째 주체가 자신의 성립 조건인 폭력적 보편규범을 문제 삼으면서 자기반성을 통해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측면, 둘째 자기 반성적 주체가 보편과 특수의 경계를 가로질러 특수 규범을 번역을 통해 되살림으로써 보편규범을 재정식화하려는 측면, 셋째 주체가 타자의 아픔에 정서적으로 공감하면서 주체와 타자, 보편과 특수의 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목소리가 공존하는 공동거주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측면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김병운의 「한밤에 두고 온 것」에서 주체는 자신의 존재론적 성립 조건인 이성애중심주의 규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자기반성을 통해, 성소수자인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게 되고 그러한 타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나아간다. 최윤의 「소유의 문법」에서 주체는 보편과 특수 규범의 경계를 허물면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상인이 비정상인을 배척하는 보편규범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하나 되는 특수 규범에 의해 보편 규범을 재정식화하고자 한다. 최수철의 「다리 위에 지은 집」은 보편규범의 무의미한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정신병 환자가 겪는 아픔을 의사인 주체가 공유하면서, 주체와 타자, 보편과 특수의 이질적이면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장을 지향한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이들 소설은 주체의 타자 억압으로 인한 한국 사회의 제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한국소설이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소설사적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Today, Korean novels are expanding their novel themes into a new other-oriented ethical subject. To examine the novel significance of these works, one must pay attention to the following three things. First, the subject should take issue with his conditions of existence, the violent universal norms, and recognize the otherness of the other through self-reflection. Second, the self-reflection subject must revive special norms through translation across the boundaries of universality and speciality. By doing so, he must redefine universal norms. Third, the subject should empathize emotionally with the pain of the other and try to set up the field for cohabitation where the diverse and disparate voices of the subject and the other, the universal and special coexist. In Kim Byung-woon’s “Leaving at Midnight” the subject makes a self-reflection criticism on the heterosexuality-oriented norm, which is the condition of his existential establishment. Through this, the subject recognizes the otherness of the other, which is a sexual minority, and moves on to a beautiful encounter with the other. In Choi Yoon’s “The Grammar of Nature” the subject seeks to break down the boundaries between universality and special norms, exposing the violence of universal norms in which humans dominate nature and normal people reject abnormal people, and redefining universal norms by special norms in which humans, nature and the universe become one. In Choi Soo-chul’s “A house built on the Bridge” the subject try to set up the field for cohabitation where the diverse and disparate voices of the subject and the other, the universal and special coexist, sharing the pain of a mental patient who reject the meaningless life of universal norms and create new meaning of life. In this regard, these novels have secured the novel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at they are exploring the right direction for Korean novels, offering an alternative to overcome various problems in Korean society caused by the oppression of typists.
최진석(Choi Jin Seok) 한국노어노문학회 2009 노어노문학 Vol.21 No.3
본 논문의 목표는 20세기 대표적인 ‘타자의 철학자’로 거론되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미하일 바흐친의 사유를 비교해보고, 양자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 이래 근대적 사유의 특징은 주체를 세계 인식과 이해의 중심에 두고, 주체 이외의 모든 것들을 오직 주체만을 위한 대상으로 객체화시켜 바라보는 데서 성립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주체의 세계전유 능력과 더불어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실용주의적 사고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타자를 도구적으로만 인식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의 역사를 배태하기도 했다. 가령 고도로 발달된(‘합리화된’) 과학기술을 무기로 벌어졌던 20세기 전쟁과 대량살육의 참사가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레비나스는 특유의 종교적 태도와 현상학적 기술을 통해 타자의 의미를 되묻는다. 그가 제기하는 타자란, 무엇보다도 나-주체 앞에 고통스런 얼굴을 드러내며 동정과 연민을 호소하는 존재이다. 타자는 나-주체 앞에 약자이자 빈민,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과부와 고아’ 같은 구체적 이웃으로 등장하며 나-주체의 손길을 요청한다. 여기서 나-주체는 타자를 추상적 개념 속에 떠올리지 말고, 가장 구체적인 모습 가운데 직접 마주해야 하며, 타자의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책임성을 반성하도록 요구된다. 타자가 지닌 진정한 의미는 그와 얼굴을 직접 면대면(面對面)함으로써 즉각 깨우쳐지게 되며, 이로써 나-주체는 타자를 섬기며 그에 봉사하는 내적 겸허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경험들로부터 자기 사유의 근거들을 길어올린 레비나스의 타자론은 대단히 감동적이며, 어느 정도는 바흐친이 1920년대 ‘철학적 미학’의 여정에서 보여주었던 타자론과 상당히 유사하게 보인다. 예컨대 「행동 철학」이라든지 「미학적 활동에 있어서 작가와 주인공」 등의 초기 논문에서 바흐친은 타자에 대한 고려가 없는 주체의 이미지는 불완전하며, 오직 타자에 대한 애정어린 태도만이 나-주체의 윤리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외양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에는 근본적인 상위점이 존재한다. 이는 바흐친이 책임의 원천으로서 ‘사건(событие)’을 어떻게 개념화했는지 살펴보면 여실히 드러나는데, 그에게 타자에 대한 책임이란 존재(бытие)의 공존(со)적 상황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지, 타자에 대한 실존적인 공감(‘동정’과 ‘연민’)으로부터 나오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나-주체가 차지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의 시·공간은 어쩌면 타자가 있을 수도 있는 자리이며, 따라서 나-주체는 타자를 대신하여 지금-여기 있는 것이기에 최선의 윤리적인 행동을 해야 할 필요충분한 동기를 부여받는 것이다. 더욱이 나-주체가 지금-여기의 사건 가운데 참여하고 있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타자와의 공동적 관계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으로, 좋든싫든 생성 중인 사건의 장(場) 안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단순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주체는 타자들과 함께하는 사건의 생성 과정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바흐친의 윤리 개념은 보다 명확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그것은 칸트식의 무조건적 정언명법도 아니고, 또한 레비나스식의 동정과 연민의 도덕도 아니다. 바흐친이 염두에 두고 있던 새로운 윤리는, 주체로서의 내가 항상-이미 타자들과의 사건적 관계에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책임있는 사고와 행동이 ‘나’의 존재 이전에 이미 요청되어 있다는 점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사건의 윤리’가 지닌 강한 설득력은, 그것이 강제적 규범이나 주관적 공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구체적 행동 속에서 실현되어 나간다는 점을 해명한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