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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曉와 一然의 삶과 그 문학적 거리

        허원기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59

        This paper is a comparison and review of Wonhyo and Ilyeon from the perspective of time, space, writing philosophy, and way of life. The conclusion is as follows. First, Ilyeon was born 589 years after Wonhyo. However, as a characteristic of the times, they have a common point in that they lived in the era of war, the era of Buddhism, and the era of integration. Second, in terms of space, both Wonhyo and Ilyeon were born in Gyeongsan, and the gyeongju has an important meaning in their lives. Wonhyo mainly lived in Gyeongju, Ilyeon mainly lived in the Yeongnam area near Gyeongju. Ilyeon did not live in Gyeongju for a long time. But he had a deep interest in the cultural sites of Gyeongju. For Wonhyo and Ilyeon, Gyeongju was their spiritual home. Third, Wonhyo and Ilyeon found the basis for social integration in Silla and Buddhism, and based on it established their writing philosophy. Wonhyo was in charge of the task of the period through the writing of Ilonhwajaeng, and Ilyeon through the writing of ilyujunghaeng. Wonhyo's the writing of Ilonhwajaeng is 'writing that fuses and communicates different theories', and Ilyeon's the writing of ilyujunghaeng is 'writing that fuses and communicates different ways of life'. There is something in common between the two people in that they aimed at writing to actively unite and communicate different things. Fourth, Wonhyo and Ilyeon showed a similar way of life, sharing time, space and writing philosophy like this. It was the pursuit of a world of learning, converging and repenting in academic terms, the pursuit of a life of one merit and substance in practical terms, and the sharing of interest in the way of Zen Buddhism in the way of Buddhism Training. 이 논문에서는 일연이 원효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사실에 주목하고 시간과 공간, 글쓰기철학과 삶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두 사람을 서로 비교ㆍ검토해 보았다.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적으로 보면, 일연은 원효보다 589년 후에 태어났다. 그러나 시대적 특징으로 보면, 전쟁의 시대, 불교의 시대, 통합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원효는 삼국의 통일전쟁과 당나라와의 전쟁을 겪었고, 일연은 6차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전쟁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겪었다. 원효는 외래 종교였던 불교가 교학적으로 토착화되던 시기를 살았고, 일연은 선불교가 널리 토착화되고 내면화되던 시기를 살았다. 또한 일연은 국가 간의 대외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대에 살았고, 일연은 몽골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내부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대를 살아갔다. 두 번째, 공간적으로 보면, 원효와 일연이 모두 경산에서 태어났으며, 그들의 인생에서 경주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원효는 경산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활동한 곳은 당시 신라불교의 중심지로 고선사, 요석궁, 분황사, 황룡사 등이 있었던 경주였다. 일연은 경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원효의 흔적을 가까이에서 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가 이후로는 경주 행재소와 강화도와 남해에서 거주했던 기록이 있지만 경주 인근의 경상도 지역의 절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일연이 경주에 오래 거주하지는 않았으나 경주의 불교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주에 관련된 기록을 압도적으로 많이 남겼다. 경주는 신라불국토의 중심으로 일연에게는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 번째, 원효와 일연은 전쟁과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회통합의 근거를 신라와 불교에서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글쓰기의 철학을 수립했다. 원효는 異論和諍의 글쓰기를 통해서, 일연은 異類中行의 글쓰기를 통해서 그러한 시대적 과업을 담당했다. 원효의 이론화쟁 글쓰기는 ‘서로 다른 다양한 학설들을 융합하고 소통시키는 글쓰기’이고, 일연의 이류중행 글쓰기는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융합하고 소통시키는 글쓰기’이다. 원효는 불교의 학설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던 시기에 이들을 융합하고 소통하는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담당했다. 일연은 선불교가 정착된 이후 학술이론을 넘어 서로 다른 삶들 속으로 들어가 다양하게 구전되는 삶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수집ㆍ정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고려인의 이상적인 삶의 원형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다른 것을 융합하고 적극적으로 소통시키는 글쓰기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네 번째, 원효와 일연은 이렇게 시간, 공간, 글쓰기 철학을 공유하면서 유사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학문적인 면에서 융합하고 회통하는 학문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 실천적인 면에서 聖俗不二의 삶을 추구했다는 점, 불교수행의 방식에서 禪적인 수행방식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 KCI등재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

        김희만 ( Kim¸ Heui-man ) 한국사상사학회 2021 韓國思想史學 Vol.- No.68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최치원 관계기사를 분석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一然)의 최치원 인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 관련 자료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작업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가 왜 최치원 관련 자료를 다른 인물의 자료보다 많이 삽입하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먼저, 『삼국유사』 속의 최치원 관계기사를 검토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추출하고, 『삼국사기』에 서술된 최치원 관계 자료와 대비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 관계 자료는 최치원에 ‘대한(about)’ 서술 위주라면, 『삼국유사』 관계기사는 최치원에 ‘의한(by)’ 논지 전개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었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를 찬술하면서 의도적으로 최치원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일연이 최치원의 말을 원용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더욱 폭넓게 찬술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연의 역사서술 태도가 유연하였기 때문이다. 일연은 불교 승려였지만, 유학(儒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최치원 관련 자료를 중시하여, 활용한 것이 바로 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지만, 귀국 후 왕명으로 불교 관련 비문,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을 작성하는 등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일연에게 있어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사에 정통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최치원에 대한 인식이 『삼국유사』의 찬술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일연의 최치원 자료 활용과 그 인식을 규명해 보기 위해서 『삼국유사』 관계기사의 의미 또는 성격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았다. 최치원 관련 자료를 『삼국유사』에 굳이 수록하여 무엇을 밝히려고 했는 지에 대하여 검증을 시도한 것이다. 사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을 한국 고대사회 및 불교와 유교에 정통하였다는 측면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기록하게 된 것이 최치원 관련 자료이며, 일연은 그 기반 위에서 『삼국유사』의 해당 부분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유사』의 성격을 유교와 상대되는 불교 또는 신이사관(神異史觀) 등으로 평가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최치원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분석한 결과, 『삼국유사』의 찬술자 일연은 불교와 유교를 접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폭넓은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In this article, we analyzed the articles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三國遺事)』, and looked into the recognition of Choi Chiwon of Ilyeon(一然), a author of 『Samgukyusa』. In 『Samgukyusa』, there are more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than other figures, but no active review has been made so far. Through this study, we investigated why the proponent of 『Samgukyusa』 inserted more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than other figures, and what he was trying to convey as a result. First, in order to examine the articles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 related data were extracted and analyzed in comparison with the data related to Choi Chi-won described in 『Samguksagi(三國史記』. Through this, it was possible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while the documents related to 『Samguksagi』 focused on ‘about’ to Choi Chi-won, the articles related to 『Samgukyusa』 were developed ‘by’ by Choi Chi-won. In other words, Ilyeon intentionally used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while writing 『Samgukyusa』. The contents of 『Samgukyusa』 could be more widely recited by Ilyeon citing Choi Chi-won's words, and this was possible because of Ilyeon's flexible attitude in writing history. Ilyeon was a Buddhist monk, but it is thought that he had an attitude to Accept Confucianism. The fact that he put importance on Choi Chi-won-related materials and utilized them shows that attitude. Choi Chi-won was a scholar who studied Confucianism in China, but after returning to Korea, he was active as a literary writer by writing Buddhist inscriptions, especially Sasanbimyeong(四山碑銘). Therefore, for Ilyeon, Choi Chi-won could be regarded as a Confucian scholar and well-versed in Buddhist history. I think that this perception of Choi Chi-won was reflected in the hymns of 『Samgukyusa』. Next, the meaning or nature of the articles related to 『Samgukyusa』 was examined in more detail in order to investigate the use of Choi Chi-Won's data and its recognition in Ilyeon. It was an attempt to verify what he was trying to reveal by including the data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 In fact, in 『Samgukyusa』, Ilyeon acknowledged that Choi Chi-won was well versed in Korean ancient society, Buddhism and Confucianism, and actively reflected and recorded this. He wrote that part. Existing studies have evaluated the characteristics of Ilyeon as Buddhism or historical consciousness of God(神異史觀) as opposed to Confucianism. Considering that the intention to articulate is reflected, it could be suggested that a new understanding and a broader approach are needed.

      • KCI등재

        『一然碑』에 보이는 淸玢과 山立의 정체

        채상식(Chae, Sang-Sik)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한국민족문화 Vol.59 No.-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가진 청분과 산립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일연비문」과 「일연비음기」에 각각 보이는데, 대선사라는 승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같은 인물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물인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들 양자는 별 의심없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견해를 밝힌 연구가 있었으나, 이의를 제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반된 견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주목된다. 곧 「일연비음기」는 통오진정대선사 산립이 지었는데, 그 내용 중에 산립은 일연 생존 시에 그를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보면 산립은 가지산문 소속 승려이지만,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일연비문」에는 일연의 행장을 충렬왕에게 올려 그의 비문을 짓도록 주선한 청분은 일연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에 혼구가 보각국사에게 귀의하고 수학한 제자로 기록된 점을 주목한다. 이로 보면, 청분 곧 혼구와 생전에 일연을 뵌 적이 없었다는 산립은 별개의 인물인 셈이다. 이러한 상반된 내용 때문에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받은 청분과 산립이 어떤 인물이지 논란이 되었다. 양자를 같은 인물로 파악한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주목하였다. 첫째, 고려시기에 대선사, 선사 등은 상당한 위상을 갖는 고승에게 내리는 승계이다. 이들을 대선사, 선사 등으로 임명할 때는 국가에서 정한 공식적인 절차를 따랐다. 곧 관고와 교서를 함께 내렸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일한 종파에 속한 2명의 승려를 대선사로 임명하면서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내렸다고는 볼 수 없다. 둘째, 「대혜종고행장」에 보이는 사례를 주목하고자 한다. 곧 ‘대혜’라는 시호를 받은 남악회양선사가 따로 있었기에 종고는 생전의 호인 대혜와 입적 후의 시호인 보각을 합해 ‘대혜보각’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에 생존한 인물이 아님에도 혼동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로 보아 ‘통오진정’은 동일한 인물이다. 셋째, 혼구의 문도들이 지은 행장을 토대로 하여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은 일연이 입적한 지 근 33년이 지난 시기에 찬술되었다. 이때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인 혼구가 일연을 계승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에서 직계 문도는 아니더라도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고승이 있을 경우 그를 스승의 반열로 받들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를 계승한 것으로 표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관행은 대체로 고승의 행적을 추종하고 존숭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이는 교단을 장악하기 위한 방편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혼구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원간섭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면 양 측면을 모두 지녔을 것이다. 따라서 혼구는 일연 사후에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었지만, 「혼구비문」에 ‘그에게 배우기도 하고 그를 계승하였다’는 표현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가탁일 뿐이다. Since Cheongbun and Sanrip had the same pen name of ‘Tongohjinjeong.’ They has been regarded as the same person. Some scholars, however, have called this idea in question. In the epitaph on the backside of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陰記」), we can read that Sanrip Tongohjinjeong the Seon(or Zen) master lamented that he had not visited Iryon before his death, which means that Sanrip was not a direct disciple of Iryon. According to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文」) and that of Hongu(「混丘碑文」), on the contrary, Cheongbun was not only a direct disciple of Iryon but also Hongu himself. Therefore, it might be understood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different persons. However, I assert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the same person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it should be noted that Command Paper and Royal Message were delivered altogether when the Seon master was appointed in Koryo. In other words, it does not make sense that the government gave the same pen name to two Seon masters who belonged to the same religious sect and worked in the same period. Second, we should consider a similar case in “Daehyejonggohaengjang”(「大慧禪師行狀」). Since Namakhoeyang the Seon master(南岳懷讓禪師) had received ‘Daehye’ as his pen name, Jonggo(宗杲) was called as ‘Daehyebogak.’ Even though they lived in a different period, their pen names should be distinguished. This implies ‘Tongohjinjeong’ is one person. Third, the Headstone of Hongu, which was based on writings of disciples of Hongu, inscribed after 33 years later than Iryon’s death. At that time, Hongu who led Gachisanmun(迦智山門) would be considered as a disciple of Iryon. Moreover, in the Buddist world, one could claim himself as a follower of the priest of virtue if the priest heavily influenced on his thought, even though he was not among disciples. In conclusion, the inscription that he had learned from and succeeded to Iryon is just a pretext.

      • KCI등재후보

        一然 연구의 현황과 과제

        채상식(Chae Sang-Sik)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6 동양한문학연구 Vol.23 No.-

        올해는 一然(1206~1289)이 탄생한 지 꼭 800년이 되는 해이다. 개인의 탄생이 갖는 의미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三國遺事』의 저자라는 점에서 그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연에 관한 대표적인 초기 연구성과는 崔南善의 『三國遺事解題』이다. 그의 해제는 우리 학계에 아직까지 유효할 만큼 귀중한 성과임에는 분명하다. 민영규는 일연이 남긴 『重編曹洞五位』라는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하고 이를 통해 그의 사상적 경향을 밝힌 성과는 주목된다. 한편 필자는 고려 후기 불교사의 흐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유사』를 이해하기에 앞서 일연 개인에 관한 관심을 촉구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에 대한 높은 사학사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작 禪僧의 길을 걷었던 일연의 행적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의 행적과 관련하여 그의 비문을 복원한 것은 중요한 연구성과이다. 현재 그의 비가 파괴되어 극히 일부만 남아있기 때문에 파괴 이전의 탁본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그런 중에 일연을 계승한 淸?이 바로 『삼국유사』에 보이는 無極임을 밝힌 점은 주목된다. 한편 일연은 간화선에 입각한 선승이지만 조동선과 운문선 등의 다른 계통의 선사상까지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지닌 인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그는 선사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敎學과 儒學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보아진다. 일연이 다양하면서도 포용력이 있는 사상적 경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흥사에 주석한 후에는 특히 관음신앙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대몽항전이라는 오랜 전란에 지친 민중들로 하여금 신앙적 활로를 갖도록 하기 위한 현세구원적 의미가 컸다고 생각한다. 이는 『삼국유사』를 찬술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It is just 800 years since Ilyeon(1206~1289) was born. I think that it is important to look back on him in that he was the author of well-known Samgukyusa(三國遺事), although the birth of one person is not important. Many studies on Ilyeon had laid stress on his Samgukyusa. The early remarkable work was Coi Namsun(崔南善)"s bibliographical explanation of it. But some scholars insisted that the study on Ilyeon himself should precede a study on Samgukyusa. Though we set a highly historical value on Samgukyusa, we didn"t know his works as Seon Monk(禪僧) well. The restoration of his epitaph was important to research the path of his life. It was restored on the basis of its rubbed copy which was made before it was destroyed. It was remarkable that Cheongbun(淸?), Ilyeon"s immediate disciple, was identified as Muguek(無極) who appeared in Samgukyusa through a research on his epitaph. The study results on Ilyeon"s thoughts also were accumulated. It was found that he embraced Seon(or Zen) thoughts such as Chodong Seon(曹洞禪) and Unmoon Seon(雲門禪), though he followed Kanhwa Seon(看話禪). He was well versed in Textual School(敎學) and Confucianism(儒學), not to mention Seon. Though he had various and tolerant thoughts, he put great emphasis on the Buddhism of Mercy(觀音信仰) after he stayed in Inheung Temple(仁興社). I think that his stress on it meant to provide a religious relief for the people who were exhausted by a long resistance to Mongolia. It also would be a direct motive which he wrote Samgukyusa.

      • KCI등재

        『一然碑』에 보이는 淸玢과 山立의 정체

        채상식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한국민족문화 Vol.59 No.-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가진 청분과 산립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일연비문」과 「일연비음기」에 각각 보이는데, 대선사라는 승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같은 인물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물인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들 양자는 별 의심없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견해를 밝힌 연구가 있었으나, 이의를 제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반된 견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주목된다. 곧 「일연비음기」는 통오진정대선사 산립이 지었는데, 그 내용 중에 산립은 일연 생존 시에 그를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보면 산립은 가지산문 소속 승려이지만,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일연비문」에는 일연의 행장을 충렬왕에게 올려 그의 비문을 짓도록 주선한 청분은 일연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에 혼구가 보각국사에게 귀의하고 수학한 제자로 기록된 점을 주목한다. 이로 보면, 청분 곧 혼구와 생전에 일연을 뵌 적이 없었다는 산립은 별개의 인물인 셈이다. 이러한 상반된 내용 때문에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받은 청분과 산립이 어떤 인물이지 논란이 되었다. 양자를 같은 인물로 파악한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주목하였다. 첫째, 고려시기에 대선사, 선사 등은 상당한 위상을 갖는 고승에게 내리는 승계이다. 이들을 대선사, 선사 등으로 임명할 때는 국가에서 정한 공식적인 절차를 따랐다. 곧 관고와 교서를 함께 내렸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일한 종파에 속한 2명의 승려를 대선사로 임명하면서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내렸다고는 볼 수 없다. 둘째, 「대혜종고행장」에 보이는 사례를 주목하고자 한다. 곧 ‘대혜’라는 시호를 받은 남악회양선사가 따로 있었기에 종고는 생전의 호인 대혜와 입적 후의 시호인 보각을 합해 ‘대혜보각’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에 생존한 인물이 아님에도 혼동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로 보아 ‘통오진정’은 동일한 인물이다. 셋째, 혼구의 문도들이 지은 행장을 토대로 하여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은 일연이 입적한 지 근 33년이 지난 시기에 찬술되었다. 이때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인 혼구가 일연을 계승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에서 직계 문도는 아니더라도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고승이 있을 경우 그를 스승의 반열로 받들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를 계승한 것으로 표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관행은 대체로 고승의 행적을 추종하고 존숭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이는 교단을 장악하기 위한 방편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혼구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원간섭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면 양 측면을 모두 지녔을 것이다. 따라서 혼구는 일연 사후에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었지만, 「혼구비문」에 ‘그에게 배우기도 하고 그를 계승하였다’는 표현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가탁일 뿐이다. Since Cheongbun and Sanrip had the same pen name of ‘Tongohjinjeong.’ They has been regarded as the same person. Some scholars, however, have called this idea in question. In the epitaph on the backside of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陰記」), we can read that Sanrip Tongohjinjeong the Seon(or Zen) master lamented that he had not visited Iryon before his death, which means that Sanrip was not a direct disciple of Iryon. According to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文」) and that of Hongu(「混丘碑文」), on the contrary, Cheongbun was not only a direct disciple of Iryon but also Hongu himself. Therefore, it might be understood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different persons. However, I assert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the same person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it should be noted that Command Paper and Royal Message were delivered altogether when the Seon master was appointed in Koryo. In other words, it does not make sense that the government gave the same pen name to two Seon masters who belonged to the same religious sect and worked in the same period. Second, we should consider a similar case in “Daehyejonggohaengjang”(「大慧禪師行狀」). Since Namakhoeyang the Seon master(南岳懷讓禪師) had received ‘Daehye’ as his pen name, Jonggo(宗杲) was called as ‘Daehyebogak.’ Even though they lived in a different period, their pen names should be distinguished. This implies ‘Tongohjinjeong’ is one person. Third, the Headstone of Hongu, which was based on writings of disciples of Hongu, inscribed after 33 years later than Iryon’s death. At that time, Hongu who led Gachisanmun(迦智山門) would be considered as a disciple of Iryon. Moreover, in the Buddist world, one could claim himself as a follower of the priest of virtue if the priest heavily influenced on his thought, even though he was not among disciples. In conclusion, the inscription that he had learned from and succeeded to Iryon is just a pre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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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의 편목과 일연(一然)의 신라 불교 인식

        김희만 한국사상사학회 2023 한국사상사학 Vol.- No.73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composition and meaning of the compilation of 『Samgukyusa』 and to consider the recognition of Buddhism in Silla by Ilyeon, who wrote it. In order to achieve this purpose, first, first analyzes the contents of 『Seungjeon』 and 『Goseungjeon』 recorded in 『Samgukyusa』 were analyzed, and second, the high priests recorded in 『Haedonggoseungjeon』 were compared with the corresponding contents of 『Samguksagi』 and 『Samgukyusa』. And third, the Ancient Korean high priests recorded in China’s 『Goseungjeon』 were compared with those recorded in 『Samgukyusa』. In addition, in order to examine Ilyeon’s recognition of Silla Buddhism in the contents of 『Samgukyusa』, first, the contents related to Silla Buddhism included in 『Samgukyusa』 were analyzed. second, comparing the contents of Silla Buddhism in the 『Haedonggoseungjeon』 with the details of the 『Samgukyusa』, Third, among the contents related to Buddhism in Silla included in China’s 『Goseungjeon』, it was compared with the items included in 『Samgukyusa』. As a result, Ilyeon referred to the contents of 『Haedonggoseungjeon』 and China’s 『Goseungjeon』, but only used 「Euihae」 and 「Gamtong」 as it was while composing the section of 『Samgukyusa』. It was able to reveal that the contents of and were originally created by Ilyeon. The compilation of 『Samgukyusa』 created by Ilyeon is mainly related to the introduction and settlement of Buddhism, and the Buddhism that Ilyeon wanted to convey through 『Samgukyusa』 was ‘Silla Buddhism’, which was developed in various ways by Silla monks. In addition, it was found that the content contained in each section was also written with a focus on Silla Buddhism. It was because the high monks who were listed as Silla in China’s 『Goseungjeon』, but not described in 『Samgukyusa』, did not return to Silla. Ilyeon showed an attitude of not describing them as long as they had nothing to do with the development of Silla Buddhism, even if they left behind achievements as high monks. In other words, through the compilation and contents of 『Samgukyusa』, it was revealed that Ilyeon recognized Buddhism at the time as ‘Silla Buddhism’, which was settled by the Silla people and developed in Silla. 이 글의 목적은 『삼국유사』 편목의 구성과 의미를 파악하여 그 찬술자인 일연의 신라 불교 인식을 고찰해 보려는 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첫째로 『삼국유사』에 수록된 『승전』과 『고승전』의 고승 관련 내용을 분석하고, 둘째로 『해동고승전』에 저록된 고승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소개된 고승과 비교하고, 셋째로 중국 『고승전』에 수록된 한국 고대의 고승 가운데 『삼국유사』에 서술된 고승과 대비해 보았다. 또한 『삼국유사』 편목의 내용에 보이는 일연의 신라 불교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 첫째로 『삼국유사』에 수록된 신라 불교 관련 내용을 분석하고, 둘째로 『해동고승전』에 저록된 신라 불교 관련 내용을 『삼국유사』에 서술된 사항과 비교하고, 셋째로 중국 『고승전』에 수록된 신라 불교 관련 내용을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항과 대비해 보았다. 그 결과 일연은 『삼국유사』의 편목을 구성하면서 『해동고승전』과 중국 『고승전』에 수록된 편목과 해당 내용을 참고하였으나, 그 중 「의해」와 「감통」 편목만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뿐, 그 외의 편목 구성과 내용은 일연이 독창적으로 창안하였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일연에 의해 창작된 『삼국유사』의 편목은 주로 불교의 전래 및 정착과 관련된 내용이며, 또한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전하고자 하였던 불교는 신라 승려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발전한 ‘신라 불교’였다. 그리고 각 편목에 수록된 내용도 신라 불교 중심으로 찬술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 『고승전』에 신라인으로 수록되었으나, 『삼국유사』에 서술하지 않았던 고승은 신라로 귀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연은 이들이 비록 고승으로서의 업적을 남겼더라도 신라 불교 발전과 무관하였다면 서술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즉, 『삼국유사』의 편목 구성과 그 내용을 통하여 일연이 당시의 불교를 신라인에 의해서 정착하여 신라에서 발전한 ‘신라 불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 KCI등재

        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一然)의 역사의식이 갖는 한국교육사적 의의

        예철해 한국종교교육학회 2007 宗敎敎育學硏究 Vol.24 No.-

        이 연구의 목적은『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의 역사의식을 고찰하고 한국교육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목적에 따라 먼저, 일연이『삼국유사』를 저술한 당시의 고려사회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았다. 일연의 역사의식에는 당시 고려사회의 시대 상황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삼국유사』에 나타난 일연의 역사의식을 신이(神異) 사관, 민족주의 사관, 불교 사관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첫째, 신이 사관은 국가적으로 몽고족의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자하는 정신사관의 형태로 나타났다. 둘째, 민족주의 사관은 우리 민족이 단군(檀君)의 후손으로서 단일 민족이라는 자각과 국가의식의 반영이었다. 셋째, 불교 사관은 불교신앙의 힘으로 당시의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불국토 사상과 호국불교 사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일연의 세 가지 사관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저항의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연의 역사의식이 갖는 한국교육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연의 역사의식은 한국의 고대 교육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되며 한국 고대사를 정립(鼎立)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 둘째,『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에 나타난 일연의 역사의식을 통해서 교육이라는 삶의 양식과 그 기원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일연의 신이(神異)사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적(hermeneutical) 접근이 필요하다. 셋째,『삼국유사』에 수록된 많은 불교설화들은 기존의 문학교육적 차원에서의 연구뿐만 아니라, 종교교육으로서 불교교육적 차원에서 연구할 때도 큰 의의가 있다.

      • 일연의 삶과 문학활동

        장석규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 2000 경산문화연구 Vol.4 No.1

        지금까지 우리는 비문을 통해 일연의 삶의 궤적을 확인하고 문학 활동의 범주를 확장시키면서 「삼국유사」에 나타난 문학가로서의 일연에 대해 샅펴 보았다. 이 작업은 일연이 수집해 놓은 자료를 파편처럼 다루어 온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국문학적 가치를 설화나 향가를 담고 있다는 기준만으로 매겨온 관행은 일연의 삶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므로 타기의 대상이 된다. 다음과 같은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일연이 창작한 문학 작품, 곧 50편의 찬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 작업이 필요하다. 선행 연구가 없지는 않으나 작품의 창작 원리, 곧 주제의 구현 방식, 소재의 취급 태도, 각 작품의 개별성과 함께 전체의 관련성 등을 따지는 일이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 전체를 하나의 완결된 문학 작품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물론 일연은 문학보다는 역사 쪽으로 관심을 집중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곳곳에 문학적 사고의 편린이 나타나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각각의 편목이 가진 개별성과 함께 책 전체가 가진 통일성을 따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문학 분야의 연구 결과가 역사학이나 민속학, 불교학 분야의 연구 성과와 결합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제가 완결된 후에라야 일연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 KCI등재

        一然의 禪思想과 『三國遺事』의 상관성

        오대혁(Oh, Dae Hyeok) 동악어문학회 2013 동악어문학 Vol.60 No.-

        일연의 불교사상은 비문이나 지눌의 선사상을 참고하여 보았을 때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돈오하고, 대중교화의 실천을 강조하는 점수를 말하는 선사상이었다. 『중편조동오위』를 통해서는 조동오위의 사상이 지눌의 선사상을 계승한 일연의 선사상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이전의 연구에서 강조되지 못한 지점이다. 일연의 선사상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화엄적 세계 인식을 철저하게 믿는 순간 돈오는 일어나며, 그러한 돈오를 바탕으로 대중교화의 보살행을 수행해 나감이 점수로 인식되는 것이었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일연의 선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몇 가지 서사적 특징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의 설화들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중생들이 사는 곧이 부처님 세상이요, 그들이 곧 부처이며, 그리고 깨달은 자들은 본래 지닌 불성을 모르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게 서사화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돈오를 바탕으로 대중교화의 보살행을 강조한 일연의 선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무속이 불교로 대체되어갔던 종교사상사를 구성하려는 편제가 중심을 이루면서, 佛國土 신앙과 衆生則佛, 異類中行의 주제가 서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Here I talked about Ilyeon(一然)’s idea and the narrative characteristic of Samgukyusa(三國遺事). Through this, we could see Samgukyusa had been directly influenced by the characteristic of Ilyeon’s idea. With the reference to inscriptions and Jinul’s ‘Seon(禪)’ idea, Ilyeon’s buddhism was a ‘Seon’ idea which is emphasize a sudden enlightenment and the act of public reformation based on ‘Hwaeom’ idea. Throughout the Jungpyeonjodongowi(重篇曹洞五位), we could find Jodongowi’s idea is similar to Ilteon’s ‘Seon’ idea which had followed Jinul’s one. After all, Ilyeon’s ‘Seon’ idea show us that the sudden enlightment will be occurred as soon as someone gains a complete trust by the idea of Hwaeom(華嚴) which people equal buddha and Jeomsu(漸修) is the practicing of public reformation based on sudden enlightenment. Throughout above, we could find interesting narrations in the Samgukyusa that buddha’s place can be the place in which the poor and humble live and they can be buddha. Also we could find people who have found enlightment should led relief efforts for the people who do not recognize the nature of Buddha they already have. Centralizing to form the history of religion from the Shamanism to the Buddhism, Samgukyusa has focuced on the faith of Buddhist land(佛國土 信仰), the idea of people equal buddha(衆生則佛), and public reformation in different species(異類中行).

      • KCI등재

        자장(慈藏)의 중국오대산행(中國五臺山行)에서 보이는 문수(文殊)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 검토

        염중섭(자현)(Yeom, Jung-Seop(Ven. Jahyun))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6 佛敎學報 Vol.0 No.76

        자장의 중국오대산행과 그 과정에서 살펴지는 문수친견(文殊親見) 및 가르침에 대한 내용은, 중국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국내자료에만 존재하는 기록이다. 국내자료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수록된 기록군과, 민지의 『오대산사적기』 안의 기록의 두 가지이다. 일연과 민지는 서로 다른 정리의 필연성 속에서, 당시 전해지던 자장에 대한 자료들을 각기 정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의 자료에 대한 분석과 검토는, 자장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와 일연과 민지의 정리방식과 관점에 대해서 인지해 볼 수 있게 한다. 일연은 자장에 대해서 범주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일연이 적고 있는 문수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은,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신라국왕의 신성화에 대한 부분. 둘째는 『화엄경』 4구게를 통한 문수화엄(文殊華嚴)과 관련된 부분. 마지막 셋째는 신라오대산의 개창에 대한 부분이다. 이중 황룡사와 관련된 기록에서 신라국왕의 신성화가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진흥왕과 선덕왕을 연결해서 당위적인 변증을 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음으로 민지는, 신라오대산의 개창과 관련해서 전체적인 자장의 전기 자료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민지는 출전을 명기하고 있는데, 이는 내용에 따른 원전의 이해를 용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자장연구에 도움이 된다. 또 민지는 시간 순으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는 일연의 범주적인 기록에서 확인되는 불명료한 부분을 해소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이외에도 민지는 자장 생애의 통일적인 구성을 위해서, 일부 내용의 충돌양상을 개변하는 모습도 확인되고 있어 연구의 가치가 있다. The story of Jajangs trip to Chinese Wutaishan, his personal meeting there with Mañjuśri bodhi-sattva, and the teachings he received from Mañjuśri are not recorded in any Chinese documents, only in Korean ones. These Korean records are found in Ilyeons “Samgug Yusa” and Minjis “Odaesan Sajeoggi(五臺山事蹟記).” Arranged differently based on their unique viewpoints, Ilyeon and Minji included Jajangs story in their books as had been handed down to them in those days. Therefore, an analysis and review of the two records can give us a rather clear understanding about Jajang, as well as the viewpoints of Ilyeon and Minji and the difference in their arrangement of material based on this. Ilyeon arranged the material about Jajang from a categorical viewpoint. Mañjuśris teaching as recorded by Ilyeon can be roughly arranged into three parts: first, the sanctification of the Sila kings; second, Mañjuśri Avatamska(文殊華嚴) through the four phrases(四句偈) of Avatamska Sutra(華嚴經); third, establishment of Sila Odaesan. The sanctification of Sila kings is mentioned in the record about Hwangyeongsa, which can be understood as Ilyeon trying to make a joint justification for King Jinheung(眞興王) and Queen Seondeog(善德王). On the contrary, Minji organizes the entire biographical material of Jajang mainly in relation to his establishment of Sila Odaesan. Minji explains the origin of his records, which makes it easy for us to understand the text clearly and to study about Jajang. Furthermore, Minji reconstructs the events recorded chronologically. This helps in understanding the unclean portions of Ilyeons categorical records. Minji modifes a few conflicting affairs to bring about a coherent construction of Jajangs life. In this respect, his material is worth stu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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