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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Kim, Se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101 No.-
본 논문은 그 동안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던 식민지시기 부산지역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의 현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경남의 수산가공업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192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하여 1937년이 되면 32%를 차지했다. 이후 경남에서 부산의 수산가공액이 갖는 비중은 1940년을 전후해서 14%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런 하락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전반기 부산의 전체 수산어획고 중에서 수산가공품 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26% 수준을 유지할 만큼 수산가공업은 수산업 관련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한편 부산의 수산가공업 사업체들을 보면 공장은 1910년대와 1920년대, 주식회사와 합자 · 합명회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수산가공업와 관련된 수산조합은 1930년대에 각각 많이 세워졌다. 공장 형태의 수산가공업 회사로서는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 주력을 이루었다. 수산가공품 생산액의 각 시기별 민족간 비율을 보면 1920년대 전반까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산액 비율이 63% 대 37%로 일본인들이 앞섰다. 그러나 1935년이 되면 민족간의 격차는 일본인 53% 대 조선인 47%로 감소하고 있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조선인들의 수산가공업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수산가공업 공장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 것은 어묵공장과 재제염공장들이었다. 재제염공장은 영도에 많이 밀집하였는데, 영도에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일찍부터 생겼으며 조선업 관련 주물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산가공품 중에서 절반을 차지한 것은 통조림과 어묵 ‧ 튀김 ‧ 포(脯) 등이었다. 시기별로 보면 1920년대는 통조림이 1930년대는 어묵 · 튀김 · 포(脯) 등의 생산이 많았다. 이들 품목 모두 일본인들이 많이 생산하였으며 조선인들의 경우는 우뭇가사리(寒天)를 중심으로 해조류 생산이 월등히 앞섰다. 이들 해조류는 부산 영도와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제주해녀들이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5 역사와 경계 Vol.95 No.-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제가 전개한 식민지에서의 인적, 물적 자원의 총동원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의 제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특히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은 운동 차원에서 비롯되어 법에 의한 근로보국대로 수렴되고 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황이 더욱 불리해지고 일본마저 전쟁터가 되자 일제는 종래의 근로관계 5법령을 종합하여 隊조직과 개인까지 ‘몽땅’ 동원토록 했다. 이른바 정신 총동원에 의한 ‘근로봉사’에서 생산력 확충의 ‘근로협력’을 거쳐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물자의 조달과 국가총동원에 필요한 업무의 ‘근로동원’으로 귀결되었다. 학생 노동력 동원도 일반의 동원과 함께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일반인과 유사하게 근로보국대에 의해 동원되다가 학교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중등학교 이상 학교에 별도로 학교총력대를 두고 이를 통해 군사훈련과 노동력 동원에 종사토록 했다. 하지만 1943년부터 내려진 일련의 학생 동원조치들과 1944년 10월 ‘학도근로령’은 ‘근로가 곧 교육’이라는 교육이념 아래 학교보국대로 일원화하고 원칙적으로 1년 전체를 동원하도록 법제화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의 교육은 완전히 사라졌고, 1945년 전시교육령의 제정과 함께 준군사조직인 ‘학도대’로 귀결되며 병력 동원으로 이어졌다.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의 흐름은 경남지역에도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1938년 부터 중등학교 3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한 학교근로보국대는 점차 늘어났고 이후 국민학교까지 확대되어 1년 동안 수시로 식량 증산과 관련된 피뽑기, 종자채취 등의 작업에 집단 동원되었다. 한편 이 지역에서도 학교총력대가 결성되었고, 1943년부터 학도근로령으로 수렴되던 전쟁 말기에는 아예 학교에서의 수업을 포기하고 통년 동원으로 노동현장에 내몰렸다. 부산은 부두로 말미암아 군수물자의 결전수송을 위한 하역작업에 수시로 동원되었고 군수공장과 포대진지 구축사업 등에도 동원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후방 군사기지로서 비행장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비행장 건설에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