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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林川郡 城隍祠와 庾黔弼

        김효경(Kim, Hyo-gyoung) 한국역사민속학회 2008 역사민속학 Vol.- No.26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위치한 成興山城 안에 고려 太師 庾黔弼을 모신 사우가 있다. 이 사우는 고려시대로부터 행정관청에서 주관하던 城隍祠로 추정된다. 임천군은 통일신라시대로부터 국가 祀典의 하나인 小祀의 제장으로 인식되어 종교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금강의 주요 물길과 직접 연결되어 군사적, 행정적 요충지로 백제시대로부터 부각되었다. 이러한 토대 속에 고려의 후 삼국 통일 후 요구되는 사회적인 욕구 즉 지역 내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후백제의 극복이라는 정치적 측면까지 복합되면서 유금필이라는 인물이 신령으로 좌정하게 된다. 후백제의 잔당의 횡포로 인해 피폐해진 지역사회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역의 신령은 인간적인 치적보다는 종교적인 심성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많은 지역에서 실존인물이 신령으로 좌정하는 경우에 그의 역사적 인물평이나 공적 보다는 지역민에 대한 선행이 원인이 되었다. 유금필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주신으로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성에 대한 진휼, 즉 사회적으로 가장 절실한 문제를 극복해준 존재였기에 신령으로 탄생된 것이다. 유금필을 모신 성황사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존속되었다. 『東國輿地勝覽』(15세기 중반)에는 백제 때 축성된 성흥산성 안에 위치했다. 그러나 『與地圖書』(18세기 중반)에는 산성 밖으로 옮겨지고 건물로 이루어진 성황사에서 제단의 형태인 성황단으로 바뀐다. 『湖西邑誌』(19세기 후반)에 수록된 지방도에 성황사와 성황단 모두 표기되어 있다. 산성 안의 성황사에는 유금필 태사가 모셔져 있는데, 주민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숭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황단이 건립된 후에도 여전히 성황사가 존속했으며, 그 신당의 主神은 여전히 유금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성흥산성 안의 유금필 사당은 고려시대로부터 조선후기까지 줄곧 관치제가 베풀어지던 성황사이며, 그 주신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태사직을 수행한 유금필이다. 현재의 사당 안에는 유금필과 더불어 그 가족이 신령으로 봉안되어 있다. 부인을 비롯하여 아들 1명, 딸 2명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것은 실제의 가족관계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부모와 아들, 딸로 구성된 조화로운 가족구성원은 화평하고, 안정된 가정의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신령의 존재는 결국 화평과 안정을 이끄는 존재로 간주되며,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군민들은 그러한 신령의 영향속에서 동일한 화평의 세계를 맞게 된다. 이처럼 신령으로 탄생된 유금필은 그가 지닌 인간적인 武人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주민의 어려움을 돌보고, 지역을 돌보는 자애로운 성격을 지니게 된다. 부인을 비롯하여 아들과 두 딸을 거느린 여느 가정의 가장처럼 고을의 좌장이 되어 지역신으로 숭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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