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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림보초』를 통해 본 18세기 충청도 임천군수의 지방행정

        이선희(Yi Sunhui)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20 충청학과 충청문화 Vol.29 No.1

        이 논문은 임천군수가 1738년부터 1740년까지 작성한 〈가림보초〉를 분석하여 군현제의 제도적 실제를 추적하였다. 수령이 일정기간 도내 행정기관과 연계한 문서를 분석하여 연계기관의 종류별 관련성과 업무 특징을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제도적 위상과 실제 역할의 적용점을 확인하는 한편 임천군이 갖는 강변 인접 군현의 특정을 살펼 수 있었다. 우선 군현제의 운영 실제면을 보면, 관찰사가 도내 행정기관의 핵심축으로 역할하였다. 수령은 관찰사를 통해 중앙 관서를 비롯하여 도내병영, 수영, 전영 등 상급관, 그리고 동등관으로 다른 군현과 연계하였다. 관찰사는 행정과 군정을 통할하는 도내 최고통치권자로서 도내 행정기관 사이 조정과 운영을 담당하였다. 다음으로 임천군이 갖는 사례적 특징은 지리적으로는 금강하류 지역으로 소속 20개 면 중 13개 면이 강에 인접한 군현이라는 점이다. 강에 인접한 지역으로 황당선 기찰과 수영 소속 사찰의 관리 등으로 병영보다는 수영과 업무 연계도가 높았다. 임천군수가 갖는 행정적 특정은 관계한 행정기관과의 업무 내용에 규정되었다. 충청도 수령은 도내 감영 · 진영 · 수영 · 병영 · 군현 등과 관련되어 공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문서행정을 통한 수량화의 방식을 통해 수령의 업무 특정과 도내 행정기관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었다.

      • KCI등재

        부여 林川郡 城隍祠와 庾黔弼

        김효경(Kim, Hyo-gyoung) 한국역사민속학회 2008 역사민속학 Vol.- No.26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위치한 成興山城 안에 고려 太師 庾黔弼을 모신 사우가 있다. 이 사우는 고려시대로부터 행정관청에서 주관하던 城隍祠로 추정된다. 임천군은 통일신라시대로부터 국가 祀典의 하나인 小祀의 제장으로 인식되어 종교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금강의 주요 물길과 직접 연결되어 군사적, 행정적 요충지로 백제시대로부터 부각되었다. 이러한 토대 속에 고려의 후 삼국 통일 후 요구되는 사회적인 욕구 즉 지역 내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후백제의 극복이라는 정치적 측면까지 복합되면서 유금필이라는 인물이 신령으로 좌정하게 된다. 후백제의 잔당의 횡포로 인해 피폐해진 지역사회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역의 신령은 인간적인 치적보다는 종교적인 심성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많은 지역에서 실존인물이 신령으로 좌정하는 경우에 그의 역사적 인물평이나 공적 보다는 지역민에 대한 선행이 원인이 되었다. 유금필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주신으로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성에 대한 진휼, 즉 사회적으로 가장 절실한 문제를 극복해준 존재였기에 신령으로 탄생된 것이다. 유금필을 모신 성황사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존속되었다. 『東國輿地勝覽』(15세기 중반)에는 백제 때 축성된 성흥산성 안에 위치했다. 그러나 『與地圖書』(18세기 중반)에는 산성 밖으로 옮겨지고 건물로 이루어진 성황사에서 제단의 형태인 성황단으로 바뀐다. 『湖西邑誌』(19세기 후반)에 수록된 지방도에 성황사와 성황단 모두 표기되어 있다. 산성 안의 성황사에는 유금필 태사가 모셔져 있는데, 주민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숭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황단이 건립된 후에도 여전히 성황사가 존속했으며, 그 신당의 主神은 여전히 유금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성흥산성 안의 유금필 사당은 고려시대로부터 조선후기까지 줄곧 관치제가 베풀어지던 성황사이며, 그 주신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태사직을 수행한 유금필이다. 현재의 사당 안에는 유금필과 더불어 그 가족이 신령으로 봉안되어 있다. 부인을 비롯하여 아들 1명, 딸 2명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것은 실제의 가족관계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부모와 아들, 딸로 구성된 조화로운 가족구성원은 화평하고, 안정된 가정의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신령의 존재는 결국 화평과 안정을 이끄는 존재로 간주되며,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군민들은 그러한 신령의 영향속에서 동일한 화평의 세계를 맞게 된다. 이처럼 신령으로 탄생된 유금필은 그가 지닌 인간적인 武人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주민의 어려움을 돌보고, 지역을 돌보는 자애로운 성격을 지니게 된다. 부인을 비롯하여 아들과 두 딸을 거느린 여느 가정의 가장처럼 고을의 좌장이 되어 지역신으로 숭앙되고 있다.

      • KCI등재

        조선후기 충청도 수령과 도내 행정기관의 운영체계와 조정방식

        이선희 동양고전학회 2020 東洋古典硏究 Vol.0 No.81

        이 논문은 조선후기 수령이 관계한 행정관계망의 실제 운영을 추적한 것이다. 이 연구를 이끈 두 가지 질문은 첫째 지방관의 제도적 위상은 실 제로 준행되었는가, 둘째 수령은 타군현 수령을 비롯하여 상급기관과 어 떤 방식으로 행정업무를 조율하였는가 이다. 주된 자료는 충청도 임천군수가 1738년부터 1740년까지 작성한 공문서 가 필사된 가림보초이다. 분석 대상이 행정체계라는 점과 여러 군현이 함께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 기반하여 조선후기 수령의 도내 행정체계로 확장하여 논의를 전개했다. 수령을 중심으로 살핀 공문서의 흐름과 연계 절차 과정은 지방관의 제도적 위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병영과 전영의 상하관계, 감영과 수영의 조정절차 등이 그것이다. 수령은 관찰사를 매개 로 타군현과의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수령은 종2품에서 종6 품까지 관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등관으로 문서가 오갔다. 소속군현의 문제를 해결할 때도 동등관으로 맞섰다. 수령은 다른 행정기관과 의견 대립이 생길 때 행정문서, 지역정보, 소속 민 우선의 원칙을 고수했다. 수령은 행정문서를 증빙자료로 적극 활용했 다. 임천군의 인접고을인 석성현과 약 50년 간 계속된 소송사건에서 행정 문서의 보관시기를 살필 수 있었다. 도내 지역정보는 지리적 정보뿐만 아 니었다. 상급기관이 타군현 수령에게 허가한 경우, 수령은 해당 제사를 직 접 인용하여 본관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수령이 행정기관과 의견이 대립되는 사례마다 목민관으로서 소속민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수령의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났다. 이러한 조정원칙은 사례연구에 한정되는 점에 유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백성에 가 장 가까운 통치권자로서 수령이 이와 같은 제도적 실제 적용과 조밀한 운 영절차를 통해 지방통치를 구현했다는 사례는 유의미하다고 생각된다. This paper traces the operation of the administrative network related to the local governor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 two main questions that have driven this study were; first, whether the institutional status of the local government was followed, and second, how the local governors coordinated administrative work with each other and higher-level agencies. The subject of analysis is Garimbocho, which contains official documents written by the governor of Imcheon-gun, Chungcheong-do from 1738 to 1740. Imcheon was the area where the exclusive officer of the army or navy chief of staff stayed, making it a suitable area to examine for the correlation between each agency. The answer to the first question was indeed positive. About 60 percent of the documents sent by the Imcheon-gun local governor to a provincial governor were official documents. A provincial governor acted as the chief executive agency within a given province to connect and organize Court , local governor, and local administrative agencies. The local governor handled tasks related to other areas through a provincial governor. In this process, the difference in official rank between the local governor and a provincial governor was not significant, and they were considered in the same rank for the task. This can also be seen in cases within the same. In cases of disagreements in opinions between other administrative agencies, the local governor maintained their position to prioritize official documents, local information, and residents. They would actively use administrative documents to provide evidence to carry out their arguments. An estimation of the expiration duration of administrative documents can be made from the case between Imcheon-gun and Seokseong-hyun which lasted for about 50 years. Local governor consistently shows cases of being responsible for their residents as a governor to protect and represent them. Studying this principle of compromising should take caution as these can be limited to the instance in case studies. However, as leaders who are closest to the people, this case of successfully applying institutional and practical applications and dense operational procedures to their region reign is signific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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