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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의 전개와 그 성격

        김도형(Kim Do Hyung)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1 이순신연구논총 Vol.- No.15

        1930년대 민족주의계열에서 전개한 문화운동에 대해 논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일본문화를 이식시키려는 식민통치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독립운동 단체의 출판물을 중심한 독립운동을 지향한 문화운동과 민족보존을 위한 문화운동이었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1930년대 초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이충무공의 유적·유물을 보존하기 위한 전민족적 차원으로 승화된 것을 일괄하여 필자는 ‘李忠武公遺蹟保存運動’이라고 명명하여 보았다. ‘이충 무공유적보존운동’은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순신의 위토경매 문제가 계기가 되었다.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은 충무공의 종손이 묘소와 위토를 채무로 저당잡혀 경매로 넘어가면서, 성금을 모아 충무공의 위토를 되찾게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아산에 현충 사를 중건하는 등 이순신의 유물과 유적을 보존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민족적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의 유골을 모신 아산 묘소와 위토가 경매를 당한다는 놀라운 소식은 마치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존재와 동일시되면서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충무공을 추모하고 숭상하는 열성은 성금으로 이어졌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까지 조직되어 묘소와 위토는 물론이고 아산 현충사의 중건, 위토의 증가, 유물과 유적의 보호, 사당과 묘소의 수리 등 ‘충무공유적보존운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1930년대 초반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두 가지 측면에서 보았다. 첫째는 하나는 역사․문화적 측면에서 한말부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까지 우리 민족의 뇌리에 잠복해 있던 ‘李舜臣相’이 이를 계기로 폭발하였다고 보았다. 둘째는 운동사적 측면에서 1930년대 들어 민족운동의 전반적인 주도권이 사회주의계 열로 넘어가자 민족주의계열은 새로운 운동영역을 개척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제기된 이순신의 위토문제는 민족주의계열에 새로운 운동영역을 마련하였고 이를 대중 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주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The Preservation Movement of the Admiral Yi Sun-sin s Historical Remains in the 1930 s It is a true that there is a disputation of a carried out cultural movement by nationalism in the 1930 s. However, Koreans independece movement appear to be growing stronger by independence movement group through the publication, activies and at that time Koreans preserved their heritage. So there is a right reason for against Japanese imperialists instituted a policy to obliterate Korean culture.

      • 1930년대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의 전개와 한계

        김주식(Joo-Sik Kim)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22 이순신연구논총 Vol.- No.37

        1931년 5월부터 『동아일보』와 충무공유적보존회의 추진으로 전개된 이순신과 관련된 일련의 활동은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으로 불린다. 이 보존운동에 대한 연구는 그 성격을 민족주의 계열의 국수주의적 문화운동의 한 양상으로 규정하거나, 이 운동의 전개 과정과 대중운동으로 발전된 원인을 규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왔다.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이순신의 유물과 유적 관리의 종합적인 상황을 기술하면서 이 보존운동을 간단하게 언급한 논문도 있었다. 본고는 이 보존운동이 조선총독부의 제약을 받지 않은 이유와 일제강점기 동안 지속되지 못한 이유를 밝히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제목에 한계라고 표현한 것은 그러한 이유들이 이 보존운동의 한계를 밝히는 작업도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보존운동의 전개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본 후 당시 보존운동에 대한 사회여론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주도인물의 인적 구성, 주도인물의 이순신에 대한 인식, 조선총독부의 대응으로 나누어 내적인 한계와 외적인 한계를 동시에 규명하려고 했다. 「Dong-A Daily News」 and 「the Society for the Preservation of Yi Sun-Sin’s Remains」 did a lot of works related to Admiral Yi Sun-Sin. These works have been known as the movements for preserving Admiral Yi Sun-Sin’s remains. Some studies considered this movement as an aspect of nationalistic cultural movements. Others concentrated on the process of the movement and on finding causes why this movement had been led to public movement. And there was a study which mentioned the movement briefly, describing the management condition of Admiral Yi Sun-Sin’s remains and relic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is article attempt to clarify the reason why this preservation movement was free from the restraint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the reason why the movement couldn’t continue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So, first this article looks into the process of the preservation movement overall and the social opinion on the movement. And it looks into the leadership of the movement, their perception of Admiral Yi Sun-Sin and the response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s a result, this article investigates external limit as well as inner limit of this preservation movement at the sam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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