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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중성리비를 통해 본 麻立干시기 신라의 분쟁처리 절차와 六部체제의 운영

        노중국(Noh Choong-Kook) 한국고대사학회 2010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9

        본비의 건립연대의 기준은 辛巳年이라는 干支이다. 그리고 1행 6번째 글자는 ‘只’자가 아니라 ‘中’자라는 사실과 2행 11번째 글자는 ‘德’자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사실 및 六部에 壹伐이라는 새로운 관명이 보인다는 사실 등에 근거하면 본 비의 건립 연대는 441년이 된다. 본 비의 내용은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보여준다. 먼저 중앙에서 교를 내리자 몇 사람이 분쟁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밝힌 후 중앙에서는 使人을 파견하여 분쟁 지역 출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빼앗은 자인 豆智沙干支宮 등에게 빼앗은 것을 빼앗긴 자인 牟旦伐喙 作民沙 干支에게 되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리고 차후 이 판결에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중성리비는 마립간 시기에 신라의 육부체제 운영 모습을 보여준다. 육부체제는 나물마립간대에 성립되었고 눌지마립간대에 오면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탁부와 사탁부 중심의 운영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아간지, 사간지 등의 관등은 탁부와 사탁부 출신자만이 지닐 수 있었고 나머지 4부의 長은 干支를 칭하였다. 본 비에는 부 간지 휘하에 두어진 일벌이 보이는데 이를 외위 조직과 연계시켜 보면 일벌 이외에도 일척, 피일, 아척 등도 두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관명은 외위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部官으로 부르기로 한다. 부의 내부 분화의 진전은 부의 유력자들의 수를 증가시켰고 이들 상호간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 4부에 한해 간지를 분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간지는 重간지, 三干支등으로 분화ㆍ격상되었으며 봉평비에서 보듯이 오간지까지 분화되었다. 마립간 시기 신라의 영역은 왕의 직할지와 부의 干支가 주관하는 지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왕의 직할지와 부의 간지가 주관하는 촌에는 村干支-壹金知라는 지배조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를 村干으로 부를 수 있다. 왕은 자신의 직할지에는 도사를 파견하여 지배하였고 여타 지역은 부의 간지가 部官을 통해 그 지역의 일을 처리하였다. 이때 촌간은 도사나 부관이 각 지역을 지배하는데 보좌역할을 하였다. 봉평비단계는 신라의 관등이 경위와 외위로 정비된 것을 보여준다. 경위는 종래의 아간지, 나마, 사지 등을 분화ㆍ격상시키는 방법과 육부의 장 아래에 두어졌던 일벌, 일척, 피일 등에 간지를 붙여 격상시키는 방법으로 정비되었다. 외위 역시 두 방향에서 정비되었다. 하나는 육부 간지 아래에 있던 일벌-일척-피일 등을 지방민이 지니는 관등으로 바꾸어 격하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장을 지칭하는 간지를 분화ㆍ격상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경위 17관등과 외위 11관등이 정비된 시기는 521년의 사실을 전하는 『양서』, 신라전에 子賁旱支(이벌찬)와 齊旱支(잡찬)가 보이고 있는 사실과 연계시켜 볼 때 냉수리비가 만들어진 503년에서 521년 사이로 볼 수 있겠다. Pohang Jungseongribi(浦項中城里碑) was erected in Sinsa Year(辛巳年). The age of the erection has been assumed as A.D.501 by many scholars. However, the age of the erection also can be assumed as A.D. 441. The reasons following provide the evidence; the sixth letter of the first line is not ‘只’ but ‘中’. There is no definite proof that the eleventh letter of the second line is ‘德’. A new official title, Ilbeol(壹伐), appeared in Capital’ Six Bu(王京六部). The contents of the Pohang Jungseongribi is about the process of settling disputes. The process is as follows; After clarifying who was directly involved in the affair, the person in charge dispatched from the central government delivered a judgement. The defendant was ordered to return the property which he took away from the plaintiff. The judgement delivered based on the testimony. After retrial, it is prohibited filing protest petitions. It shows that the trial system at the time was the second trial. Silla Capital’ Six Bu(新羅六部),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Maribgan(麻立干) period, was operated with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as the center. The status of the rest of Bu(部) fell. Therefore, the people from Takbu and Satakbu were given preferential treatment; they were given official ranks such as Aganji(阿干支) and Saganji(沙干支). The people from the rest of Bu(部) only could be given Ganji(干支) or Jungganji(重干支)~Oganj(五干支) which are differentiated and elevated from Ganji. Ilbeol(壹伐) appears in Pohang Jungseongribi which is the official rank below Ganji, the head ofModanbeoltak(牟丹伐喙) and Bonpatak(本波喙). It show that men of influence had management systems directly belonging to them. It consists of Ilcheok(一尺)-Piil(彼日)-Acheok(阿尺) including Ilbeol. The area of Silla in the Maribgan period were classified into two groups - one which is under the direct control of the King, another which is under the control of Ganji from Bu. Each village(村) had management systems called Chonganji(村干支)-Ilgeumji(壹金支). The King dispatched an administrator called Dosa(道使) to the area under the direct control to govern. Chongan(村官) performed a role of assisting Dosa(道使). The rest of the area were in charge of Ganji from 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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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智證麻立干代 新羅 六部의 정치적 성격과 ‘干支’

        이부오(Lee, Bu-o) 신라사학회 2013 新羅史學報 Vol.0 No.28

        본고는 중성리비를 중심으로 지증마립간대 6부의 정치적 성격을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비문에서 敎를 대표한 인물은 갈문왕인 只折盧이다. Ⅲ행의 ‘敎’에서 문장이 끊어지는데, 이 敎는 분쟁처리 절차의 근거로서 맨앞에 제시되었다. 교를 근거로 공표된 ‘奪’의 주체는 豆智沙干支宮과 日夫智宮이며,돌려받은 주체는 牟旦伐喙의 作民沙干支이다. 敎 참여자는 대표자와 보좌인만 기재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반 수행자와 실무자가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탁부?사탁부가 대표자와 실무자를 독점하고 보좌인과 일반 수행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개인별 기재순서는 역할의 비중을 일차적 기준으로, 관등을 이차적 기준으로 삼았다.爭人에서 이러한 기준이 무시된 것은 개별 부의 자치적 영향력을 반영한다. 6부의 간지는 渠帥形 干에서 유래했다.이로부터 탁부?사탁부를 중심으로 職任形간지가 분화하여 干群京位가 탄생했고, 적어도 지증마립간대부터 모단벌탁으로 확산되었다. ?波喙?金評에서는 干支가 다른 간지와 공존했다. 단위정치체의 대표라는 간지의 위상은 부내 자치권의 일부분으로 한정되었다.지증마립간대 6부의 간지는 기존 읍락의 자치권에 기반을 둔 유력 干層이라는 의미로 마립간으로부터 공인받은 위호라 할 수 있다. 분쟁처리 참여자에 대한 部別기재와 간지의 자치권은 6부의 자치단위적 요소를 반영한다.반면 탁부?사탁부를 중심으로 한 간군 경위의 분화와 확산, 마립간과 갈문왕에 의해 주도된 통치 운영,부내?외 인물 사이에 맺어진 혈연관계는 6부가 자치단위적 단계를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6부는 자체 내에서는 자치단위적 요소를 일부 간직했으나, 이는 6부의 본질적 특징이기보다 일부 部에서 잔존한 유제에 가까웠다.이에 6부는 신라 국가의 통치에 참여하는 세력의 근거지에 대한 행정단위적 구분에 더 가까웠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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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 中古期 六部의 構造와 그 起源

        윤선태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14 新羅文化 Vol.44 No.-

        현재 학계에서는 중고기 이후 신라의 6부가 더 이상 단위정치체로서는 기능하지 않고,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변모하였다고 보고 있고, 이러한 주장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본고는 새롭게 발굴된 자료인 「월성해자 9호목간」에 의거하여 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6부가 신라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완결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세세한 분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애초 건국신화 속의 ‘6촌’을 왕경의 6부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만 바라보았던 것도 그 원인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생각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중성리비」가 발견된 이후, 종래 단순히 6部와 그 예하의 里들을 기록한 목간으로 이해했던, 「월성해자 9호목간」을 새롭게 주목하여 보았다. 이 목간은 중고기에 작성된 것이며, 목간의 묵서에 의하면 習比部 하에 里로 편제된 지역만이 아니라 里로 편제되지 않은 지역단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중고기 이후 6부가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어간 것은 분명하지만, 6부의 내부구조는 보다 복잡하였고, 또 6부가 전적으로 왕경이라는 지역범위 내에 한정되는 행정구역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분명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큰 틀에서 6부 성격의 변화에서 중고기가 중요한 전환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이전 6부가 단위정치체로서 기능하던 部의 성격이 중고기에 완전히 소멸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글은 「월성해자 9호목간」 및 「포항중성리비」 등 신출 자료에 기초해 ‘6부’가 왕경의 6부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입체화해보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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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中代 중앙행정관청의 계통과 등급

        정덕기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4

        This paper aims to present an explicit criteria to promote better understanding of forty four offices stipulated in 'Samguksagi.' With special focus on the 'quota' which represents the constituting principle in making of the office system and reflects the importance of the given task, I classified all the offices in the list accordingly, and estimated tentative quotas of the offices, thereby exemplifying the relationship among the office size, system and rank. Having in mind that the office system is classified by its size, all the administrative offices in Silla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categories ; general offices which take part in general affairs of the country, Sǒng Jǒn in charge of civil engineering and construction, and the offices related to Yukpu conduct the affairs of the main six provinces. I also suggest a supplementary standard to organize the offices in relation to the rank of governor in charge ; high offices in Ryung and Kyung rank and subordinate offices in Gam, Daesa, and Dang rank. This paper shows that the central administrative system in Silla represents a world-view that state administration is an extension of the central administration and that the capital is a miniature of the world in which they rule. 본고는 ≪삼국사기≫, 직관 上의 44관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하고자 작성되었다. 44관청의 분류기준에 대한 모색은 신라 중앙행정제도의 이해에 필수적인 작업이며, 직관 上의 讀法을 규명하는 문제이다. 본고는 직관 上의 핵심정보인 ‘定員’에 주목하고, 44관청의 계통・등급을 분류하였다. 관청・관직의 정원은 해당 관청・관직의 담당업무가 가진 상대적 중요도・위상을 반영하고, 관청의 구성 원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직관 上은 신라 중대 44관청에 207+ɑ개 관직・785+若干人이 있었음을 전하므로, 본고는 주요 6관직・기타관직 기준으로 정원을 계량화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행정의 총체적 규모・관청의 계통과 산술규모・장관의 관직명과 조직 및 등급이 갖는 관계성을 제시하였다. 관청의 계통은 산술규모로 분류된다. 44관청은 국사를 담당한 일반관청・寺, 宮의 조영・영선을 담당한 成典・경도 6부의 행정을 담당한 육부사무 관계관청의 3계통으로 분류된다. 관청별 조직・담당업무 및 관청 구성 원리・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보완기준으로 장관의 관직명을 따른 등급을 설정하였다. 상급 관청인 령급・경급 관청과 하급 관청인 감급・대사급・당급 관청으로 분류되며, 령급 관청은 령의 상당위 상한으로 세부등급이 구분된다. 44관청을 계통별 등급으로 구분하면, 특정 등급의 관청에 末字가 수렴되는 관청과 그렇지 못한 관청이 나타난다. 특히 典은 동일말자를 사용해도 관청의 등급에 차이가 있으므로, 장관의 관직명과 관청의 말자를 결합하여 監典・大舍典으로 구분하였다. 44관청의 계통별 등급분류는 신라 중대 중앙행정제도에 천하행정이 수도행정의 연장・확장 혹 수도행정은 천하행정의 압축이라는 개념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일반관청・육부사무 관계관청이 별도 계통으로 성립하였다. 또 토목공사나 寺・宮의 造營・營繕을 담당하는 성전이 별도 계통을 이루어 3계통별 4~5등급의 44관청으로 중앙행정체계를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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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의 仙道와 天孫文化

        박성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1 선도문화 Vol.10 No.-

        r 한국고대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규원사화』와 1970년대에 발견된 『한단고기』가 유명하다. 그래서 요즘은 이 두사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상고사에 관한 고전적 사서인『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 두 개의 사서에도 상고사에 관한 결정적인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라를 건국한 육부(육촌)의 사람들이 단군조선의 유민이었다고하는 기록이다. 종래 고구려와 백제는 단군조선의 유민이 건국한 나라였다고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신라가 조선유민이었다는 것과 하늘에서 내려온 천민(天民)의 후손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백마가 하늘에서 태워 온 박혁거세를 왕으로 해서 신라를 건국한육부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와서 가락국을 건국한수로왕과 같이 어딘가에서 온 유민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나라를 어떻게 세우는가를 잘 알고 있었고 巨大한 王城을 짓고, 四方에다 山城을 쌓아 수천 명의 弓師들로 하여금王城을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第1首都 桓仁에 가보아도 사방에 4부족이 살고 있어 중앙의 왕성(五女山城)을 護衛하고 있었다. 朝鮮에서 亡命한 遺民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옛 朝鮮에 살았던 慣例에 따라 王城을 지어 새 나라를 세우고 王城을 지켰던 것이다. 그들은 천신의 후손 즉 천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해마다 天祭를 열어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이자 시조인 조상을 모셨다. 이것이삼한시대와 삼국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천제 또는 산신제로 계승되었으며 오늘의 추석과 개천절 등 각종 명절과 국경일로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천제와 더불어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이화세계의 이념이 신라의 광명이세 이념으로 계승되어 사회질서를바로잡았던 것이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신의를존중하고, 사람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이며, 싸움터에 나아가서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삼교를 포함한 풍류도이고, 신라의 세속오계였던 것이다. 신라는 ‘새 나라’라는 뜻으로,새 나라는 옛날의 단군조선을 재건하였다는 뜻이었다. 새 나라의 중심세력은 화랑도花郞徒였다. 신라 화랑도의 수련은 첫째 선도의 도의를 닦아 세속오계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고, 둘째 노래를 부르며 음악을 즐기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 산수를 즐기며 신체를 단련하였다. 이러한수련법은 삼국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삼한과 단군조선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오랜 전통이다. 화랑도의 수련은 일본열도로 이민한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었으니 英彦山의 修驗道가 그것이다. 영언산의수험도에도 화랑도와 똑같은 계율에 따라 수련하였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英彦山은 일본 북구주에 있으며, 수험도가 일본 본토의近畿 지방으로 전파되어 사무라이(武士) 등 일본 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신라의 천제와 천손문화는 남 구주의 阿祖山과太伯山 그리고 韓國岳에 전파되어 일본민족의 시조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 사기오미론(四氣五味論)의 구조적 해석

        조용주,김진주,Cho, Yong-Ju,Kim, Jin-Ju 한국한의학연구원 2005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Vol.11 No.2

        Four Properties and five Flavors of Drugs is interpreted by adaptation of human body to the environmental theory(天人相應). The Structural model of the body is compared with sky, earth, sun and moon (天, 地, 日, 月). The natural changes of the four seasons give rise to that of Four Properties and five Flavors of Drugs. On equal terms it is happened in our body. On this study we can draw an analogy between sky, earth, sun & moon (天, 地, 日, 月) and the body. The six bu(六腑) is related to the earth, the five ju(五主) to the sky, the five jang(五臟) to the sun, the meridians system (經絡) to the moon. When spring, the air is warm, the water element of the earth is ascending, and the earth gives birth to the sour flavor. Like this, the water element is absorbed by six bu and then is ascended to the meridian system. When summer, the air is hot and the water element of the earth is floated, the earth make the bitter flavor. In the same way, the six bu absorbed the hot air from the five ju and the water element is quickly absorbed by six bu and then the water element is ascended to the meridian system. When rainy season (長夏), the earth creates the sweet flavor The sweet flavor give warmer energy to the five jang and the six bu. When autumn, the earth change the sweet flavor into pungent. The earth gives warmer energy to the sky, because of cool weather According to same process, the pungent flavor give warmer energy to the five jang and the six bu, and the meridian system gets back the water element from the five ju. When winter, the air is cold and the water element of the earth is hidden. The sky and the earth are not interchangeable. At that time, the earth produce the salty flavor and the water element is keeping in the meridia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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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中城里新羅碑의 발견과 그 의의

        李文基(Lee Moon-key) 한국고대사학회 2009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6

        이 논문은 신발견 중성리비의 해석을 시도하고, 내용 및 성격과 건립 연대 문제, 그리고 발견이 가진 의의에 대하여 살펴 본 것이다. 파악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본비는 12행 200여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사를 기준으로 삼으면 5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둘째, 본비를 통해 사건의 발생에서 비석이 건립되는 진행과정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① 과거에 豆智 沙干支宅[宮]과 日夫智宅[宮]이 흥해지역에 위치한 居伐, 古利村, 那音支村, 珍伐에 사는 주민들을 빼앗은 바가 있었다. ②신사년 무렵에 喙ㆍ沙喙ㆍ牟旦伐喙ㆍ本波喙의 4개 부와 관련을 가진 인물(지방민)들이 4개 촌락의 주민들을 서로 차지하려고 분쟁을 일으켰다. ③이 사실이 중앙에 보고되어 아간지 2명 등 중앙 고위층이 辛巳年 某月에 이 사건을 평결하고, 2명의 나마에게 ‘敎’를 내렸다. ④‘敎’를 받은 2명의 나마는 2명의 奈蘇毒只道使를 使人으로 삼아 평결한 내용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⑤2명의 使人은 그 해(辛巳年)에 居伐, 古利村, 那音支村, 珍伐 등 흥해지역 4개 촌락의 7명의 유력자들에게 ‘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과거 豆智 沙干支宅과 日夫智宅에서 빼앗았던, 그리고 4개 部가 귀속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켰던, 흥해지역 4개 촌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단벌탁에 귀속시켜 백성으로 만들도록 한 것이었다. ⑥이에 豆智 沙干支의 使人인 果西牟里가 이제 주민들을 다시 돌려주었으므로 차후 異說을 제기하는 자에게는 重罪를 주기를 건의하였다. ⑦이상의 과정을 典書인 ?牟豆가 비에 기록하고, 沙喙의 心刀?가 비를 세우는 일을 마쳤다. 셋째, 중성리비는 흥해지역의 4개 촌락의 주민을 둘러싸고 약탈과 분쟁이 발생하자, ‘敎’와 ‘令’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그 사실을 사건 관련자와 흥해지역 지방민에게 알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본비는 분쟁에 대해 평결ㆍ집행한 내용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布告文’의 성격을 갖는다. 넷째, 중성리비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501년설을 지지하는 견해가 많지만, 그보다 60년 빠른 441년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에 건립 연대를 성급하게 501년으로 단정하기보다, 양자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둔 채 차후 지속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다섯째, 중성리비 발견의 의의로는 육부 문제를 비롯한 신라사 연구상의 획기적인 신자료가 될 수 있는 점, 성격이 비슷한 냉수리비와의 공통성을 통해 5~6세기 포항지역과 왕경 사회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하는 자료가 된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on the contents and the excavated meanings of the Jungsung-ri's Fundamental Monument at Pohang.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 First, the contents of the Jungsung-ri's Fundamental Monument are recorded the results, after settling a dispute that who have the ownership of people who live in 4 villages in Heonghae district. Second, its character is an official notice that let many people know regarding the contents of the events that have been concluded. Third, A.D.441 that the period of construction is more possible than A.D.501. Fourth, the Fundamental Monument would be very important data for the study of the Silla 6-bu as well as the study of the affinity between the capital of the Silla and Heonghae distr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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