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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촌 심언광의 북방 경험과 국방 개선안

        박도식(Park Doh-Sik) 한일관계사학회 2014 한일관계사연구 Vol.48 No.-

        조선의 서쪽에 있는 평안도는 서북쪽으로 압록강 건너 울창한 산림을 경계로 여진과 맞닿아 있었다. 평안도의 지리적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압록강 건너의 여진은 태종 이후 주로 평안도의 江界등 이른바 7읍으로 침입해 왔다. 평안도 군사들은 거의 대부분 변경에서 방수했기 때문에 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던 평안도 군사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赴京使臣들을 迎送하는데 따른 폐단이었다. 이에 평안도 백성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압록강 너머의 중국으로 도망가기도 하였고, 奴婢가 되거나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며, 말단 관속인 衙前등 신분의 우열을 가릴 것 없이 좀더 편한 처지를 택하여 옮겨갔다. 어촌은 도첩으로 승려를 금하는 것은 말단적인 방법이므로 王政과 禮敎를 잘 시행하여 교화가 천하에 가득하면 불교는 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고, 평안도 감영의 아전들은 도망하여 없어진 戶의 군역과 旅外正兵을 나누어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평안도 백성들은 군역 이외에도 貢物?進上物등의 조달과 노역이 심히 과중하였다. 어촌은 백성이 한 가지 공물이라도 바치지 못하면 뼈골까지 우려낸다고 하였고, 노역이 무거워 한 사람이 도망가면 그 피해가 한 가족에 미치고 한 가족이 도망가면 또 한 가족의 친족에까지 미치기 때문에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쳐 흩어졌다고 하였다. 당초 국가에서는 군사에게 諸부담을 담당할 수 있도록 保人을 배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토목?수리 공사의 일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보법실시 후 군액이 크게 늘어나 별도로 요역담당자를 찾기가 어렵게 되자 군사를 바로 요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정병은 복무기간 중에도 일정한 代價를 납부하고 귀가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代立’이었다. 중종대에는 군역의 代立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어촌은 중종 31년(1536)평안도경변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중종을 인견하며 그가 목도한 평안도의 군사문제에 대해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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