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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1876~1910) 조선의 아편확산과 청국 상인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0

        During more than a century after Opium War the opium raised a serious problem in chinese society. Over chinese border opium had an evil influence on neighboring Joseon. In Joseon the inflow and spread of opium began as soon as ports were opened. Especially chinese merchants related to the inflow and spread of opium from 1882 upward, when economic relations and trade between the two countries were active. Throughout the nineteenth century China was having a serious social problem caused by opium. The two country, Joseon and Qing, maintained the close exchange each other and were border countries. So there was hige probability of opium's inflow into Joseon by China. After opening port the opium problem of Joseon reached a serious standard by interchange between two countries, Joseon and Qing, though the government of Joseon took warning. At first glance, it was expected that the serious situation of opium spread occurred by illegal activities of chinese merchants taking advantage of consular jurisdiction when they gained through regulations for maritime and overland trade between Chinese and Korean subjects in 1882. Actually the curse of opium occurred after the Sino­Japanese War. Especially after treaty for commerce between Korea and Qing in 1899 as bilateral consular jurisdiction was maintained and a lot of chinese people such as small merchants and coolies moved to Joseon, most of them engaged in illegal activities referring to opium. As a result around 1910 opium spreaded across the nation. the main culprit of opium diffusion was chinese merchants. With this negative recognition on chinese people was stamped on korean. That affected the exclusion of overseas chinese in japanese colonial era. 아편전쟁 전후 이래 100여 년 동안 중국사회에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했던 아편문제는 비단 중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이웃한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아편유입과 확산은 조선이 개항되면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1882년 이후 활발해진 청국과의 경제교류 속에서 청국 상인과 관련이 깊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선의 아편유입 및 확산과 청국 상인과의 관련성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조선의 아편유입 및 확산과 청국 상인과의 관계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동아시아 최대 강국인 청조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외세의 침략보다는 아편의 유입을 더 경계하였다. 조선정부는 연행사절을 통해 아편전쟁 전후 이래 중국의 아편문제와 아편전쟁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청조가 1,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사실에 대해 조선정부는 당초 위기감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위기의식을 가급적 축소하여 감추고자 하면서 위기의식은 점차 완화되었다. 그러나 아편문제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청조와 국경을 접한 조선에 영향을 미칠 것에 대해 크게 우려하였다. 이에 따라 아편전쟁 이후는 물론 1876년 이래 조선정부는 각국과의 개항 과정에서도 아편의 유입 및 판매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882년 조선정부와 청정부 간에 조청무역장정이 체결되고, 이어서 1899년 대한제국과 청정부 간에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아편의 유입 및 판매가 우려되었다. 조청무역장정 체결 당시 이미 중국에서는 아편이 합법화되어 사회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중국인들은 아편의 해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청무역장정을 통해 청국 상인들이 개항장은 물론 한성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내지에서의 상업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의 북부 국경지대인 의주와 회령에서도 수시로 교역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아편의 유입 및 판매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더욱이 중국인과 관련된 사건에서 원피고 여부를 불문하고 단독 혹은 공동으로 영사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아편범죄가 더욱 우려되었다. 아울러 청일전쟁 이후 1899년에 대한제국과 청정부 사이에 체결된 한청통상조약이 비록 불평등성이 완화된 조약이었지만 쌍무적인 영사재판권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청국 상인들의 불법을 차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청무역장정의 우려와는 달리 청일전쟁 이전 청국 상인들을 통한 조선으로의 아편유입 및 판매는 의외로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조청무역장정 체결 이후 한성과 개항장에 들어온 청국 상인들은 청정부나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로 대체로 정상적인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유력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조선의 언론 등에서도 청국 상인에 의한 아편유입 및 판매와 관련된 기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에서의 청국의 위세 등을 감안해 볼 때 청일전쟁 이전 조선의 언론 등에서 청국 상인들의 아편 관련 기사가 없다고 해서 조선에서 청국인의 아편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청일전쟁 직후 여러 언론과 재판문서 등에 청국 상인들의 아편판매 폐단에 관한 내용들이 제기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렇다.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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