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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 주변 ‘이무기’ 전승의 실제와 지역사적 맥락

        천혜숙(Chun, Hye-Sook) 실천민속학회 2017 실천민속학연구 Vol.29 No.-

        운문사 주변 지역의 이무기 전승은 크게는 ‘佛[僧]: 龍’의 대립 구조로 실현되는 용신관련 사찰설화군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몇 가지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용이 아니라 이무기의 명명이 유지된다는 점, 불승보다 이무기의 능력이 우월하다는 점, 불승과의 대립에서 이무기가 죽거나 驅逐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헌 및 구전자료 간의 同異 또는 變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삼국유사의 ‘보양이목’ 기사는 동 문헌의 다른 용신관련 사찰설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이목’의 명명과 함께 이목의 降雨 단락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지 구전자료와도 근접한다. 이는 ‘보양이목’ 기사의 기술을 위해 일연이 주로 참고한 원천 자료가 당시 청도 지역 鄕豪들의 諺傳을 기록한 <郡中古籍裨補記>의 ‘古人消息及諺傳記載’였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더 나아가 현지 구전자료들에는 다른 지역의 구전에서 볼 수 없는 이무기의 潛行과 移住, 祈雨 대상신으로서의 영험과 같은 특징들이 더 보태진다. 지역 자료가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지역사의 맥락들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지역에는 6~7세기 경부터 이미 五岬의 사찰들이 존재하였고, 그 중 하나인 가슬갑사를 중심으로 원광이 占察寶와 世俗五戒 등의 포교를 펼친 역사가 있다. 이 오갑은 후삼국의 난리로 무너졌지만, 고려 태조와 보양선사의 정치적 결연에 의해 운문선사로 중창되고 원응국사에 의해 다시 중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막대한 사원전을 소유한 지역의 대찰로 거듭나게 된다. 한편, 청도의 穴禮山과 荊山城에서는 신라 때 大祀와 中祀가 행해진 기록이 있고, 烏禮山[혈례산], 巨淵, 李木淵, 臼淵[호박소] 등에는 祈雨를 위한 龍壇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재래신앙과 문화도 불교신앙 못지 않게 강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보양과 일연도 이렇듯 강력한 재래신앙을 간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원전의 규모가 대단했다고는 하나, 후삼국 난리 후 亡田化된 것을 운문사의 소유 또는 收租地로 바꾸는 과정에서 무리와 반발이 빈발했을 터이고, 실제 사원전 경영에서도 경작의 주체인 사원의 노비나 佃戶들의 토속신앙과 세계관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이 지역의 이무기 전승에서 나타나는, 상좌로 위장한 이무기, 강우 등의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이무기, 호박소로 移住하는 이무기, 꽝철이가 되어 가뭄을 가져오는 이무기, 祈雨 대상신으로 섬겨지는 이무기 등의 형상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교신앙과 용신신앙이 오래 공존해 온 역사 속에서 사원전의 경영 또는 농경문화의 역사를 둘러싸고 벌어졌음직한 두 신앙 간의 상호우위적 대립이 그러한 양가적 형상과 중의적 구조로 실현되었으리란 뜻이다. 한편으로 청도 밀양 지역은 신라 수도인 경주로 들어오는 요충지였던 관계로 고려 통합과정에서 후삼국 세력들 간의 쟁패가 심했던 곳이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같은 지정학적 이유로 ‘신라부흥’과 ‘반고려’를 표방한, ‘雲門賊’이라 일컬어진 민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특히 지역의 구비전승에서 이무기가 인격화되는 동시에 비범한 神人的 존재로 형상화되는 양상은 이러한 정치사적 맥락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무기의 潛行, 승천의 좌절과 移住의 행적 등은 반체제 영웅 전설들과도 많이 닿아 있다. 물론 역사적 고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 KCI등재

        운문사 주변 ‘이무기’ 전승의 실제와 지역사적 맥락

        천혜숙 실천민속학회 2017 실천민속학연구 Vol.29 No.-

        운문사 주변 지역의 이무기 전승은 크게는 ‘佛[僧]: 龍’의 대립 구조로 실현되는 용신관련 사찰설화군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몇 가지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용이 아니라 이무기의 명명이 유지된다는 점, 불승보다 이무기의 능력이 우월하다는 점, 불승과의 대립에서 이무기가 죽거나 驅逐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헌 및 구전자료 간의 同異 또는 變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삼국유사의 ‘보양이목’ 기사는 동 문헌의 다른 용신관련 사찰설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이목’의 명명과 함께 이목의 降雨 단락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지 구전자료와도 근접한다. 이는 ‘보양이목’ 기사의 기술을 위해 일연이 주로 참고한 원천 자료가 당시 청도 지역 鄕豪들의 諺傳을 기록한 <郡中古籍裨補記>의 ‘古人消息及諺傳記載’였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더 나아가 현지 구전자료들에는 다른 지역의 구전에서 볼 수 없는 이무기의 潛行과 移住, 祈雨 대상신으로서의 영험과 같은 특징들이 더 보태진다. 지역 자료가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지역사의 맥락들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지역에는 6~7세기 경부터 이미 五岬의 사찰들이 존재하였고, 그 중 하나인 가슬갑사를 중심으로 원광이 占察寶와 世俗五戒 등의 포교를 펼친 역사가 있다. 이 오갑은 후삼국의 난리로 무너졌지만, 고려 태조와 보양선사의 정치적 결연에 의해 운문선사로 중창되고 원응국사에 의해 다시 중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막대한 사원전을 소유한 지역의 대찰로 거듭나게 된다. 한편, 청도의 穴禮山과 荊山城에서는 신라 때 大祀와 中祀가 행해진 기록이 있고, 烏禮山[혈례산], 巨淵, 李木淵, 臼淵[호박소] 등에는 祈雨를 위한 龍壇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재래신앙과 문화도 불교신앙 못지 않게 강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보양과 일연도 이렇듯 강력한 재래신앙을 간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원전의 규모가 대단했다고는 하나, 후삼국 난리 후 亡田化된 것을 운문사의 소유 또는 收租地로 바꾸는 과정에서 무리와 반발이 빈발했을 터이고, 실제 사원전 경영에서도 경작의 주체인 사원의 노비나 佃戶들의 토속신앙과 세계관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이 지역의 이무기 전승에서 나타나는, 상좌로 위장한 이무기, 강우 등의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이무기, 호박소로 移住하는 이무기, 꽝철이가 되어 가뭄을 가져오는 이무기, 祈雨 대상신으로 섬겨지는 이무기 등의 형상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교신앙과 용신신앙이 오래 공존해 온 역사 속에서 사원전의 경영 또는 농경문화의 역사를 둘러싸고 벌어졌음직한 두 신앙 간의 상호우위적 대립이 그러한 양가적 형상과 중의적 구조로 실현되었으리란 뜻이다. 한편으로 청도 밀양 지역은 신라 수도인 경주로 들어오는 요충지였던 관계로 고려 통합 과정에서 후삼국 세력들 간의 쟁패가 심했던 곳이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같은 지정학적 이유로 ‘신라부흥’과 ‘반고려’를 표방한, ‘雲門賊’이라 일컬어진 민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특히 지역의 구비전승에서 이무기가 인격화되는 동시에 비범한 神人的 존재로 형상화되는 양상은 이러한 정치사적 맥락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무기의 潛行, 승천의 좌절과 移住의 행적 등은 반체제 영웅 전설들과도 ... The ‘Imuki’(이무기) legends appearing around ‘Unmun’(운문) temple are very interesting in several respects. It has similar face and other face at the same time, compared with stories about building temlple that contains the confrontation between monk and dragon. In other respects, I would like to say that it has the name ‘Imuki’, it has power over monk, and it is not defeated unilaterally in a confrontation between the two. These three features are characteristic of both documentary records and oral traditions. In addition, I would like to add the very important feature, which is seen in only oral traditions, that is, it moves to another place [‘Hobak’ pond/호박소]. These features are deeply related to the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xt of the region. First of all, there are temples in this area in the 6th or 7th century, and Wonkwang(원광) already preached in one temple, ‘Kasulgap’ Temple(가슬갑사). In 10th century, Boyang(보양) rebuilt Unmun Temple and while Woneung(원응) was reviving the temple again, Unmun temple became a large temple with huge land. On the other hand, in Chungdo(청도) area, there are mountains that have offered rituals nationally and ponds that prayed for rain to the dragon, since shilla period. It can be seen that not only Buddism but also traditional beliefs and cultures were very strongly preserved. In addition to that, since the slaves and peasants belonging to the temple cultivated the land owned by the temple, it is presumed that there would be conflict and confrontation between the temple and the farmers cultivated the temple’s land. Therefore Unmun’s monks could not dismiss their faith and world view, unilaterally. In the ‘Imuki’ legends of the region, ‘Imuki’ has various shapes, such as a ‘Imuki’ disguised as a deacon of a chief monk, a ‘Imuki’ power over the monk, ‘Imuki’ that moves to another place, ‘Imuki’ that rains, ‘Imuki’ that thunders. Those shapes are related to the context of religious history in which the two religions in the region have conflicted and fused. I think that the conflict between the Buddism and traditional beliefs that have long coexisted in this area, and between the two culteres that would have spread over the land cultivation of the temple have been realised with such an ambivalent shapes and structures. Cheongdo and Miryang areas were key points for entering Gyeongju, the capital of shilla, so in the early days of Koryeo, there was a controvercy among the various political powers, which are called ‘late three nations(후삼국)’. In the Koryeo period, it was also the base of rebellions crying to 'Shilla revival' and ‘anti-Koryeo’ for the same geopolitical reason. It seems to be related to the local poliYunmunsa Temple, Dragon-related Buddhist tales, legends related to the creation of temples, hidden passages, hidden dragons, immigration, frustration of ascensiontical history, mentioned above, that the ‘Imuki’s subordination, his frustration of the ascension, and his migration are seen in the tradition of this region. For this reasoning, more historical reflection is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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