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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중 악인(樂人)의 음악 연습과 『악장요람(樂章要覽)』

        이정희 ( Lee Jung-hee ) 한국공연문화학회 2021 공연문화연구 Vol.- No.43

        『악장요람(樂章要覽)』은 악장의 요람, 즉 악장 중에서 중요한 내용만 뽑아 간추려 놓은 책이라는 의미이다. 전반부에는 악장(樂章)이, 후반부에는 악보(樂譜)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렇게 이원화된 체재는 정조대에 구축된 것이다. 필체와 수록된 가사의 작성된 시기를 통해 『악장요람』은 1809년 즈음에 작성된 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즉, 총 네 단계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다양한 필체와 수정한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곧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음을 의미하니, 『악장요람』의 표지 뒷면에 여러 자취가 남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반부의 악장은 제례 절차를 기준으로 그에 수반되는 악곡명과 가사를 제시하는 방식이며, 특히 노랫말을 한문과 한글음으로 병기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였다. 후반부의 악보는 제례 절차를 준수하되 중복되는 선율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음악을 기준으로 구성하였고, 율명ㆍ한문가사ㆍ가야금과 거문고의 격도지법ㆍ점(‘ㆍ’, ‘ㆍ’)과 같은 기호를 사용하여 궁중음악을 담아냈다. 이러한 구도는 제례의 구조 이해와 제례의 의미를 글로 담아 놓은 악장을 숙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한문과 병기된 한글음을 보면서 정확하게 노랫말을 익히게 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형태라고 하겠다. 의식 절차와 딕션을 선행한 후 전체적으로 음악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연습했던 방향성이 악장과 악보를 수록하는 방식에 투영된 셈이다. 이러한 수록 방식은 악인의 음악교육과 음악연습의 효율성을 높이는 장치였다. 수록곡들의 특징은 우방(右坊)의 향악기 전공자로써 익혀야 할 필수악곡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악장요람』의 표지 뒷면에서 김형식(金亨植)이라는 이름이 주목되니, 순조대에 효명세자가 기획한 궁중연향에서 무동(舞童)과 대금차비(大笒差備)로 활약했던 그의 이력을 통해 우방의 향악기 전공자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악장요람』의 수록곡은 김형식과 같은 우방의 향악기 전공자들이 평소에 연습하고 현장에서 연주하던 핵심 레퍼토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악장요람』은 궁중악인의 일상이 담긴 ‘음악 연습 책자’였던 셈이다. 요컨대 『악장요람』은 주요 의례에서 노랫말을 정확하게 발음하면서 가창할 수 있게 악인을 교습시키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책자로, 정조의 아이디어로 ‘악장+가보(歌譜)’의 체계를 갖출 수 있었으며, 순조대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정재를 공연했던 무동으로 맹활약한 김형식이 소장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우방의 향악기 전공자이기도 했던 악공 김형식의 이름이 남아있는 데에다 이후 여러 악인들이 시대의 변화를 투영하여 수정하면서 활용했다는 실용성에서, 궁중음악을 전승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과 시간을 보냈던 궁중 악인의 노정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kjang yoram 『樂章要覽』 is a book that summarizes only the important contents from the Akjang 樂章. Akjang 樂章 is arranged in the first half, and score 樂譜 is arranged in the second half. It seems that Akjang yoram 『樂章要覽』 passed through a total of four stages through the time when the handwriting and the lyrics were written. The presence of various handwriting and traces of modifications means that it has been passed through by several people, so it is not unrelated to the fact that several traces remain on the back of the cover of Akjang yoram 『樂章要覽』. The first part of the Akjang 樂章 is a method of presenting the name and lyrics of the accompanying music based on the ritual procedure, and in particular, the lyrics are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and Hangeul sounds to improve readability. The score in the second half complies with the ritual procedures, but boldly omits overlapping melodies, and is composed based on the music, and various symbols are used to capture the expression of court music. This structure is a reflection of the direction we practiced to harmonize with the music after prior ritual procedures and diction. This was a device to increase the efficiency of music education and music practice for the court musician. The characteristics of the musical pieces are that they consist of essential musical pieces that must be mastered as musicians. In addition, the name Kim Hyung-sik 金亨植 is noted on the back cover of Akjang yoram 『樂章要覽』, and he was a court musician who was active in the age of King Sunjo 純祖. In other words, the musical pieces included in Akjang yoram 『樂章要覽』 are the core repertoire played by court musicians like Kim Hyung-sik 金亨植. Akjang yoram 『樂章要覽』 is a 'music practice booklet' containing the daily life of court musicians. Akjang yoram 『樂章要覽』 is a booklet designed for the purpose of teaching the court musicians to sing while correctly pronouncing the lyrics in major ceremonies. It is even more noteworthy in that Kim Hyung-sik 金亨植 was an owner. In addition to the fact that Kim Hyung-sik’s name remains, and in the practicality of being used by various court musicians reflecting and modifying the changes of the times, it is meaningful in that it contains the path of court musicians who spent a lot of time and time to transmit court music.

      • KCI등재

        현행 낙양춘의 형성과정 연구

        오비로 ( Oh Beero ) 한국음악사학회 2019 한국음악사학보 Vol.62 No.-

        “낙양춘”(洛陽春)은 현전하는 유이한 당악곡(唐樂曲)이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송(宋)나라의 사악(詞樂)으로 고려 때 전해져 전승과정 속에서 변하여 현재에 이른다”는 등의 구체성이 없는 서술을 사용한다. 본고에서는 그 “낙양춘”의 형성과정이 어떠한 지를 설명코자 “낙양춘”의 선율이 전하는 모든 문헌(악보)들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격적인 형성과정 이전에 고악보들의 시기 순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악장요람』(樂章要覽)의 점(·)단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래서 점(·)이 ‘대금(大笒)의 숨구’임을 앎과 동시에 『樂章要覽』의 “낙양춘”이 1음1박이 아니라, 각기 고유한 시가를 지닌 음악이며, 이것이 『속악원보』(俗樂源譜) 권4의 “낙양춘”과 동일한 음악임을 알았다. 이를 통하여 『樂章要覽』(순조)―『俗樂源譜』 권4(고종)―『俗樂源譜』 권6(일제강점기)의 순서임을 알게 되었다. 형성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악곡명의 변화는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 및 권6 모두 “낙양춘”이라고 쓰고 있으나, 『아악부악보』(雅樂部樂譜)·『아악생교과철』(雅樂生敎科綴)·『이왕직아악부오선악보』(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 일명 “기수영창”)으로 바뀌고, 부수적으로 괄호 속에 (“낙양춘”)이라고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 형태로 변하였다. 해방 이후 1970년대에도 “낙양춘”을 표기했으나, 여전히 “기수영창지곡”을 원제(原題), “낙양춘”을 부제(副題)로 표기했고, 2007년부터 “낙양춘”을 원제, “기수영창”을 부제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악기편성은 악보를 통하여 나타난 것들만 다뤘다. 『俗樂源譜』 권4에서는 장고점(杖鼓點)이 있어 장구가 편성됐음이 명확하다. 그런데 『俗樂源譜』 권6부터 장구가 등장하지 않았고, 이는 『雅樂部樂譜』도 마찬가지였다.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아악기인 절고(節鼓)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가 해방 이후부터 민간악기인 좌고(座鼓)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1978년에 장구를 다시 편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2007년 이후 사용하지 않는다(교습본인『樂章要覽』과 『雅樂生敎科綴』 제외). 이 외에 일제강점기에 보이지 않던 방향(方響)과 박(拍)이 해방 이후부터 다시 편성되었고, 노래가 추가되었다. 선율선의 변화 없이 음고(音高)의 교체가 있었다. 먼저 주요 5음이 아닌 2음에서 나타난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6의 ‘姑·無’, 『俗樂源譜』 권4의 ‘夾·應’이 『雅樂部樂譜』에 이르러 각 악기보에 혼재되어 불협화음을 이루다가 『雅樂生敎科綴』을 거쳐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 이르러 다수결에 의해 ‘姑·應’으로 통일되었다. 주요음 중에서는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4, 권6 모두 ‘太·仲·太·黃’이었던 악구가 『雅樂部樂譜』에서 ‘太·林·太·黃’ ’(鐘磬·大笒· 唐笛·牙箏), ‘太·南·太·黃’(觱篥), ‘太·太·黃’(奚琴)으로 나뉘어 변하였다. 『雅樂生敎科綴』에서는 ‘太·南·太·黃’으로 나타나 다수결에 의해 ‘太·林·太·黃’으로 통일 및 연주된 것이 보였고,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주선율인 당필률·대금은 ‘太·林·太·黃’, 종경·해금·아쟁은 ‘太·太·黃’으로 정리됐다. 『雅樂部樂譜』부터 삽입음이 나타났는데 이는 어떤 악보에서도 문헌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었고, 음악적으로도 의도하지 않은 불협화음을 만들거나 절주를 맞지 않게 하는 방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낙양춘”이 전승된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는 재연(再演)이라기보다 창작(創作)이고, 이러한 형태의 창작은 훼손이다. 이후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이 삽입음들이 통일되었는데, 주선율인 당피리·대금은 가장 삽입음이 많은 『雅樂部樂譜』의 당적보(唐笛譜)로, 종경은 종경보(鐘磬譜), 해금·아쟁은 아쟁보(牙箏譜)로 선택되었다. 이들이 절주(節奏)를 맞추는 것은 주선율이 삽입음을 연주할 때 나머지 악기가 쉬거나 본음을 지속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삽입음들은 반드시 본음(本音)의 앞에만, 반드시 본음보다 음고(音高)가 위였다. 이러한 특징이 해방 이후 전승악보집 시리즈의 악상기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했다.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까지는 각 음이 고유한 시가(時價)를 가졌고, 『俗樂源譜』 권6부터 현재까지 1음1박이다. 다만 『俗樂源譜』 권6은 1음1박만 나타나고, 그 1박이 3분박인 것은 『雅樂部樂譜』부터 시작되는데, 명시(明示)가 아니라 암시(暗示)되어 명확하지 않다. 또한 『雅樂部樂譜』부터 본음끼리 결합, 본음과 삽입음의 결합이 시작되어 1/3-2/3박, 2/3-1/3박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역시 명시가 아니라 암시였다. 3분박이라는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근거는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 이후에 찾을 수 있었다. 환입(還入)은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 권6까지는 모두 명기되었다. 그러나 『雅樂部樂譜』에서는 『俗樂源譜』 권6과 같은 위치에 종경(鐘磬)·필률(觱篥)·아쟁보(牙箏譜) 3종에서만 점(·)이 작게 찍혀있었고, 『雅樂生敎科綴』에도 환입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필기만이 있었다.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아예 환입이 사라지고, 환입이 시작음인 南으로 음악이 끝났다. 해방 이후에는 1978년부터 다시 환입이 원래의 위치대로 연주된다. 이상을 종합하면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4의 조선조 “낙양춘”과 『俗樂源譜』 권6의 “낙양춘”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 『俗樂源譜』 권6에서는 1음1박화라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고, 이후 『雅樂部樂譜』―『雅樂生敎科綴』―『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를 거치며 일어난 음고의 교체 및 결합, 그리고 근거없는 음의 삽입과 악기군에 따른 선율의 분화 등이 현행 “낙양춘”의 형성에 중대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는 전승과정 속에서가 아니라 재연과정, 더 엄밀히 훼손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낙양춘”을 설명할 때 “전승과정 속에서 변하였다”는 서술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행 “낙양춘”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俗樂源譜』 권6과 1929~31년경(『雅樂部樂譜』)부터 1936~39년경(『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까지 일제강점기 약 10년 안팎의 세월동안 변화를 겪었고, 최종적으로 1936~39년경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완성됐다. 이후에는 선율적인변화 없이 환입의 재사용, 편성에 방향과 박을 추가, 노래선율의 추가 등만 있었다. “Nagyangch'un” 洛陽春(Spring in Lo-yang, Lo-yang-ch'un in Chinese) is the only two of remained tangak 唐樂(Chinese-derived music), though its importance, use exp lanation without concreteness such like “As one of Song 宋 saak 詞樂(music for poe try of Sung China, tz'u-yueh in Chinese) delivered during Koryo 高麗 dynasty, “Na gyangch'un” has changed with the process of transmission until today.” This study ex amined for concrete describing the formation of “Nagyangch'un” by reviewing all the existing documents that contained the melody of “Nagyangch'un”. First of all, it needs to clear the period of documents that examined the paragraph of dots(·) in Akchang yoram 『樂章要覽』. The dot(·) was breathing marks for the taegum 大笒 and each tone in the Akchang yoram has its own rhythm, not one-tone one-beat music. Therefore “Nagyangch'un” in the Akchang yoram and the fourth volum e of Sogak wonbo 『俗樂源譜』 were the same music. The followings are the features that are founded. The name of “Nagyangch'un” du ring Choson 朝鮮 dynasty was “Nagyangch'un” and wrote by itself on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however, it changed to “Kisu yongch'ang chigok” 旣壽永昌之曲(“Piece of Kisu yongch'ang”, also called “Kisu yongch'ang”). Even after the post - liberation era, “Kisu yongch'ang” used as original in the 1970’s not used as second ary until 2007. As for “Kisu yongch'ang”, it has never been used as the name of “Nagyangch'un” from Koryo 高麗 to Choson dynasty. Changgu 杖鼓(hourglass drum) was necessary for Choson’s “Nagyangch'un” but di sappear in the colonial period, cholgo 節鼓(large drum) listed instead any relations with the Nagyangch'un’s identity. As same as perspective of any relations with identi ty, chwago 座鼓(seated drum) listed during liberation era and still same in today. There were some replaces of pitches without melodic variation. During the Japanes e colonial era, the scale of “Nagyangch'un” changed into ‘黃·太·姑·仲·林·南·應’(c·d· e·f·g· a·b) and these are still the same in nowadays which had never been in the Cho son period. A phrase ‘太仲太黃’(d-f-d-c) at the Choson period changed into ‘太林太黃’(d-g- d-c) and once more divided into ‘太林太黃’(d-g-d-c) and ‘太-太黃’(d-res t-d-c)’ at the colonial period. There was an existence of insertion tones without any basis of documents that ma kes impossible play as an ensemble. These insertion tones are always exactly in front of original tones and exactly higher than original tones’ pitch so make musical unnat ural and disharmony with no musical intention. It had arranged to possible that coul d play ensemble during the same era but one original melody divided into three mel odies by instrument groups and also insertion tones were never gone. Each tone had its own length and “Nagyangch'un” had its own rhythm during th e Choson period, yet changed to one-tone one-beat music while colonial era as well one beat composed with three small beats. The one beats were comprised of 1/3-2/3 and 2/3-1/3 beat forms by combined original-insertion tones or original tones themsel ves. In the Choson period, Hwanip 還入(re-entering, i.e. dal segno) was expressly mar ked but in the colonial era, it didn’t mark but hint and soon disappeared. Today, H wanip is marked correctly due to the results of some researches. In conclusion, current “Nagyangch'un” completed around 1936~1939 and there w asn’t altered of melody structure after this. The formation of the current version of “Nagyangch'un” is not transmission but distor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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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제례악 정대업지곡 중 여덟 번째 곡명(曲名)에 대한 소고(小考)

        윤병천 ( Pyong Chon Yun ) 한국음악사학회 2012 한국음악사학보 Vol.49 No.-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후, 그 가치가 인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근래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대업(定大業) 중 여덟 번째 곡명이 “총유”(寵綏)에서 “총수”(寵綏)로 각종 인쇄매체에서 탈바꿈하기 시작하면서 국악계에 혼동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이에 양명석(梁明錫)의 “총유의 음독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나오게 되어 약간의 의혹은 해소되었으나, 그 곡명이 바뀌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던 터라 이에 대한 시원스러운 해답을 구할 수 없었다. 이를 밝히는 일은 관련 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음운변천과 한문의 변천에 관한 해박한 언어학적 지식을 요하므로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본 연구에서의 자료는 세종 때 『동국정운(東國正韻)』과 정조 때 『규장 전운(奎章 全韻)』·『전운옥편(全韻玉編)』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양명석이 밝힌 『천자문』의 내용 중에 유(綏)자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1575년판 『천자문』에 ‘편할 유’로 훈독이 달린 것을 고려할 때 이왕직아악부 교과철(李王職雅樂部 敎科綴)의 ‘綏 편안 유’라고 한 것이 잘못이 아님을 밝힌 것은 상당 부분 의문이 해결이 된 셈이다. 더욱이 서한범(徐漢範) 교수의 『세조실록』과 『악학궤범』에는 “총수”로 되어있다는 언급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왕직아악부교과철』 이전에 “총 유”의 훈독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종묘제례악의 곡명과 가사가 한문과 한글로 병기된 『악장가사(樂章歌詞)』 세 이본과 『악장요람(樂章要覽)』 이본을 통해 모두 “총유”로 표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악장가사』와 『악장요람』의 유(綏)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를 증명할 방법은 한자입문서인 『천자문』의 훈독에 관건이 달린 문제로서 필자는 20여종의 『천자문』을 검토해 보았다. 이 가운데 훈독은 ‘편안 수’와 ‘편안 유’ 두 가지로 나뉘는데, ‘편안 수’는 『동국정운』과 『규장전운·전운옥편』의 내용과 일치하고, ‘편안 유’는 1575년 『천자문』 이후, 1804년부터 1935년 판까지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일제강점기인 1935년 판에는 일본어와 함께 ‘편안 유’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천자문』내용에는 평성(平聲)표를 비롯해 화음(華音: 중국 본토 음)과 동음(東音: 조선의 음)에 관한 설명이 명시되어 있어서 ‘수’자는 화음(중국 음)을 뜻하고 ‘편안 유’는 동음(東音) 즉, 조선의 음(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악장가 사』(樂章歌詞)와 『악장요람』(樂章要覽)의 “총유”(寵綏)는 조선의 훈독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고, 『서경』(書經)의 총수사해(寵綏四海)는 중국식 표기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번 연구를 통해 중국과 조선은 같은 한자문화권이지만 글자에 따라서는 달리 사용하는 사례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Chongmyo cheryeak 宗廟祭禮樂 (royal ancestral shrine music) has been designated as Korea`s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No.1, and was more recently proclaimed to be a Masterpiece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 by UNESCO. However, a recent dispute concerning the tide of the eighth piece in Chongmyo cheryeak has generated much confusion. Even though the recent publication of Strait Reading of Chongyu 寵綏,” written by Yang Myong-sok 梁明錫, indicates the problems, still more study of the issue is required. This is made difficult by a shortage of related materials and the need for knowledge of phonetic changes and Chinese characters during the Choson 朝鮮 Dynasty and of linguistics. Thus, in this paper, I wi1l discuss the title of the eighth piece, Chongyu, based on several historical documents, including Tongguk chongum, 『東國正韻』, published during the Sejong`s 世宗 reign, and Kyujang chonum『奎章全韻』 chonum okpyon 『全韻玉編』, from the time of Chongjo正祖. In his paper, Yang clarified that ``yu`` 綏 in Chongyu`` from Yiwangjik aakpu kyogwachol 李王職雅樂部 敎科綴 should be read as such, based on the Korean reading of a Chinese character in Chonjamun 『千字文』 (The Thousand Sino-Chinese Characters). Another opinion, which insists that (Chongyu in Sejo sillok 『世祖實錄』 and Akhak kwebom 『樂學軌範』 (Guide to the Study of Music) should read as Chongsu, cannot be corroborated because of insufficient evidence. Even-earlier publications of three versions of Akchang kasa 『樂章歌詞』and Akchang yoram 樂章要覽 all transcribed the title as Chongyu. Then, how should this reading of ``yu`` be understood? Twenty versions of Chonjamun read this specific Chinese character as either ``yu`` or ``su`` Tongguk chongun and Kyujiang chonum okpyon read it as ``su`` while versions of Chonjamun after 1575 and between 1804 and 1935 all read it as ``yu`` At the same time, Chonjamun also introduces huaum 華音 (huayin, Chinese pronunciation of Chinese characters, with indication of tones, and tongum 東音 (Korean pronunciation of Chinese characters). These indicate that ``su`` is the Chinese pronunciation while ``yu`` is the Korean pronunciation. Thus, Chongyu in Akchang kasa and Akchang yoram should in fact be read as Chongyu, while Chongyu sahae 寵綏四海 in sogyong 『書經』 is a Chinese pronun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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