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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철학(哲學)) : 원종(元宗)의 추숭문제(追崇問題)

        장세호 ( Se Ho Cha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50 No.-

        유가(儒家)가 이상적인 제도로 내세운 봉건제도는 종법(宗法)을 전제로 한다. 종법은 가족제, 가장제, 세습제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존존(尊尊)의 원리에 기초한 적장자(嫡長子) 상속제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가장은 가족을 통제하는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게 된다. `가무이존(家無二尊)` `가무이주(`家無二主)` 등의 표현이 단적으로 그 권력을 말해 준다. 가무이존은 바로 정통(正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정통은 가통(家統)을 바르게 하고, 왕통(王統)을 바르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가통의 측면에서는 한 가정에 두 아버지가 없는 것이며, 왕통의 측면에서는 두 임금이 없는 것이다. 유학의 본래 정신인 종법체제의 확립을 위하여서는 정통을 확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추숭문제(追崇問題)는 왕통과 가통의 문제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왕위계승문제가 종법에서처럼 적장자가 계승을 하게 되면 애당초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그러나 왕통이라는 것은 꼭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제왕가(帝王家)에서는 승통(承統)을 중시하기 때문에 승통하는 것에 따라 위인후자(爲人後者)의 예법을 적용시켜, 父子의 도리를 행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대통(大統)에 입계(入繼)하기 이전의 사가(私家)의 정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통과 왕통을 엄연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왕통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仁祖)의 경우도 정원군(定遠君)이 비록 선조(宣祖)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인조가 선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당연히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사계의 일관된 주장이다. Injo rised king for reforming the government. It is different to Senjo(宣祖) has succession by the Royal line. Injo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Jongwonkun that daewonkun by Park ji ke and his disciple Yi ye kil and many people`s suggestion. Therefore Jung won kun becomes Wonjong. But Sake considered 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has problem. Being Park ji ke persistents from quote no reasons and blamed. Also, Sake persistents not Jongwonkun(定遠君) w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 but Nengwondaekun that Injo`s brother had to manage sacrificial rites. Sake`s blamed persistense constructs by all that Chunchu kang mock`s(春秋綱目) term. As two sun must not in the sky, two origin must must not in family is suggestion of Sake corrects tong. That is said keep in Jongtong(正統).

      • KCI등재

        元宗의 追崇問題

        장세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50 No.-

        유가(儒家)가 이상적인 제도로 내세운 봉건제도는 종법(宗法)을 전제로 한다. 종법은 가족제, 가장제, 세습제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존존(尊尊)의 원리에 기초한 적장자(嫡長子) 상속제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가장은 가족을 통제하는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게 된다. ‘가무이존(家無二尊)’ ‘가무이주(‘家無二主)’ 등의 표현이 단적으로 그 권력을 말해 준다. 가무이존은 바로 정통(正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정통은 가통(家統)을 바르게 하고, 왕통(王統)을 바르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가통의 측면에서는 한 가정에 두 아버지가 없는 것이며, 왕통의 측면에서는 두 임금이 없는 것이다. 유학의 본래 정신인 종법체제의 확립을 위하여서는 정통을 확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추숭문제(追崇問題)는 왕통과 가통의 문제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왕위계승문제가 종법에서처럼 적장자가 계승을 하게 되면 애당초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그러나 왕통이라는 것은 꼭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제왕가(帝王家)에서는 승통(承統)을 중시하기 때문에 승통하는 것에 따라 위인후자(爲人後者)의 예법을 적용시켜, 父子의 도리를 행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대통(大統)에 입계(入繼)하기 이전의 사가(私家)의 정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통과 왕통을 엄연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왕통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仁祖)의 경우도 정원군(定遠君)이 비록 선조(宣祖)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인조가 선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당연히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사계의 일관된 주장이다. Injo rised king for reforming the government. It is different to Senjo(宣祖) has succession by the Royal line. Injo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Jongwonkun that daewonkun by Park ji ke and his disciple Yi ye kil and many people's suggestion. Therefore Jung won kun becomes Wonjong. But Sake considered 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追崇) has problem. Being Park ji ke persistents from quote no reasons and blamed. Also, Sake persistents not Jongwonkun(定遠君) was set up a mausoleum in Chusong but Nengwondaekun that Injo's brother had to manage sacrificial rites. Sake's blamed persistense constructs by all that Chunchu kang mock's(春秋綱目) term. As two sun must not in the sky, two origin must must not in family is suggestion of Sake corrects tong. That is said keep in Jongtong(正統).

      • KCI등재

        潛冶 朴知誡의 삶과 행적 연구

        김일환(KIM, Il-hwan) 역사문화학회 2021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4 No.2

        潛冶 朴知誡는 京華士族으로 서울 돈의문 밖 盤松坊에 기반을 둔 지역적 연고와 함께 정치적으로 서인 세력과 연결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12년간 제천, 괴산에 옮겨 살다가 서울 本第로 귀경했지만 광해군의 집권기에 대북정권의 독주와 거듭되는 亂政을 피해 충청도 新昌으로 移居하였다. 그 사이 한동안 경기도 南陽으로 옮겨간 적은 있지만 종신토록 아산에서 살았다. 이후에 子姪이 뿌리를 내려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아산에 살고 있다. 박지계는 젊어서부터 벼슬을 거부하고 평생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는 도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신창으로 옮겨와서도 오랜 지기인 權得己와 趙翼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성리학에 대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한편 趙克善을 비롯한 많은 문인, 제자를 기르는 講學 활동도 쉼 없이 이루어져 17세기 牙山지역 유학의 전통을 세우고 기반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金長生, 張顯光과 함께 명망있는 山林處士로 존숭되어 新政을 도울 宿儒로 조정에 초빙되었다. 하지만 反正이란 특수한 정치 상황에서 발생한 王統의 계승 문제와, 이에 따른 禮論과 服制 문제로 조정 중신뿐 아니라, 김장생 등 주류학자와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됨에 따라 찬사와 질시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학문적 신념에 대한 일관성 있는 그의 주장은 마침내 관철되어 元宗追崇 문제는 박지계의 의지대로 결정이 되었다. 박지계는 사후에 아산의 五賢書院, 곧 仁山書院에 배향되어 아산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17세기 아산에 새로 入鄕하여 학문과 교육으로 아산지역의 유학적 전통과 기반을 확대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따라서 17세기 아산 儒學의 형성에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잠야 박지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아산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기에 앞으로도 계속 크게 조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Jam-ya, Park Ji-gye had not only a regional connection with Gyeonghwasajok faction (noble families living both in and around Hanyang) based on Bansongbang, outside Seoul"s Donuimun Gate, but also had a political connection with Seo-in party. He returned to his home in Seoul after having moved around Jecheon and Goesan for 12 years due to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However, during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he moved to Shinchang, Chungcheong-do Province, in order to avoid the dictatorship of Daebuk faction and repeated political noise in administration. In the meantime, he moved to Namyang, Gyeonggi-do Province for a while, but he lived in Asan for the rest of his life. As a result, his descendants have still lived in Asan to this day. From a young age, Park Ji-gye refused to hold an official position and lived a life of a moralist enthusiastically devoted to the study of Neo-Confucianism for the rest of his life. Even after moving to Shinchang, he actively interacted with his longtime friends, Kwon Deuk-gi and Jo Ik, immersing himself into an academic research on Neo-Confucianism. Meanwhile, many literary scholars and followers, including Jo Geuk-seon, were constantly raised in ceaseless teaching and learning activities, which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establishing the tradition of Confucianism in the Asan in the 17th century and in broadening its foundation. After Injo banjeong (the coup of 1623), he was respected as Sanlimcheosa (a prestigious officer in nature) along with Kim Jang-saeng and Jang Hyeon-gwang, and was invited to a palace as a renowned scholar to help the new rulers. However, he confronted not only the palace officials but also mainstream scholars such as Kim Jang-saeng over the issues of righteous succession of the King, which arose in the special political situation of anti-government, accordingly, along with issues of funeral related manners and custom. As a result, he has been at the center of controversy for a long time, making him both admired and envied at the same time. However, his consistent argument on academic beliefs was finally carried out, and the issue of Wonjongchusong(元宗追崇) was decided according to the will of Park Ji-gye. Park Ji-gye was later enshrined in Ohhyeon-seowon Confucian Academy, that is, Insan-seowon Confucian Academy, now becoming a historic part in Asan. In the 17th century, he newly entered Asan area and contributed to expanding the Confucian tradition and foundation of the Asan region through learning and education and to raising its academic level. Therefore, it is obvious that Jamya, Park Ji-gye was the person who laid the foundation for the formation of Neo-Confucianism in Asan in the 17th century. Today, this tradition has become the basis for shaping the identity of Asan, so it should continue to be widely discussed in a long te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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