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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통합 연구사: 정치학과 역사학의 접근

        신종훈(Shin, Jong-Hoon) 한국사학사학회 2012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25

        이 논문에서 필자는 유럽통합 역사서술의 역사를 정리한 후 앞으로의 유럽통합 연구전망에 대한 소견을 제시하였다. 구체적으로 195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유럽통합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접근법들이 분석되었다. 기존의 유럽통합사 연구에서 연구를 이끌어 갔던 학문분야는 정치학과 역사학이었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정치학 분야와 역사학 분야에서 유럽통합 연구를 주도한 경향들을 분석하고 비판하였다. 정치학과 역사학이 유럽통합은 연구하는 접근법은 서로 상이하였다. 정치학자들은 이론적 틀을 가지고 유럽이 어떻게 그리고 왜 통합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역사학들은 이론적 틀 없이 통합과정의 역사를 다루었다. 여기서 분석된 정치학 분야의 두 개의 중요한 이론은 신기능주의 이론과 자유주의적 정부간협력주의 이론이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유럽의 이상을 통합의 중요한 추동력으로 파악하였던 립겐스의 역사서술과 국민국가를 중요한 추동력으로 파악한 밀워드의 역사서술을 분석하였다. 정치학에서 최근의 연구 경향은 거대이론을 제시하려는 시도 대신에 유럽연합의 구체적 작동방식을 연구의 테마로 삼고 있다. 역사학에서의 최근의 연구경향은 사회사와 문화사의 영역으로 연구가 확장되었고, 유럽사회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유럽통합 연구에 있어서 정치학과 역사학의 통섭적인 소통이 여전히 요구되어지고 있다. In this article are historiography and future prospects of european integration studies summarized. The various studies about european integration from the second half of 1950s till today are here analysed. Because the political science and history have lead the trends of studies of european integration, this article analyse and criticize main studies in the political science and history. The political science and the history science has respectively different method of approaches. Political scientists have worked usually with theoretical framework. They have questioned how and why Europe has been integrated and what the future Europe will be. But historians are generally against theorizing. Without defined theory they have studied the development of european integration after the Second World War. Neofunctionalism and Liberal Intergovernmentalism as theories of politics are the two main theories here analysed. Walter Lipgens who saw european idea as a motor of european integration and Alan S. Milward who saw the nation-state as the most important force of european integration are the two important historians here focused on. In the studies of politics it has today given up to establish grand theory of european integration. Now political scientists focus their interests on the concrete modus operandi of European Union. In the historical studies the social and culture history recently interest in the development of european integration and the european society. The interdisciplinary studies between the political science and history are today more and more needed.

      • KCI등재

        반유럽연합 정서 확산 원인 분석 : 폴란드와 헝가리 사례를 중심으로

        한미애 한국세계지역학회 2019 世界地域硏究論叢 Vol.37 No.2

        This study aims to identify factors that impede the integration of the European Union through a case study. Can the European Union achieve “one Europe”? In 2004, the European Union accepted Central and Eastern European countries as its members. Several problems were raised at the time but appeared to be on the path to true integration through regional expansion. Recently, the European Union has been experiencing conflicts due to conflicting interests among countries, especially with Central and Eastern European countries. Why now do countries that have been trying to become members of the European Union consider leaving? In this study, we studied Poland and Hungary, two of the leading members whose national leaders commented on leaving the European Union. To this end, apply the concept of integration in European integration theory and the characteristics of political forces on European integration issue of Habermas to analyze what tendencies Poland and Hungary have on European integration issue, and find out why they are at odds with the European Union leadership. The study also seeks to identify a possible reduction in the integration of EU member states. Studies show that if the political power of the member states and the policy of the European Union differ from the interests of the member states, integration is hampered when there is a conflict between the member states and the EU leadership. 본 연구는 사례연구를 통해 유럽연합의 통합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유럽연합(EU)은 ‘하나의 유럽’을 이룰 수 있을까? 2004년 유럽연합은 중⋅동구권 국가를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지역적 확장을 통해 진정한 통합의길로 가는 듯 보였다. 최근 유럽연합은 국가 간 엇갈린 이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중⋅동유럽 국가들과 마찰이 잦아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진정한 통합을 지향해왔지만, 브렉시트(Brexit) 이후 ‘국민국가로의 회귀’와 ‘초국가로의 통합’에서 갈등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국가들이 이제는 왜 탈퇴를 고려하는가? 2005년 유럽 헌법 국민투표 부결, 2010년 남유럽 금융위기, 2015년 난민 문제 등으로유럽연합은 회원국의 탈퇴 고려를 염려하고 있다. 2007년 리스본 조약 체결, 긴축정책과 재정 지원으로 금융위기 극복 등으로 협력 강화에 노력하고 있지만, 이민자 쿼터제시행을 두고 많은 회원국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국가 지도자가 유럽연합 탈퇴에 관해 언급을 한 대표적인 회원국인 폴란드와 헝가리를 분석대상으로 연구하였다. 이를 위해 유럽통합이론에서의 통합의 개념과 하버마스의 유럽통합 사안에 관한 정치세력의 특징을 적용하여 폴란드와 헝가리가 유럽연합 통합 사안에 대해 어떠한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하고, 유럽연합 회원국의 통합 저해요소를 파악하고자 한다. 연구결과, 회원국의 정치세력의 성향, 유럽연합의 정책이 회원국의 이해와 상이한 경우, 회원국과 유럽연합 지도부 간 통합에 대한 지향점이 상충할 때 통합이 저해된다고 볼수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국가주의적 통합을 통한 사회적⋅경제적 보호 지향적 성향은 하버마스가 제시한 유럽통합 사안에 대한 반통합 우파 포퓰리즘적 정치세력들의 성향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되어진다.

      • KCI등재

        유럽연합 특허시스템의 대대적 변혁과 그 교훈

        김용진 한국법제연구원 2018 법제연구 Vol.- No.54

        In 2013 a new era for EU patent law system was launched. The creation of the EU patent with unitary effect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Unified Patent Court established a new legal framework on substantive patent protection and patent litigation in Europe. This year the EU Patent Package would become a reality. It includes a regulation on a unitary patent, a regulation on the translation regime and an international Agreement on the Unitary Patent Court. In contrast to the classical European patent, the post-grant life of unitary patent will be governed by the newly created unified patent court and it will have unitary effect. In this article, I highlight the effect of the unitary patent and the jurisdiction of the unified patent court over unitary patents (and ‘traditional’ patents granted under the EPC that are not opted-out) for actions in relation to patent infringement or to revocation of a European patent and to licences of right. This article explores on the one hand the relation between national patent, the classical European patent and EU patent with unitary effect and on the other hand the relation of unified patent court to the Brussels Ibis Regulation. Particular attention is paid to the institutional changes created by the unitary patent package abd the new supplementary forum that enables the UPC to hear disputes involving defendants from third States that relate to an infringement of a European patent and give rise to damage inside as well as outside the Union. Furthermore on the perspective North-east Asia this essay examines the lessons from the experiences of EU patent package. 최근 유럽특허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편됨으로써, 이제 유럽연합은 하나의 특허와 하나의 통합특허법원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2013년 유럽 특허법은 새 시대를 열었다. 유럽연합 차원에서 단일한 효력을 갖는 특허를만들고 단일특허는 물론 종래의 특허도 보호하는 통합특허법원을 설립함으로써 유럽에서 특허의 실체적 보호와 특허소송에 관한 새로운 법적 체제가 갖추어졌다. 단일특허(unitary patent)는 유럽연합법에 기초하여 만들어졌으며, 통합특허법원(unified patent court)은 유럽연합 차원의 협정에 의하여 탄생된다. 통합특허법원에 관한 협정이 올해 안에 발효되어 통합특허법원이 작동하면 새로운 유럽 특허법 체제가 마무리된다. 이에 따라2018년은 유럽 차원의 단일특허와 통합특허법원 시대를 개막하는 첫 해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논문은 단일특허의 효력 범위와 단일특허 및 전통적 의미의 유럽특허와 관련한 침해소송, 유무효확인소송, 권리의 라이선스 등에 관한 통합특허법원의 관할 범위를 조망한다. 종래의 유럽특허와는 달리 일단 단일특허로 취득된 경우에는 통합특허법원에 의하여 규율되고 유럽연합 전역에서 동일한 효력이 주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한편으로는, 국내특허, 전통적 의미의 유럽특허, 그리고 단일효력이 주어지는 유럽연합 특허의 상호간 효력 범위를 검토하고, 통합특허법원과 개정 브뤼셀규정과의 상관관계를 밝혔다. 특히 유럽연합 내외에서 손해를 발생시킨 유럽특허 침해 사건에 제3국인이 피고로 등장하는 경우에도 통합특허법원의 관할을 발생시키는 보충적 재판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발명을 적극 보호하여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재산제도를 벤치마킹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 이 논문은 최근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유럽특허법 체제를 분석하여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과 교훈을 도출하고, 이를 기초로 우리나라 특허법 체제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위한 법리의 개발과 실무의 운영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2018년 시행이 전망되는 유럽 차원의 단일특허와 통합특허법원을 집중분석하여, 2017년 초부터 시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관할집중 제도에서 수용가능한 부분과 개선해 나가야 할 방향을 탐구하였다. 무엇보다 우리 나라 개정법(민사소송법)이 추구한 관할집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할 집중에서 빠뜨린 가처분제도로 인하여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으로 본안인 침해사건이 범람하는 현상을 타개 내지는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중복관할을 당사자가 합의한 경우로 제한하고, 가처분항고 관할을 특허법원으로 이관시키는 내용의 법개정을 제안하였다. 나아가 유럽연합 제도에 대한 비교법적 고찰을 통하여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3국간 지식재산제도의 협력적 제도 방안으로 절차법적 통일을 넘어 실체법적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 KCI등재

        유럽의 아버지' 장 모네(Jean Monnet)의 언론활용과 유럽통합

        김유정(Kim, You-joung)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4 역사문화연구 Vol.50 No.-

        본 연구는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성공적으로 이끈, '유럽의 아버지(The Father of Europe)'로도 잘 알려진 장 모네(Jean Monnet)의 유럽통합 활동을 언론과의 관계 속에서 서술하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유럽의 아버지'라는 인물 중심의 신화적 평가 및 설명을 지양하고 활동 중심의 실행방식을 구체적으로 조명함으로서 모네의 역할과 영향을 살펴보는데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이러한 연구과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동북아 및 지역 공동체에 대한 필요성을 공유하는 협동적인 노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적극적인 언론활용과 언론인의 역할에 대해 시사점과 함의를 도출하는데 이 연구의 필요성을 찾을 수 있겠다. 장 모네는 특히, "필요성(la nécessité)"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의 유럽통합 철학은 필요성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정황(circonstances)"중심의 사고와 연결되어 있는데, 따라서 모네의 유럽통합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구체적인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네의 유럽통합 활동에 관한 연구는 그의 유럽통합 철학을 이해하는 직접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유럽통합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는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던 장 모네에 관한 신화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정치 및 저널리즘적 설명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모네의 역할과 영향을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여러 전문가 집단들과의 소통 및 그를 활용한 방식은 모네의 유럽통합 성공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특히, 유럽통합 지식을 유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로 모네에게 언론과 언론인과의 네트워크는 매우 중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늘 언론인들과 함께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언론인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곤 했다. 다시 말해, 모네는 지역 공동체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 없이는 그에 대한 필요성을 공유하는 협동적인 노력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앞으로 한반도 평화정착과 이를 위한 동북아 협력을 이루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모네의 언론활용 통합 방법론이다. 국내에서 모네에 관한 연구가 유럽통합 사상의 내용 보다는 유럽통합을 실현하는 방법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함도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는 장 모네와 언론인들과의 관계에 한정하여 그의 소통방식과 유럽통합 사상이 어떻게 언론인들과 공유 및 유통되는지 살펴보며, 아울러 언론 속에 장 모네와 유럽통합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The aim of this study is analyzing of activity of Jean Monnet, who is known as 'the father of Europe', for European integration. In order to understand his idea and philosophy for European integration,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method of Jean Monnet for realizing in European integration. Jean Monnet was greatly emphasized on the "necessity (la nécessité)".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his philosophy of European integration is emerged from the recognition for the necessity that is connected with the "context (circonstances)". That is the main reason why we have to focus on his method for European integration, instead of his philosophy. Specially, this study is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Jean Monnet and journalists. This study will allow us to understand well the specific way of realization of European integration by Jean M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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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의 유럽통합 방안과 전쟁 포스터의 이미지 전략

        최용찬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2018 통합유럽연구 Vol.9 No.2

        유럽 통합의 역사에서 히틀러의 유럽통합 방안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둘러싼 학계의 논의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유럽통합 방안의 정체성의 문제를 나치 시대에 제작된 전쟁 포스터의 이미지 전략에 주안점을 두고 분석해 본 결과, 히틀러의 유럽통합 방안은 ‘전쟁을 통한 통합’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나치식 버전이라는 귀결점에 도달했다. 히틀러의 유럽통합 이데올로기는 특히 반유대주의, 승전주의, 반볼셰비즘 등 나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교묘하게 뒤섞이면서 매우 공격적인 이미지 전략을 구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의 유럽통합 방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추구해온 ‘평화를 통한 통합’의 궁극적 실현이라는 유럽연합의 지상 목표와는 대조적인 부정적 유럽통합 방안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 독일과 유럽연합의 유럽통합 방안은 전쟁과 평화의 거리만큼이나 개념 자체가 전혀 다른 통합 구상이기 때문에 상호 불연속적이라고 평가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 KCI등재

        유럽 통합의 반자유주의적 기원 : - 1950년대 프랑스의 기독교 문명 운동과 서독의 서구 운동을 중심으로 -

        박혜정(Hye Jeong Park) 한국사학사학회 2017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5

        본고는 프랑스의 기독교 문명 운동과 독일의 서구 운동을 현미경 삼아서 유럽 통합의 반자유주의적 기원의 한 축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양 운동은 반자유주의, 반민주주의, 반근대주의에 기반한 기독교 보수 담론과 운동이 어떻게 보다 자유주의적 기원의 여타 유럽 통일운동들만큼이나 유럽 통합에 깊이 연루되어 기여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볼프강 슈말레와 같은 유럽주의적 역사가들이 반자유주의적 사상을 반유럽적인 것으로 낙인 찍어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우선 기독교 문명 운동은 서독 연방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 하에서 반공산주의적 선전 기구로 발전하는 길을 걸었다. 비록 서구 운동에 비견할만한 유럽 통합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기독교 문명 운동이 유럽 통합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1950년대 유럽 통합의 원동력은 일차적으로 반공산주의에 의한 유럽분단에서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서독의 VFF나 프랑스의 평화와 자유와 같은 수많은 유사한 반공주의 단체들뿐만 아니라, 독일의 유럽-연합이나 프랑스의 UEF의 연방주의적 유럽 통합론자들도 유럽의 분단과 서유럽 중심의 통합을 냉전 시대의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했다. 서구 운동과 그 조직적 확장자였던 CEDI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이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스페인을 유럽에 묶어두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고 또한 드골주의가 유럽 내에서 확산되는 데에도 일조했다. 특히 후자의 역할은 전후 초반에 대세를 차지했던 연방주의적 유럽 통합론이 드골주의 확산으로 인해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간과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서독의 서구 담론과 CEDI 운동이 전통적인 기독교 대유럽의 비전을 냉전 시대에도 포기하지 않고 대유럽적 통합을 긴 호흡으로 추구했던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는 점은 유럽 통합과 관련하여 주목할만하다. 그것이 보수반동적인 정치관에서였든 중세적 보편제국에 대한 향수에서였든 CEDI의 중부유럽 지향적 비전의 고수는 서유럽 중심의 유럽 통합론이 대세를 차지했던 담론과 운동구도 속에서 차별적이고 장기적인 자극을 제공했다. This paper took the postwar French Civilisation Chrétienne movement and the postwar German Abendland movement as microscopes to look into an anti-liberal Origin of European Integration. Both movements can recount a story about how conservative Christian movements based upon anti-liberalism, anti-democratism, anti-modernism have contributed to European integration as much as other European integration movements with more liberal orientation. These stories could hardly come to light, because Europeanist historians like Wolfgang Schmale have stigmatized the anti-liberal ideas as the non-European. The Civilisation Chrétienne movement took its developmental path into an anti-communist propaganda agency under the strong financial support of West German federal government. Although Civilisation Chrétienne movement never developed into such an European integration movement as the Abendland movement, we cannot discredit this movement for European integration, because the main driving force for European integration in the 1950 was the division of Europe based upon anti-communism. Not only the major anti-communist organizations like VFF or Paix et Liberté but also federalist European integrationist organizations like Europa-Union or Union Européenne des Fédéralistes took European integration centering around Western Europe as the most realist and rational solution. The Abendland movement and CEDI as its organizational extensio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tegrating Spain into Europe when Francoist Spain was totally isolated, and in helping Gaulism to spread in Europe, which eventually led to defeat the federalist faction in the European integration discourse. Above all, it is noteworthy that the Abendland movement which did not give up the traditional vision of Christian grand Europe even during the Cold War era was the only force which pursued the integration of grand Europe over the long haul. Whether out of a reactionary political philosophy or out of a nostalgia for the medieval universitas, the Central-Europe-oriented vision of the Abendland movement provided a very distinguished and persistent stimulation in the middle of the time when the European integration centering around Western Europe was considered as the dominant solution.

      • KCI등재

        장 모네(Jean Monnet)의 지식인 네트워크와 유럽통합

        김유정 한국유럽학회 2013 유럽연구 Vol.31 No.2

        The objective of this paper is to underline “the Methode of Jean Monnet for Europe”, focusing on the role and influence of his knowledge network in the processes of European Integration. Following the mention of Jean Monnet,“not the coalition of the nation, but the unification of the people”, “the methode of Jean Monnet for Europe” is significant for understanding about not only the philosophy of Jean Monnet for Europe but also the action of Jean Monnet for the construction of Europe. There is no doubt that Monnet understood the success of European Integration as a result of collective efforts of trans-national knowledged and expert groups. In particular, as a Hub of communication between these intelligent networks, Jean Monnet tried to recruited the cross-border european politicians, the small european experts and journalists, and developed the ideas of construction of Europe. 본 연구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성공신화의 주역 장 모네(Jean Monnet)의 유럽통합 실현방식에 관한 연구이다. 제도나 물리적 결속이 아닌, 국경을 초월한 지식네트워크 의 형성과 그를 통한 “사람들의 통합”이라는 실천과제를 통해 유럽통합을 이루려고 했던 장 모네의 구체적인 유럽통합 방식을 살펴보는데 본 연구의 주된 목적이 있다. 종종 장모네 유럽통합 방법(The Method of Jean Monnet for Europe)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모네는 유럽통합을 여러 지식 전문가 그룹의 총체적 노력의 결과로 이해했다. 가장 대 표적인 것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지식 네트워크와의 관계며 그 활용을 통한 유럽통합 실현방법이다. 특히, 정치가, 지식인 그리고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유럽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이들 소그룹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유럽통합 사상을 생산⋅통합하고 구체화했던 모네의 방식은 유럽통합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합 방법으 로 제시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장 모네가 관계한 국경을 초월한 지식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장 모네 연구의 현재적 의미와 지식 네트워크와의 관계에서 소통의 중심(Hub)으로서 보다 조직적 이고 구체적인 지식 네트워크를 통해 국경을 초월한 공동의 이해관심 및 목표를 소통하게했던 모네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KCI등재

        여성 지식인의 유럽통합 기여에 대한 고찰 : 루이즈 바이스

        심성은(Sungeun SHIM) 통합유럽연구회 2019 통합유럽연구 Vol.10 No.1

        유럽통합 및 유럽공동체 관련 사상가와 정치인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남성 사상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는 그 수가 더 적은 편이다.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 부족은 여성의 유럽통합에 대한 기여가 극히 적었던 것 같은 편견을 야기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불리한 사회,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방법으로 유럽통합에 일조했다. 루이즈 바이스 등의 여성 지식인은 유럽통합 사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던 간전기부터, 유럽통합이 실현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유럽공동체 창설과 유럽통합 발전에 적극 참여했다. 바이스의 업적은 1990년 들어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는데, 그나마도 업적의 일부분만 연구되는 등 미흡한 점이 있었다. 본 연구는 바이스의 유럽통합에 대한 업적을 언론인, 교육가, 문필가, 유럽의회 의원 등 다각도로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둔다. 그녀는 20대에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평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간전기에는 국제정치 주간지인『새로운 유럽』, 고등교육기관인 신평화학교 등을 운영하며 아리스티드 브리앙 등 뜻을 같이 하는 지식인들을 적극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냉전 시기 갈등을 책과 다큐멘터리, 사진 등으로 제작해 양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통합에 대한 노력과 프랑스 여성 투표권에 대한 주장에 관해 증언했다. 유럽통합을 통한 평화구축을 희구하던 바이스는 1979년, 유럽의회 첫 직선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어 유럽공동체 내에서 직접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바이스는 유럽공동체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여성 지식인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Studies on important figures who made a contribution to European integration focused in general on male intellectuals. It is difficult to find such researches on female intellectuals in France where women’s suffrage was introduced only in 1944. It may create an illusion that there were not a female contribution for European integration, or at least that they played very limited role. Yet, it should be noted that, despite of unfavorable social and political circumstances, women intellectuals actively participated in European integration. Women intellectuals, including Louise Weiss, took a part not only in shaping ideas for European integration during interwar period, but also in realization and development of European Communities after World War II with view to prevent another war and strengthen a peace building in Europe. Recent studies since the 1990s shed light on Weiss’ works, but there are still some points to compensate because of their limited approaches. This paper aims to cast light upon Weiss’ role from multiple angles, as journalist, educationist, writer and member of the European Parliament. During World War I, she recognized importance of peace and, during interwar period, asserted European integration, based on a conviction that it could bring back peace to European people. She worked and established a solid network with other intellectuals, such as A. Briand, publishing L’Europe nouvelle and operating La nouvelle école de la paix. After World War II, she dedicated herself to publish books and was elected as a member of European Parliament in the first European election of 1979. Weiss should be reviewed and underlined as a female intellectual who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European integration.

      • KCI등재

        L'intégration européenne et la perspective future

        이승근 한국프랑스학회 2008 한국프랑스학논집 Vol.61 No.-

        유럽통합의 구상은 17세기 이래로 수세기에 걸쳐 유럽인들 사이에 제의되어 왔다. 1623년 프랑스의 크루세(Cruce)는 최초로 국가들과의 무역을 통한 통합 가능성을 강조하였고, 18세기 초 Saint-Pierre 신부는 ‘유럽상원’ 구성을 제안한 바 있다. 19세기에는 미국과 스위스의 연방주의 원칙, 독일의 관세동맹은 유럽통합의 사례가 되었고,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란 말을 Hugo가 최초로 사용하 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의 기능상실로 연방주의에 입각한 유럽통합의 움직임 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백작 칼레기(Coudenhove-Kalergi)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29년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Aristide Briand)은 국제연맹에서 유럽인들 사이에 연방제적 연결을 주장 한 바 있다. 이후 연방주의적 접근 통합 시도가 있었으나 독일의 침공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전후 1946년 9월 19일 취리히에서 행해진 처칠(Winston Churchill)의 연설은 유럽통합운동에 대해 고무적인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외상 슈만(Robert Schuman)은 1950년 5월 9일 슈만플랜(Schuman Plan)의 발표로 프랑스와 독일간의 석탄, 철을 공동의 고위기관 아래에서 생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1951년 4월 18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은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를 창설할 것에 합의하게 된다. ECSC의 발전에 따라 57년 3월 25일 체결된 로마조약을 통하여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창설되고 결국, 1967년 7월 1일 유럽공동체(EC)가 탄생하게 된다. EEC의 탄생 이후 50년 동안 중간에 여러 위기와 어려움이 있었지만 유럽연합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이러한 경험은 다른 지역의 통합을 위한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이를 바탕으로 한 지역통합체가 등장하고 있다. 하스(Haas)의 신기능주의 접근에 따르면 EU는 경제공동체인 EEC의 발전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고, 파급효과(spill over)에 따라 결국 성숙된 통합 단계로 정치적 통합에 이르게 된다. EC와 EU의 성장과정에서 궁극적인 통합 목표인 정치통합을 위해 경제통합과정이 지속되어 왔고, 2002년 1월 단일통화의 실질 사용으로 성숙된 유럽통합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기구가 너무 산만하게 분포되어 있고, 집행위원회에 역할이 많이 집중되어 있어 유럽시민들에 의한 민주적 통제가 힘 든다는 점, EU가 2007년 까지 27개국으로 확대된 결과 효율적인 EU 중앙기구의 구성이 어려운 점 등이 제기 될 수 있다. 미래 전망으로 첫째, 2004년 6월에 조인된 헌법이 현재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의 국민투표의 부결 등으로 인해 채택이 유보된 가운데 27개국의 입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헌법안을 새로이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둘째, EU가 슈퍼파워로 되려면 회원국 간에 더욱 단일한 목소리가 나와야 할 것이며, 공동의 방위력이 현재 갖추어져 있지 않는 점도 EU의 한계로 볼 수 있다. 셋째, 유럽안보 문제의 유럽화를 위해 ‘공동외교안보정책’(CFSP)과 ‘유럽안보방위정책’(ESDP)의 실현을 위해서 미국과 나토관계에 새로운 정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넷째, EU의 확대에 따라 2004년 25개국, 2007년 7개국으로 확대되었는데, 확대 문제에서 최대 현안은 터키의 가입이 될 것이다. 새로운 확대에 따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립과 유럽의 정체성문제, 27개국을 위한 기구 운영 등도 최대의 과제가 ...

      • KCI등재

        Geschichte der europäischen Wirtschaftsintegration : Bedeutung der Wiedervereinigung zwischen Süd‐ und Nordkorea für eine ostasiatischen Wirtschaftsintegration

        강득록 법무부 통일법무과 2010 統一과 法律 Vol.- No.3

        Das angestrebte Ziel einer regionalen Wirtschaftsintegration wird an dem Willen von Mitgliedsstaaten ausgerichtet. Unverändert bleibt die Ausrichtung, das Vorankommen von Mitgliedsstaaten zu unterstützen. Auf dem langen Weg finden sich weitere Etappen, etwa die Einrichtung einer FTA‐Zone oder die Zoll‐ und Währungsunion. Nach den zwei blutigen Weltkriegen bemühen sich die Europäer bisher über 60 Jahre darum, den europäischen Frieden wieder herzustellen. So führten diese Bestrebungen auch dazu, dass sechs europäischen Staaten eine wirtschaftliche Zusammenarbeit im Industriebereich mit Stahl und Kohle initiierten, wo diese Bereiche von der Nähe zur Rüstungsbranche geprägt sind, und bis heute wahrnehmen. Die europäische Wirtschaftsintegration ging weiter vertiefend über die Zollunion hinaus, auf alle wirtschaftlichen Angelegenheiten auf dem Binnenmarkt. Mittlerweile erschien die Notwendigkeit einer gemeinsamen Währung als eine weitere Folge. Die europäische Wirtschaftsintegration entwickelte sich allmählich zu der Europäischen Wirtschafts‐ und Währungsunion unter der Verantwortung der Europäischen Union. Ob die ostasiatischen Staaten ihre Schwierigkeiten auf ähnliche Weise lösen können, ist fraglich. * Doktorand an der Juristischen Fakultät an der Humboldt Universität zu Berlin, Economist der Koreanischen Zentralbank(The Bank of Korea) Im Vordergrund steht zurzeit die noch größere Frage, ob eine regionale Wirtschaftsintegration in Ostasien wirklich notwendig sei. Man muss sich klarmachen, dass es nicht nur einen einzigen Seidenweg zur erfolgreichen regionalen Wirtschaftsintegration gibt. Streben die ostasiatischen Staaten eine ähnlich starke Integration wie die in der der EU an, so sollten sie konsequenter Weise den europäischen Erfahrungen als ihr einziges Vorbild annehmen. Einer zukünftigen Wiedervereinigung der beiden koreanischen Staaten ist dieselbe Bedeutung der Deutschen Wiedervereinigung vor Abschluss des Vertrages von Maastricht beizumessen. 지역 경제통합이 이루고자 하는 최종목표는 이에 참가하는 국가들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경제통합이 그 과정에 참가하는 국가들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는 언제나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 참고로 지역 경제통합이 최종적인 종착지에 이르는 과정에는 자유무역지대, 관세동맹, 통화동맹 등 여러 다양한 단계들을 거치는게 일반적이다. 피비린내 나는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자신들의 평화를 다시 만들고 정착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유럽 주요 6개국의 석탄 및 철강 산업 분야에서의 경제협력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는 석탄 및 철강산업분야가 전쟁준비에 필수적인 분야이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경제통합 노력은 더 나아가 관세동맹을 거쳐 마침내는 모든 경제활동에 대한 유럽 단일시장 출범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유럽 공동통화 도입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렇게 유럽 경제통합은 유럽연합이라는 이름하에 유럽 경제 및 통화 동맹이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최근 유럽은 정치적 공동체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동아시아 국가들도 또한 지금껏 자신 나름의 경제 협력 또는 통합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들이 현재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들을 지금까지 유럽 국가들이 걸어왔던 길과 유사한 방법을 통해 해결할 지는 사실 의문이다. 이 의문의 해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은, 정작 동아시아에도 지역 경제통합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잊어서 안될 점은 성공적인 지역 경제통합에 이르는 유일한 실크로드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금 유럽이 달성한 정도의 경제통합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 유일한 본보기인 유럽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 직전에 이루어진 동․서독의 통일이 유럽 경제통합 과정에서 가졌던 의미를 미래에 있을 남․북한의 통일도 아시아 경제통합 과정에서 지녀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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