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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돈점 논쟁의 쟁점과 과제

        박태원(Park, Tae-won) 불교학연구회 2012 불교학연구 Vol.32 No.-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돈오돈수를 천명한 성철의 돈점론 이후 전개된 돈점 논쟁에서, 그 핵심 논점은 결국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지눌이 설하는 해오(解悟)로서의 돈오를 지해(知解)로 간주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지눌의 돈오를 화엄사상, 특히 성기사상에 의거한 원돈신해(圖頓信解)로써 파악하는 것은 충분한가?’가 다른 하나이다. 해오를 지해라고 간주하여 돈오점수를 비판하는 성철은, 그 논거를 ‘지눌의 돈오는 해오이고 그 해오는 화엄의 원돈신해 관법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데에서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해오와 지해의 차이를 주장을 사람들도, ‘지눌의 돈오는 화엄 원돈신해를 그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그의 돈오/해오는 화엄의 성기론적 이해를 담기 위한 것 혹은 그 결과’라는 관점을 널리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지눌의 돈오/해오를 화엄의 원돈신해와 등치시킨다는 점에서는, 성철은 물론 대다수 지눌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결국 ‘해오(解悟)/지해(知解)/해애(解碍)’를 동일시하는 성철의 견해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화엄적 해오가 지해인가 아닌가?’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게 된다. 해오와 지해의 차이를 주장하는 견해들은 ‘화엄적 원돈신해가 단순한 지해와는 다르다.’고 할 것이고, 성철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차이를 부여해 보았자 본질적으로 지해 범주를 못 벗어난다.’고 공박할 것이다. 돈오점수에 대한 성철의 비판으로 전개된 돈점 논쟁에는 그 핵심 논점을 둘러싸고 혼란이 존재한다. ‘지눌의 돈오는 화엄적 해오이다’라는 명제를 공유하고 있는 기존의 돈점 논쟁에는 아직 해소되지 못한 논리적 혼란과 기술(記述)의 모호함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눌의 돈오점수를 수긍하여 옹호하려는 관점들에서 그러한 문제점이 부각된다. 해오와 지해의 차이를 설정하면서도 그 차이의 내용을 의미 없는 수사적 어법으로써 대체하는 모호함이 있고, 돈오/해오와 지해의 차이를 주장하면서도 돈오/해오의 내용을, 지해의 해애(解碍)를 지닌 화엄의 원돈신해로써 채우고 있는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돈점 논쟁을 다루는 틀과 방식을 바꾼 새로운 독법이 요청된다. 돈점 논쟁의 핵심 논점을 둘러싼 모호함과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독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새로운 독법의 구성은 기존의 논의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 명제들을 재검토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특히 ‘지눌의 돈오는 화엄의 원돈신해적 해오’라는 명제를 재검토해야 한다. 만약 이 전제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면 논의의 틀 자체를 바꿀 수 있고, 그 결과 지눌의 선사상, 그의 돈오점수와 성철의 돈오돈수, 돈점 논쟁의 의미, 간화선의 의미, 불교 수행론 등, 연관된 모든 주제들을 재음미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된다. The point of dispute on the Suddenness-Gradualness dispute(頓漸論爭) is to be condensed in two questions; One is “Is it reasonable to regard the Chi-nul’s(知訥) sudden enlightenment(頓悟)/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as intellectual understanding(知解)?”, and the other is “Is it sufficient to see Chi-nul’s(知訥) sudden enlightenment(頓悟) as Wha-um’s WonDonSinHae(圓頓信解)?” The Suddenness-Gradualness dispute(頓漸論爭) having the proposition that ‘Chi-nul’s(知訥) sudden enlightenment(頓悟) is 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in common has some logical inconsistency and descriptive ambiguity. Especially the supporters’view of Chi-nul’s(知訥)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practice(頓悟漸修) show the logical inconsistency and descriptive ambiguity in that they argue the difference between 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and the intellectual understanding(知解), and assert that 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is Wha-um’s WonDonSinHae(圓頓信解) which has the hindrance of intellect simultaneously, And their descriptions of the difference between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and intellectual understanding(知解) are vague and meaningless. In order to solve the confusion and to read the Suddenness-Gradualness dispute(頓漸論爭) newly, a different way of reading is to be constructed. To form the new way of reading, the proposition that ‘Chi-nul’s(知訥) sudden enlightenment(頓悟) is the Wha-um’s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must first be reconsidered.

      • KCI등재

        돈점 논쟁의 독법 구성

        박태원 새한철학회 2012 哲學論叢 Vol.69 No.3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는 성철의 돈오돈수 주장 이래 전개된 돈점 논쟁의 핵심 논점은, 내용상 상호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눌이 설하는 해오(解悟)로서의 돈오를 분별 알음알이인 지해(知解)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이고, ‘지눌의 돈오를 화엄사상, 특히 성기사상에 의거한 원돈신해로써 파악하는 것은 충분한 가?’가 다른 하나이다. ‘지눌의 돈오는 화엄적 해오이다’라는 명제를 공유하고 있는 기존의 돈점 논쟁에는 논리적 혼란과 기술(記述)의 모호함이 내재하고 있다. 특히 지눌의 돈오점수를 수긍하여 옹호하려는 관점들에서 그러한 문제점이 부각된다. 해오와 지해의 차이를 설정하면서도 그 차이의 내용을 의미 없는 수사적 어법으로써 대체하는 모호함이 있고, 돈오/해오와 지해의 차이를 주장하면서도 돈오/해오의 내용을, 지해의 해애(解碍)를 지닌 화엄의 원돈신해로 채우고 있는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돈점 논쟁에 내재한 혼란을 해소하고 돈점 논쟁을 새롭게 읽기 위한 독법의 구성이 요청된다. 필자는 그 새로운 독법의 구성조건으로서 ‘언어와 분별의 관계’ ‘분별의 통로’ ‘분별 극복의 방식’을 주목하였다. 선종 선문을 비롯한 모든 불교전통의 관심은 결국 ‘분별로부터의 해방’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 돈점 논쟁의 주역인 선종 선문이 주창하는 돈오 견성의 관건도 결국에는 ‘분별’ 여부에 있고 성철의 지눌 비판 논거인 ‘지해(知解)/해애(解碍)’도 분별을 특징으로 하는 앎/이해라는 점, 그리고 분별과 지해는 결국 언어를 떠나 논할 수 없는 ‘언어의 문제’라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는 ‘언어와 분별문법의 형성’ ‘분별의 두 가지 통로 - 이해/관점에 의한 분별과 마음에 의한 분별’ ‘분별 극복의 두 가지 방식과 언어 - 혜학적 방식과 정학적 방식’의 문제를 불교적 사유로 다루어 보았다. 이렇게 해서 구성된 독법으로 돈점 논쟁을 읽으면, 지눌의 돈오가 혜학과 정학의 두 가지 맥락에서 펼쳐진다는 것, 그의 돈오는 두 지평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구별하여 접근해야 한다는 관점을 수립할 수 있는 동시에, 돈점논쟁을 다루는 틀과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아울러 지눌의 선사상, 그의 돈오점수와 성철의 돈오돈수, 돈점 논쟁의 의미, 간화선의 의미, 불교 수행론 등, 연관된 모든 주제들을 재검토/재음미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The Suddenness-Gradualness dispute(頓漸論爭) having the proposition that ‘Chi-nul(知訥)’s sudden enlightenment(頓悟) is 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in common has some logical inconsistency and descriptive ambiguity. Especially the supporters’ view of Chi-nul(知訥)’s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practice(頓悟漸修) show the logical inconsistency and descriptive ambiguity in that they argue the difference between 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and the intellectual understanding(知解), and assert that 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is the Wha-um’s WonDonSinHae(圓頓信解) which has the hindrance of intellect simultaneously. And their descriptions on the difference between the intellectual enlightenment(解悟) and the intellectual understanding(知解) are vague and meaningless. In order to solve the confusion and to read the Suddenness-Gradualness dispute(頓漸論爭) newly, a different way of reading is to be constructed. To form the new way of reading, I set forth ‘language and the formation of dividing grammar’ ‘the two way of dividing - dividing by understanding/view and dividing by mind’ ‘the two overcoming methods of dividing and language - the method of wisdom practice(慧學) and the method of concentration practice(定學)’ upon the Buddhist philosophy. This new way of reading the Suddenness-Gradualness dispute(頓漸論爭) is to open a new way which can re-investigate and re-appreciate Chi-nul(知訥)’s Seon(禪) philosophy, his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practice(頓悟漸修) and Sung-chul(性徹)’s sudden enlightenment and sudden practice(頓悟頓修), the meaning of Suddenness-Gradualness dispute(頓漸論爭), the meaning of Gan-wha-seon(看話禪), and the practice theory of Buddhism.

      • KCI등재

        退翁 性徹의 頓悟頓修 思想

        都大玄 한국불교학회 2008 韓國佛敎學 Vol.50 No.-

        In the Seonmun-jeongro, Seong-cheol insists, for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Korean Seon, that the basic purport of Seon school lies in Sudden enlightenment-sudden cultivation(頓悟頓修). He defines Sudden enlightenment-sudden cultivation as becoming Buddha by achieving Ultimate Enlightenment. Enlightenment, for him, is always ultimate enlightenment. But most of Korean Buddhist scholars criticized his opinion seriously and Seong-cheol's standpoint has not been accepted in Korean Buddhist academic world. The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sudden cultivation leaved a big footmarks in the history of Chinese Seon school. It is based on the philosophy of sixth patriarch Hui-neong and the mindlessness of Patriarch Seon. Master Seong-cheol emphasizes mindlessness on the basis of the Middle path especially. Since Korean Seon has followed the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gradual cultivation(頓悟漸修) of Master Bojo, it has not given serious consideration to mindlessness. From the viewpoint of Seong-cheol Seon, Sudden enlightenment-gradual cultivation is incomplete theory of Enlightenment. Nevertheless, it has been regarded as a guiding principle of Seon practice for last over 8 hundred years of Korean Seon. It can be said that the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gradual cultivation is an intellectual misunderstanding and makes us stop cultivation on the way to the ultimate enlightenment. Therefore Seong-cheol criticized the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gradual cultivation strongly, and expounded the true meaning of ultimate Enlightenment which can be attained only through Sudden enlightenment-sudden cultivation. As Seong-cheol insisted, if we change the term Sudden enlightenment-gradual cultivation to Intellectual awakening-gradual cultivation, there can be two different and compatible standpoint of enlightenment and cultivation, that is, Sudden enlightenment-sudden cultivation and Intellectual awakening-gradual cultivation in Korean Seon Buddhism. 性徹은 『禪門正路』를 통해 韓國禪宗史에서 처음으로 선종의 근본종취는 ‘頓悟頓修’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돈오돈수란 ‘단박 깨침과 단박 닦아 마친다’는 뜻으로, 한번 깨치면 부처가 된다[見性成佛]는 것과 깨침이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완전한 究竟妙覺이라고 정의한다. 그러 나 한국불교계 많은 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였고, 아직도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중국선종계에서는 큰 발자취를 남긴 ‘中道에 입각한 돈오돈수사상’은 六祖 慧能의 돈오돈수사상인 동시에 祖師禪의 無心思想이다. 性徹은 이 가운데 특히 중도를 근간으로 한 무심사상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 이유는 韓國禪에서는 普照 知訥의 頓悟漸修說로 인해 無心에 소홀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미완성 견성이론’이라 할 수 있는 돈오점수설이 지난 8백여 년간 수행지침으로 지켜져 온 것은 한국선불교의 큰 과오라고 볼 수 있다. 解悟를 究竟覺으로 착각하기 쉬운 돈오점수설은 見性의 과정인 중간단계에서 수행을 그만 둘 수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性徹은 ‘頓悟’의 정체를 분명히 하기 위한 과정에서, 돈오점수비판이 요구되었던 것이며, 古佛古祖의 經論과 語錄을 바탕으로 하여 잘못된 한국선불교의 見性觀을 바로잡으려는 것이 그 본질이다. 性徹의 주장처럼 만약 ‘頓悟漸修’라는 용어대신 ‘解悟漸修’로 고쳐 쓰기만 한다면 한국선불교사에서 깨달음을 보는 시각이 서로 다른 두 이론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KCI우수등재

        선사상에서 해오(解悟)의 함의

        마해륜 불교학연구회 2023 불교학연구 Vol.74 No.-

        성철에 의해 촉발된 돈점논쟁에서 해오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담론이이루어졌지만, 해오와 증오의 본질적 차이에 대한 의문은 제기되지 않았다. 선불교의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해오와 증오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이해와 분별(해오) 안에서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 해오/증오를 분별의 여부나 시간적 선후관계로 접근하는 대신, 깨달음의 체험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마음 변화의 두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증오는 구경에 도달하는 순간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반대로 ‘이미 완전하게 갖추어진 지각능력’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전제이자 출발점이다. 증오가 즉각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이미 우리 안에 완결된 상태로 갖추어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경우 증오는 갖춤의완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시작이기도 하고, 해애(解碍)의 종식이라는 측면에서는 구경이라고 할 수 있어서 양가적이다. 증오는 해오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체험이며둘은 완전하게 별개는 아니다. 증오는 먼 미래의 최종목표가 아니라 해오의 해체적과정이며, 해오를 범주화하지 않게 하는 메타포다. 해오는 이해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지시한다. 의미체계 안에서 인식 전환의 체험이 해오의 함의다. 그러나 해오는 단지 특정한 의미에대한 언어적 깨달음”이 아니라 “어떠한 언어적 이해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메타적이해를 포함하는 깨달음이다. 한편 증오는 마음 변화의 해체적 측면을 지시한다. 이미 구성된 마음을 실재라고 여기지 않고 해체하는 순간이 증오이며 이 계기는 영원한 미래로 연기되지 않고 모든 현재의 순간에서 실현된다. 해오와 증오는 마음의 전환 과정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가지 측면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 KCI등재

        性徹禪師的“頓悟頓修”与中國禪學韓國化

        위도유 한국선학회 2018 한국선학 Vol.0 No.51

        This paper is an analysis of the Chan doctrines of Sungchul (性徹) , written in his Seonmunjeongro (禪門正路) . Sungchul gave the most importance to sudden enlightenment (頓悟) , and denied intellectual enlightenment (解悟) . He completely confronted the meditative and doctrinal , but this was not mainstream in Chinese Chan thoughts . In this paper , I considered Sungchul ’ s Chan thoughts as the inculturation of Chinese Chan thoughts in Korea . Also I think that his Chan thoughts can provide an example for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Chinese Buddhism . 본문은 『선문정로 (禪門正路) 』에서 논술되는 성철선사의 돈오돈수 학설을 분석하는 것이다. 성철선사는 견성 (見性) 의 모든 내용을 돈오 (頓悟) 에 부여하고, 돈오를 선문의 유일한수행 목적으로 삼아, 해오 (解悟) 의 경계, 가치, 그리고 작용을 철저히 부정했다. 그래서 교문과 선문을 완전히 대립시켰다. 이는 중국 선종사에서는 주류적인 사조가 아니었다. 이 논문에서는 성철 선사의 선사상을 선학의 한국화라고 보았다. 그의 선학은해오의 편향된 경향을 바로잡는 데 매우 강조점을 두고 있다. 성철 선사의 선사상은현대 중국 선사상의 발전에 본보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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