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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충청도 조운제도의 변화와 금강 일대 군현의 세곡운송

        문광균 한국사연구회 2022 한국사연구 Vol.- No.198

        충청도의 조운제도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성종과 중종 연간을 거치며 조운제도가 완비되었다. 그러나 17세기를 전후하여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조운선과 조군을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조선왕조는 사선(私船)이라 불리는 서울의 경강선이나 지방의 지토선을 활용하여 지방의 세곡을 상납하였다. 이를 직납(直納) 또는 직상납(直上納)이라고 한다. 직납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중 충청도의 직납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충청도에서 세곡을 직납하던 지역은 서해안과 금강 일대 군현이었다. 이 서해안과 금강 일대 군현이 직납을 하기 위해서는 세곡을 적재할 선박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지토선이 적었을 뿐 아니라 경강선주를 유인할 수 있는 여건도 부족했다. 경강선주들은 선박을 임대해주고 받는 임대료 즉, 선가(船價)에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충청도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비해 선가가 낮았다. 따라서 경강선주는 충청도의 세곡 운송을 회피하였고, 이로 인해 홍주 등 일부 지역에서는 바다에서 경강선을 강제로 잡는 착선(捉船)을 자행하기도 했다. 결국 조선왕조는 안정적으로 재원을 조달하고자 작대제(作隊制)를 실시하고, 경강선을 선계(船契)로 조직하고 충청도의 세곡운송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정조대 등장한 주교사의 주교선이 작대제와 결부되면서, 19세기 충청도 직납 군현의 세곡은 주교선이 전담하였다. 충청도 금강 일대에 위치한 11개 군현은 모두 주교선의 활동 무대였다. 각 군현에서는 금강 변에 강창과 해창을 설치하고, 경내에서 수취한 세곡을 집적하였다. 그러면 서울에서 주교선이 내려와 세곡을 운송해갔다. 주교선에는 감관, 색리, 선주, 격군 등 14명의 선원이 탑승했다. 이 중 감관과 색리는 세곡을 납부하는 군현에 거주하는 인물들이었고, 선주와 격군은 서울 용산 등지에 거주하던 한강민들이었다. 금강에서 출발한 주교선은 30일 정도 항해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와 같이 금강을 무대로 활동하던 주교선 중심의 세곡운송방식은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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