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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의 ‘元子’의 용법과 신라 중대 왕자들

        서정목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5 한국고대사탐구 Vol.21 No.-

        이 글은 『삼국사기』에서 원자라고 적힌 사람들과, 그렇게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을 정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4명, 백제 7명, 신라 3명 모두 14명의 원자가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제5대 모본왕, 제20대 장수왕은 즉위할 때는 ‘元子’로 적혔다. 그러나 유리왕이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왔을 때, 그리고 모본왕과 장수왕이 태자로 책봉될 때는 ‘왕자’로 적혔다. 고구려의 제5대 모본왕은 ‘대무신왕의 원자’로 적히고, 그의 형임에 틀림없는 대무신왕의 왕자 호동은 항상 왕자로 적혔다. 이는 원비의 첫아들을 ‘元子’로 적고, 원자보다 더 나이가 많은 次妃의 아들은 ‘원자’로 적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 제11대 東川王은 어머니가 酒桶村의 여인이다. 그는 산상왕과 주통촌의 여인 사이에서 비정상적 관계로 태어났다. 그는 태자로 봉해질 때 ‘郊彘’라고만 적혔고 원자나 왕자로 적히지 않았다. 태자로 봉해진 ‘교체’가 태자 시절에 낳은 아들이 ‘然弗’이다. 그러나 제12대 중천왕이 되는 이 연불도 ‘王孫’으로 적혔지 ‘元孫’으로 적히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혼외의 자식은 원자로 적지 않았고, 그런 아들이 낳은 왕의 손자도 원손으로 적지 않은 것이다. 신라 제32대 효소왕은 태자로 책봉될 때는 ‘왕자 이홍’으로 적혔다. 그리고 즉위할 때마저도 ‘신문왕의 태자’로 적혔다. 그가 결코 원자로 적힌 적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정상적 혼인 관계가 아닌 혼외 관계에서 태어난 왕자임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기록에 남은 원자 3명 가운데 原宗은 태자로 봉해질 때의 기록은 없고 즉위할 때는 ‘智證王元子’로 기록되었다. 法敏은 태자로 봉해질 때 ‘元子法敏’, 즉위할 때 ‘太宗王之元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687년 2월에 태어난 ‘신문왕의 원자’는 출생 기록만 있고 그 후의 기록에는 명시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글에서 필자는 ‘신문왕의 원자’는 691년 3월 1일 태자로 책봉된 ‘왕자 이홍’, 즉 효소왕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를 밝히기 위하여 ‘원자’의 자격 요건으로 ‘정상적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인가, 아닌가.’ 또는 ‘원비의 맏아들인가’ 하는 기준이 고려되었다고 제안하였다. 신문왕의 원자는 728년 당 나라에 사신으로 간 성덕왕의 아우 김사종이다. 그의 아들은 733년 당 나라에 사신으로 간 성덕왕의 조카 김지렴이다. 효소왕은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 오만 진신조에 의하면 677년에 태어났다. 677년은 문무왕 재위 중일 때이다. 만약 효소왕이 정상 혼인 관계에서 태어났으면 그는 ‘元孫’으로 적혀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항상 ‘왕자’, ‘태자’로만 적혔다. 신문왕과 신목왕후는 683년 5월 7일에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효소왕은 혼전, 혼외자인 것이다. 신문왕의 원자는 687년 2월에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신문왕의 원자는 태자로 책봉되어 효소왕이 된 왕자 이홍이 아니다. 신문왕의 원자와 문무왕을 제외하고는 신라 중대의 왕자들 가운데 원자로 적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원자들이 일찍 사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문무왕의 맏아들, 성덕왕의 맏아들, 경덕왕의 맏아들은 일찍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 왕자 김수충은 효소왕과 그의 왕비 성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714년 당 나라로 숙위 갔다가 717년에 귀국하였다. 4년쯤 신라 왕실의 사정을 관찰 ... In this paper, I scrutinize the usage of the term ‘Wonja[the first legal son of a King]’ in Samkuksaki. There are fourteen persons who were called Wonja in Samkuksaki: 3 in Shilla, 4 in Kokuryeo, and 7 in Baikje. King Yoori, Mobon and Jangsoo of Kokuryeo were recorded as Wonja when they succeeded the throne. However, Yoori was recorded as Wangja when he came to Kokuryeo, and Mobon and Jangsoo were recorded as Wangja when they were nominated as the Crown Princes. The 5th King Mobon of Kokuryeo was recorded as King Taemoosin's Wonja while the famous Wangja Hodong, who was the Prince of King Taemoosin and an elder brother of King Mobon, was always recorded as ‘Wangja Hodong.’ His mother was the second Queen of King Taemoosin. The mother of 11th King Dongcheon of Kokuryeo was a lady in Jootongchon. He was born in an abnormal relation between his father King Sansang and the lady of Jootongchon. Therefore, he wasn't recorded as Wonja. King Dongcheon's son Yeonbul was born when his father was the Crown Prince. However, Yeonbul who was to become the 12th King Jungcheon, was not recorded as Wonson which means the first legal Grandson of a King. The 32nd King Hyoso of Shilla was recorded as Wangja Ihong when nominated as the Crown Prince, and was recorded as Shinmoon's Thaeja even when he succeeded the throne. The fact that he was never recorded as Wonja is very significant. He must be an illegal son born out of normal marriage relation. Of the three recorded Wonjas in Shilla, Wonjong[King Beopheung] was recorded as Wonja when he succeeded the throne, and no records were remained on his nomination as the Crown Prince. Beopmin[King Moonmoo] was recorded as Wonja when he was nominated as Crown Prince, and succeeded the throne. But the case of King Shinmoon's Wonja who was born on February, 687 A.D., was not so simple and remains much to be discussed. I assert that King Shinmoon's Wonja is not the identical person with the Prince Ihong[King Hyoso] who was nominated as the Crown Prince on March 1st, 691 A.D. To prove this fact, I suggest a hypothesis that one of the conditions to be a Wonja is that the son should be a legal son who was born in a normal marriage or that the son should be the first son of the first Queen. King Shinmoon's Wonja is King Seongdeok's younger brother Kim Sajong, who went to Tang in 728 A.D., and his son is King Seongdeok's nephew Kim Jiryeom, who went to Tang in 733 A.D. King Hyoso must be born in 677 A.D. as Samkukyusa says apparently. When he was born, the King of Shilla was his Grandfather King Moonmoo. If he had been born in a legal marriage, he should be recorded as Wonson. However, he was always recorded as Wangja or Thaeja. King Shinmoon legally married Hyoso's mother Queen Shinmok at May 7th, 683 A.D. King Hyoso must be born in an illegal relation. The birth of King Shinmoon's Wonja was recorded on February 687 A.D. Therefore, the King Shinmoon's Wonja is not Wangja Ihong who was nominated as the Crown Prince, and to be King Hyoso. The fact that nobody except King Moonmoo and King Shinmoon's Wonja, was recorded as Wonja in the middle era of Shilla alludes that most of the first sons of Kings died in their early ages. The first sons of King Moonmoo, King Seongdeok, and King Kyeongdeok must have died early. Prince Kim Soochoong, the son of King Hyoso and Queen Seongjeong went to Tang in 714 A.D. and returned to Shilla in 717 A.D. After four years, Prince Kim Soochoong must have gone to Tang in 721 A.D. He became a Buddhist priest and eventually was made the first life-size golden Bodhisattva in Mt. Kuhwa, Ahnwhi Province, China. His name as a Buddhist priest is Kim Kyogak[金喬覺].

      • 원자력·화력발전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 적용 타당성 검토

        하능식,김진아 한국지방세연구원 2021 한국지방세연구원 정책연구보고서 Vol.2021 No.13

        □ 연구목적 ○ 본 연구는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에 대한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 적용 타당성을 검토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 - 지역자원시설세는 기본적으로 탄력세율을 적용할 수 있으며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과세할 수 있는 세목이고, 임의세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예외적으로 원자력발전과 화력 발전은 탄력세율을 적용할 수 없음 - 최근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도 관할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지역의 여건 등을 감안하여 세율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타나고 있음 - 과거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의 지역자원시설세 과세대상 편입 시 탄력세율 적용을 배제할 것을 조건으로 도입되었지만, 당시에 탄력세율 적용 관련 별도 논의가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하여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임 □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 외부불경제 및 내부화 수준 ○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에 대한 과세는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외부불경제의 내부화 일환으로 볼 수 있음 - 원자력발전에 대한 과세는 원자력발전소 설치에 따라 해당 지역에 상존하는 방사능 핵물질 오염 가능성이라는 위험요인 외부효과에 대한 교정과세적 성격이 있으며, 화력발전 과세도 환경오염이라는 외부효과에 대한 교정과세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음 ○ 원전의 외부비용 추정은 추정방법과 추정시기 및 국가에 따라 편차가 매우 큼 - 최근 우리나라 원전에 대한 연구로 이근대 외(2018)가 있으며, 여기서의 원전 사고위험비용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관련 폐로 및 배상 비용 예상추정액을 국내 상황에 맞게 보정하였으며, 2017년 기준 원전 외부비용은 킬로와트시(kWh)당 11.67~14.25원으로 추정함 ○ 조성진·박광수(2018)에 따르면 2018년도 기준 우리나라 원전 관련 제세부담금은 킬로와 트시(kWh)당 7.34원으로 추정됨 - 따라서 이근대 외(2018)에서 추정된 원전의 외부비용 대비 내부화 수준은 51.5%에서 62.9%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 화력발전에 따른 외부불경제 비용은 환경적 비용(environmental costs)과 비환경적 비용(non-environmental costs)으로 구분될 수 있음(김필헌 외, 2018) - 화력발전의 환경적 비용은 발전 과정에서 대기오염물질이 배출됨에 따라 건강, 자산, 농작물 피해 등과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피해 비용을 포함하며, 비환경적 비용으로는 사고 위험, 발전소 및 송배전시설 건설에 따른 사회 구성원 간 갈등 비용 등이 포함됨 ○ 이동규 외(2018)에서의 외부비용 추정을 보면 비환경비용은 최종 외부불경제 비용에 포함하지는 않고 환경적 비용만을 고려하였음 - 추정 결과 발전원별 발전량 기준, 1kWh의 전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환경비용은 LNG의 경우 21.13원/kWh, 유연탄은 61.79원/kWh임 ○ 현행 제세부담금 수준은 유연탄은 13.7원/kWh, LNG는 12.8원/kWh ○ 외부비용 추정결과를 바탕으로 볼 때, 발전용 유연탄과 LNG 연료에 대한 현행 제세부담금 수준은 내부화 수준이 매우 낮은 것으로 판단됨 - 유연탄의 경우, 추정 외부비용 대비 제세부담금은 19.8% 수준에 불과함 LNG의 경우, 추정 외부비용 대비 제세부담금은 60.6% 수준으로 나타남 □ 원자력 및 화력발전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 적용 방안 ○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 과세에 대해서도 과세자주권 확보 차원에서 탄력세율을 허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 - 지역자원시설세는 지방세 중 과세자주권 행사가 가장 활발한 세목이며, 기본적으로 표준세율의 50% 범위 내에서 가감할 수 있는 탄력세율 적용 허용하고 있으나,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 과세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함 ○ 탄력세율 적용의 필요성은 외부불경제 내부화 미흡,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사업의 차등화, 지역별 인구수에 따른 재정부담 격차 등 지역특성을 반영한 세율 차등화 및 자율성 강화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음 -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 모두 외부비용 대비 내부화 수준이 크게 미달하므로 교정 과세 차원의 세율인상 여지가 존재함 -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사업의 대부분은 자치단체가 사업시행 주체이며, 사업대상 지역도 발전소 주변지역에 집중되므로 지역별 특성화사업 수행 등 지역별 차등화가 필요함 -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의 확대로 원전 소재지별 인구수 격차가 더욱 확대되는 등 발전소 소재지별 인구수에 따른 재정부담 격차도 상당하므로 지역특성을 반영한 세율 차등화도 필요함 ○ 일본의 원자력발전 관련 조세제도는 우리나라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 도입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음 - 일본은 원자력발전과 관련하여 국세인 전원개발촉진세와 지방세인 핵연료세 및 사용후핵연료세를 동시에 과세하고 있음 · 국세는 전기사용량에 부과하는데 비해, 지방세는 핵연료 사용량 및 출력과 사용후핵연료의 중량 혹은 다발수에 따라 부과하여 중복과세를 피하고 있음 - 지방세로는 광역지방정부 도현세인 핵연료세와 기초지방정부 시정세인 사용후핵연료세를 동시에 도입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음 · 특히 2000년 4월 지방분권일괄법 제정 이후 법정외세 신설이 가능해짐에 따라 총무성장관의 동의하에 지방정부 조례를 통해 자율적으로 과표와 세율을 정할 수 있음 · 또한,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에 일부 원전들이 운전을 정지하게 되면서 핵연료세 세수가 감소함에 따라 일부 현은 폐로 원전을 과세대상에 포함시키고 가동 원전에 비해 약 절반의 세율을 부과하는 등 지역 및 발전소별 특성을 반영하는 세제를 운영함 · 이와 더불어 원전에 저장하고 있는 사용후핵연료에 대해서도 과세하기도 함 -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의 주변환경들은 지역별로 차이가 큰 데 비해 단일세율로 과세되어 지역 및 발전소별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일본과 유사하게 지역특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탄력세율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함 · 우리나라도 향후 운전을 정지하게 되는 발전소가 늘어나게 될 경우 세수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폐로 원전을 과세대상에 포함시키는 방법과 사용후핵연료에 대해서도 과세하는 방안과 함께 지역 및 발전소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탄력세율 제도 도입을 고려해 볼 수 있음 ○ 원자력 및 화력발전에 대한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은 다른 지역자원시설세 과세대상과 같이 표준세율 50% 가감안을 제안함 - 탄력세율을 표준세율 50% 가감하는 안은 현행 특정자원분 및 특정시설분 지역자원시설세의 탄력세율이 표준세율에 ±50%를 추가하는 방식이므로 원자력 및 화력 발전에 대한 탄력세율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안임 ○ 원자력 및 화력발전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은 가산 세율만 적용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세수효과를 살펴봄 - 50% 가산세율 적용 시 전국적으로 원자력분 736억 원, 화력분 575억 원의 세수증대 효과가 발생하며, 원자력분은 경북이 365억 원 세수가 증대하고, 부산, 전남, 울산 순이며, 화력분은 충남이 180억 원으로 가장 많고 경기, 인천, 경남 순으로 많음 ○ 원자력 및 화력발전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 적용시 재정효과는 가산 탄력세율을 적용하는 경우 보통교부세 산정 시 인센티브로만 작용함 - 전국 모든 자치단체에서 원자력 및 화력발전 지역자원시설세 탄력세율을 50% 적용하는 경우 보통교부세는 교부세 총액이 불변이므로 상대적인 세수증대 규모에 따라 자치단체별 효과가 다르게 나타남 · 시도 본청분과 시군분을 구분하여 교부세 효과를 산정하면 지역자원시설세 과세권을 보유한 시도 본청은 인센티브 효과로 1,276.9억 원의 교부세 증대효과, 과세권이 없는 시군은 동일 금액만큼의 교부세 감소효과가 발생함 - 이에 따라 50% 탄력세율 적용시 시도별 순 재정효과는 경북이 638.5억 원, 부산 375.0억 원, 충남 289.7억 원 등으로 순증이 발생함 · 이에 비해 세수증대분이 작은 시도의 경우 순 재정수입 감소가 나타나 전북 183.3억 원, 충북 121.8억 원, 강원 99.8억 원 등의 순감소가 발생함 □ 정책제언 ○ 원자력 및 화력발전에 대한 지역자원시설세에 대해서도 탄력세율 도입 필요성이 인정되고 있으며 탄력세율은 표준세율 50% 가감안을 제안함 - 이 경우 법령개정 사항으로 지방세법 제146조 제5항의 단서 조항인 “다만, 제2항제2호 및 제3호는 세율을 가감할 수 없다” 부분의 삭제가 필요함 ○ 전국 모든 발전소 소재 자치단체가 50% 가산세율 적용 시 원자력 부문은 담세력이 인정되며 화력발전 부문은 담세력이 인정되지 않으나, 전기요금 인상 요인은 극히 미미함 - 5개 발전자회사는 최근 당기순손실을 기록하고 있어서 화력발전 세수증대분을 감당하기 어려운 반면, 한국수력원자력은 2020년 6,50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여 원자력 세수증대분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담세력을 지니는 것으로 판단됨 - 전기요금인상 요인은 가산세율 50% 적용 시 최대 0.234% 수준이며, 주택분 기준 전기 요금 추가 부담액은 연간 206.8원, 월평균 17.2원으로 나타나 소비자 부담 증가분은 미미한 수준으로 볼 수 있음 ○ 원자력 및 화력발전에 대한 탄력세율 도입 방안은 조세의 공정성, 중립성, 단순성 등의 조세 원칙에 기초하여 도입의 타당성을 검토해야 함 - 원자력 및 화력발전에 대한 탄력세율 적용은 세율인상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내므로 정책당국은 탄력세율 도입의 논의, 결정, 실시의 모든 과정에서 사회적 협의 및 합의를 거침으로써 도입에 따른 사회적 갈등비용 및 경제 악영향을 최소화해야 할 것임 ○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 과세에 대해 탄력세율을 허용할 경우 조세수출의 우려가 있으나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의 경우 일반적 지방정부에 의한 기업과세에서 나타나는 조세수출과는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음 - 원자력발전 및 화력발전의 경우 발전과정 및 발전소 소재로 인한 외부불경제는 발전소 주변지역에 집중되는데 비해 발전소의 생산물인 전력의 소비 혜택은 전국에 걸쳐서 고르게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음 - 대부분의 지방세는 지방정부가 제공하는 다양한 공공서비스의 편익과 어느 정도 연계하여 과세되므로 해당 지역주민이나 기업에게 부담이 귀착되는 것이 바람직함 - 이에 비해 지역자원시설세는 원자력 및 화력발전소의 전력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외부 불경제 교정 목적이므로 전력을 소비하는 모든 소비자가 해당 세부담을 지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일반적 조세수출의 문제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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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착원자의 덮임율에 따른 Ag/Si(111)√3X√3의 구조 변화

        정호진,정석민,Jeong, Ho-Jin,Jeong, Suk-Min 한국진공학회 2008 Applied Science and Convergence Technology Vol.17 No.5

        제일원리계산 방법을 이용하여 Ag/Si(111)$\sqrt{3}{\times}\sqrt{3}$(이후로 $\sqrt{3}-Ag$로 표시) 표면에 은 원자가 추가로 흡착된 표면의 원자구조와 에너지를 조사하였다. 은의 덮임율을 0.02 ML에서 0.14 ML로 변화시켜가며 구조변화를 살펴보았다. 흡착된 은 원자들은 대부분 $\sqrt{3}-Ag$ 표면의 은 원자층의 작은 삼각형(ST)의 중간에 자리 잡았다. 특이한 것은 은 원자들은 은 원자층 보다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은 흡착원자(adatom)의 덮임율이 증가함에 따라 adatom들은 클러스터를 만들려는 경향을 보였다. 은 흡착원자들이 모인 클러스터의 에너지를 계산해 보면 흡착원자가 세 개일 때 가장 안정됨을 알 수 있었다. 이 삼원자 클러스터를 구성 단위로 하여 $\sqrt{21}{\times}\sqrt{21}$ 구조의 원자구조를 결정할 수 있었다. 각 덮임율에서 가장 에너지가 낮은 구조들에 대한 STM 영상을 시뮬레이션 해 보면 은 원자는 찬 상태에서 어둡게 보였다. 이는 은 원자가 기판으로 전하를 제공해 줌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자층의 구조변화가 STM 실험에서 보이는 미세한 특성까지도 잘 설명하였다. Using a first-principles total-energy method, we investigate structural and energy changes on Ag/Si(111)$\sqrt{3}{\times}\sqrt{3}$($\sqrt{3}-Ag$ hereafter) as the number of the additional Ag adatoms increases. The Ag coverage varies from 0.02 to 0.14 ML. Most Ag adatoms occupy the ST site, which is the center of small triangles of the substrate Ag layer that is composed of small and large triangles. One of the interesting adsorption features is that the adatoms immerse below the substrate layer. The total energy calculations show that the clusters become the most stable when the number of Ag atoms is three. This three-Ag cluster becomes the building block of the $\sqrt{21}{\times}\sqrt{21}$ phase that shows a large surface conductivity. The simulated STM images show that the adatoms look dark in filled-state images while bright in empty-state images. This suggests that the adatoms donate their charge to the substrate. The simulated STM images agree well with the experimental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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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탄의 매개된 세계상과 재지역화의 균열들

        공임순(Kong Im-soon)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서강인문논총 Vol.0 No.31

        이 글은 종전과 더불어 전후의 한반도 해방(자유)화의 조건이 쌀과 원자탄을 둘러싼 유언비어의 형태로 재연되고 있다는 점을 1장에서 지적했다. 쌀과 원자탄을 둘러싼 유언비어의 진위 논쟁은 한반도 해방(자유)화의 조건이 자립과 종속의 이중 계기에 노출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쌀의 풍작에도 불구하고 쌀 기근과 쌀 부족은 수입쌀에 뒤섞인 원자탄원료의 반입이라는 유언비어의 형태로 한반도가 미소의 양 패권국 사이에서 전장화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쌀과 원자탄과 관련된 유언비어의 진위 논쟁으로 불거진 셈인데, 이처럼 원자탄은 쌀과 더불어 아니 쌀 이상으로 한반도 주민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원자탄은 한반도 주민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대상이었다. 이 미지의 존재로서의 원자탄은 종전과 전후의 세계상에 대한 한 표지로서 원자탄의 가공할 파괴력과 평화적 사용에 대한 관심을 동시적으로 촉발했다. 하나의 세계이냐 두 개의 세계이냐라는 물음에 압축되어 있듯이 원자탄은 전 세계적인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을 강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자탄의 전쟁과 항구적 평화의 표상은 한반도 및 극동의 지정학적 운명을 비추는 거울상으로 작용했는데, 가령 한반도 및 극동이 원자탄의 폭발력에 비견되는 위험 지구로 인식되는 양상이 그러하다. 이러한 한반도 및 극동의 당면한 위기감은 한반도가 세계전쟁의 화약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요청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전후의 동시대적인 감각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또 한번의 굴절을 겪게 된다. 한반도가 제 3차전의 도화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주장은 원자탄을 사용해서라도 한반도의 적대 세력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으로 변전하고, 제 3차전에 대한 경고는 한국전쟁이 이미 제 3차전이라는 자기 임계점에 가닿게 된다. 이는 한국전쟁의 세계전화였으며, 한반도를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십자군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정치의 도덕화, 도덕의 정치화였다. 이러한 종전과 전후의 달라지는 세계 인식과 감각은 원자탄의 가상적 효력을 배경으로 전면전의 가능성이 전제된 새로운 공간창출의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한국전쟁은 칼 슈미트가 말한 원자탄(핵)의 발명이 체현하는 전면전과 지역전의 내적 균열과 모순을 보여주는 일례로서 그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What this thesis examines in the first chapter is that a condition for emancipation(liberal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s in postwar period had been reenacted in forms of rumor around rice and atomic bombs. The arguments whether or not this rumor around rice and atomic bombs is true revealed clearly that a condition for emancipation(liberal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was directly connected with the double moments of independent and dependent. The atomic bombs was the an unheard-of object which Korean people had never seen or heard of before. This atomic bombs as an unheard-of object had promoted concerns about the horrible destructive power as well as peaceful use of it as a mark about world picture in postwar period. As the question whether the world will be one world or two world illustrated well, atomic bombs made the world be standing at the crossroads of worldwide peace and war. This representation of worldwide peace and war around atomic bombs worked as mirror image reflecting geopolitical fate i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Far East, so to speak, it was aspect that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Far East were recognized as a danger zone equalled to destructive power of atomic bombs. But throughout the Korean War the insistence that the Korean Peninsula never to become the direct cause of world war Ⅲ changed the claim that the Korean War was already world war Ⅲ which was self-the critical point of the Korean Peninsula. That was to be world war the Korean War, and was to be moral of politics and to be politics of moral by positioning the Korean War the Crusades of free democracy. This changing recognition and sense of the world was done within the new movement for the creating of space implying possibilities for total war against a background of virtual effective of atomic bombs, then the Korean War was an certain instance that showed internal raptures and inconsistency between total war and local war embodying the invention of atom bombs what Carl Schmitt ca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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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탄과 스파이, 전후 세계상의 두 표상: 보이지 않는 중심과 관리(통제)되는 양심,내면의 지도

        공임순 ( Im Soon Kong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2 민족문학사연구 Vol.48 No.-

        이 글은 전후의 세계상을 원자탄과 스파이라는 두 담론 표상에 기대해 논의해 보 고자 했다. 이 글이 이러한 연구목적을 상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원자탄이 갖는 동시대적 위상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은 원자탄이 매개하는 전후의 원자/ 핵 시대의 개막을 알렸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형태가 갖는 ``절대전쟁``의 재형태화를 전후의 세계현실로까지 이어지게 했다. 원자탄이 매개하는 이 ``절대전쟁``의 재형태화는 전후 한반도의 달라지는 세계 인식과 연동하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과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회정치적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원자탄의 동시대적 위상과 관련하여 원자탄에 얽힌 스파이들의 형상 역시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의 담론 공간을 심심치 않게 장식했던 이 원자탄에 얽힌 스파이들의 면모는 ``절대전쟁``의 재형태화를 원자탄과 더불어 육화된 현실로서 각인시키는 ``운동/ 이동하는 신체성``의 탈(脫)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체현하게 된다. 원자탄과 원자탄에 얽힌 스파이들의 형상이 갖는 이러한 동시대적인 위상은 한반도 내 행위주체들의 주체형성과정과 동시적인 움직임이었다. 다시 말해 원자탄을 절대(궁극) 무기로서 또한 원자탄에 얽힌 스파이를 절대적 (궁극적) 적의 형상으로 재정립하는 전후의 원자/ 핵 시대의 새로운 적대관계의 양상은 전후 한반도도 비켜갈 수 없게 했던 것이다. 특히 소련이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는 1949년 후반기의 달라지는 세계현실은 1950년도 전반 기에 잇달아 출간된 스파이 관련 대중출판물로 가시화되었다. 『소련을 스파이하고』와 『제2차 세계대전 스파이 비화』 및 『스파이와 스파이』등의 이 대중출판물들은 소련의 원자탄 보유라고 하는 1949년 후반기의 달라지는 세계현실 속에서, 스파이들과 관련된 대중적 호기심과 위기감이 착종된 권력 테크놀로지를 광범위하게 작동시키게 된다. 이 글은 강영수가 편한『스파이와 스파이』의 전 세계적인 규모의 원자탄에 얽힌 스파이들의 형상이 1949년도 후반기에서 1950년도 전반기까지 전후 한반도의 신문지면을 달구었던 ``국제스파이 사건`` 및 ``적색 여 스파이 사건``과 짝을 이루며 전개되어가는 사회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른바 전후 한반도의 지역적 판본이라고 해도 좋을 이 다양한 스파이들의 형상은 원자탄에 얽힌 스파이들의 형상이 갖는 절대적(궁극적) 적대를 재연하면서, 한국전쟁의 절대적(궁극적) 적대관계를 예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 글의 최종 결론이다. This essay discusses a world picture in postwar period through atomic bomb and spies. It is two reasons that this essay has this purpose of research. The first reason is contemporary status having atomic bomb. Atomic bomb which was dropped on Japan at the end of World War II let the people know the atomic age of postwar and then reforming of ``absolute war`` having the form of total war in World War II led to the reality of postwar world. Being closely Connected with changing perceptions of the world in postwar Korean peninsula, this reforming of ``absolute war`` being mediated by atomic bomb has been taking socio-political effect which was reminded constantly geopolitical destiny and reality of postwar Korean peninsula. About contemporary status of atomic bomb, the spies involved in it is also problematic. This aspect of spies involved in atomic bomb enriching scursive space in postwar Korean peninsula was imprinted reforming of ``absolute war`` as embodied reality along with atomic bomb, embodying de-national identity of ``mobile / exercising body``. This contemporary status of atomic bomb and the spies involved in it was done coincidentally process of subjectification of agent in postwar Korean pen insula. Particularly, changing reality of the world at the end of 1949 which the Soviet Union was possessing atomic bomb was becoming visible to be publish continuously popular publications about the spies in postwar Korean peninsula. This essay focuses the socio-historical process that the spies involved in atomic bomb, it was narrating on Spy and Spy of Kang Young-Su, was being developed at the same pace with ``the event of international spy`` and ``the event of red woman spy`` heating pages of a newspaper in postwar Korean peninsula. There is final conclusion of this essay that this representation of various spies what we called regional version of postwar Korean peninsula reenacted absolute hostility having the spies involved in atomic bomb, and it get ready beforehand for absolute hostile relations of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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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착원자의 덮임율에 따른 Ag/Si(111) √3×√3의 구조 변화

        정호진(Hojin Jeong),정석민(Sukmin Jeong) 한국진공학회(ASCT) 2008 Applied Science and Convergence Technology Vol.17 No.5

        제일원리계산 방법을 이용하여 Ag/Si(111) √3×√3 (이후로 √3-Ag로 표시) 표면에 은 원자가 추가로 흡착된 표면의 원자구조와 에너지를 조사하였다. 은의 덮임율을 0.02 ML에서 0.14 ML로 변화시켜가며 구조변화를 살펴보았다. 흡착된 은 원자들은 대부분 √3-Ag 표면의 은 원자층의 작은 삼각형(ST)의 중간에 자리 잡았다. 특이한 것은 은 원자들은 은 원자층 보다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은 흡착원자(adatom)의 덮임율이 증가함에 따라 adatom들은 클러스터를 만들려는 경향을 보였다. 은 흡착원자들이 모인 클러스터의 에너지를 계산해 보면 흡착원자가 세 개일 때 가장 안정됨을 알 수 있었다. 이 삼원자 클러스터를 구성 단위로 하여 √21×√21 구조의 원자구조를 결정할 수 있었다. 각 덮임율에서 가장 에너지가 낮은 구조들에 대한 STM 영상을 시뮬레이션 해 보면 은 원자는 찬 상태에서 어둡게 보였다. 이는 은 원자가 기판으로 전하를 제공해 줌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자층의 구조변화가 STM 실험에서 보이는 미세한 특성까지도 잘 설명하였다. Using a first-principles total-energy method, we investigate structural and energy changes on Ag/Si(111) √3×√3 (√3-Ag hereafter) as the number of the additional Ag adatoms increases. The Ag coverage varies from 0.02 to 0.14 ML. Most Ag adatoms occupy the ST site, which is the center of small triangles of the substrate Ag layer that is composed of small and large triangles. One of the interesting adsorption features is that the adatoms immerse below the substrate layer. The total energy calculations show that the clusters become the most stable when the number of Ag atoms is three. This three-Ag cluster becomes the building block of the √21×√21 phase that shows a large surface conductivity. The simulated STM images show that the adatoms look dark in filled-state images while bright in empty-state images. This suggests that the adatoms donate their charge to the substrate. The simulated STM images agree well with the experimental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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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의 영도(零度), 원자탄과 전쟁 : 『원형의 전설』과 『시대의 탄생』을 중심으로

        권보드래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12 한국문학연구 Vol.0 No.43

        1960년대 초·중반 남·북한에서 각각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장편소설『원형의 전설』과 『시대의 탄생』은 드물게도 원자탄이라는 핵무기를 화소(話素)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된 이래 핵무기는 언제나 한반도의 운명과 가까이 얽혀 있었다. 일본제국으로부터의 해방에 계기가 된 것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국에 의해 원자탄 사용계획이 검토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북한 각각에서 핵에너지 및 핵무기에 대한 관심이 계속된 끝에, 2005년에는 북조선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다. 핵무기는 최초 개발 직후부터 과학을 초과한 과학으로, 세계의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자 인식론적 도전으로 취급받았던 만큼, 더욱이 한반도는 전쟁 및 휴전이라는 상황을 통해 그 무기의 사용가능성에 가까이 노출돼 있었던 만큼 문학에 있어서도 일정한 응전(應戰)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조선의 전쟁문학에서 간간이 원자탄의 공포가 상기됐던 데 비해 남한 문학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원형의 전설』이라는 문제적 소설에서도 인류의 종말이라는 가상적상황과 연결돼 알레고리적 용법으로 쓰였을 뿐이다. 반면 비슷한 시기의 북조선 소설 『시대의 탄생』에서는 원자탄이 한국전쟁의 근본적 변수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남·북한 사이 비대칭을 확인함으로써 전쟁 기억 및 이후 대응에 있어서의 차이 또한 확인하고, 동시에 아직도 인류가 적절히 응답치 못하고 있는 이 ‘과학을 초과한 과학’에 대한 사유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The Atomic Bomb marks the new phase in human history. It actualized the possibility of extinction of humans by humans, then transformed the traditional total-part relationship. Every local confrontation signifies a virtual world war and total destruction with the arrival of the atomic bomb. Korean war, which was the first local war after world war 2, was a typical exemplification of such a scheme, and the South and North appropriated the condition respectively. Korea had showed the ambivalent response toward the atomic bomb as the power of liberation and the threat of catastrophe from the experience of the bombing on Japan; however, against the backdrop of asymmetrical development of the atomic bomb in the U.S. and U.S.S.R, the South and North articulated the different attitude centering the bombing possibility in the Korean war. The South or the right wing in South supported the atomic bombing which was suggested by General McArthur, even with the exception such as The Myth of a Circle, while the North was overwhelmed by terror of the atomic bomb which was vividly represented in Daet'ong River or A Birth of the Epoch. Its traces had not been erased during the cold war period, and the influence is still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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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모형 교육 다시 보기

        서민석,이강영 한국물리학회 2020 새물리 Vol.70 No.2

        Among the atomic models proposed in the early 20th century, Rutherford’s atomic model with a tiny and heavy nucleus surrounded by light electrons, suggested by the experimental discovery of the atomic nucleus, is the basis of the present picture of the atom. We discuss the validity of the atomic model theoretically in this paper. The fact that the nucleus is much smaller than the atom and is just an accidental result of the observation that the nuclear force is much stronger than the electromagnetic force. Thus, a bigger nucleus would be physically allowed if the strong force were weaker. We show that the atom may look like Thompson’s plum-pudding model when the strong interaction is so weak that the nucleus is as large as the atom. We use Bohr’s atomic model first and solve the Schrodinger equation to confirm it. Eventually, Rutherford’s atomic model with a small nucleus is preferred by the relative strength of the strong force to that of the electromagnetic force. To reach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atom, we propose teaching the implications of a tiny nucleus. 20세기 초에 과학자들이 제안한 원자모형 중에서, 원자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발견함으로써 제안된, 아주 작고 무거운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가벼운 전자로 이루어진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이 현재우리가 알고 있는 원자의 모습이다. 본 논문에서는 러더퍼드의 원자모형 형태를 이론적으로 깊이 고찰한다. 원자핵이 원자보다 매우 작다는 것은 양자역학의 결과가 아니라, 핵력과 전자기력의 크기의 상대적인비율을 반영하는 결과이므로 만약 강한 핵력이 지금보다 약했다면 원자핵이 더 컸을 것이다. 만약 원자핵이 충분히 커서 원자의 크기를 넘어선다면, 원자의 모습이 양전하 안에 전자가 들어 있는 모양이 되어 마치톰슨의 원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본 논문에서는 우선 보어 모형을 이용해서 그러한 원자가 가능함을보이고, 슈뢰딩거 방정식을 수치적으로 풀어서 확인한다. 결국 작고 무거운 원자핵을 가지는 원자모형이옳은 것은 핵력이 전자기력보다 매우 강하다는 경험적 사실 때문이다. 원자모형을 가르칠 때, 이러한의미까지 가르친다면 자연의 기본 법칙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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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쿠로스의 원자론과 신의 문제

        송영진 ( Young Juin Song ) 한국동서철학회 2012 동서철학연구 Vol.65 No.-

        원자론은 원래 만물의 생성소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유물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유물론자들은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정신이나 영혼을 부정하고 신까지도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비판하고 부정한다. 그러나 원자론의 완성자로 불리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에서는 유물론자들이 부정하는 이러한 정신이나 영혼은 물론 신까지도 그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원자론에서 운동 원인론의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다. 원자론은 물질에 관한 이론이지만, 정신이나 신의 존재란 우리의 체험에 주어지고 이러한 존재를 원자의 운동의 관점에서 환원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에피쿠로스에서 정신이나 신은 물질의 현상으로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의 효과나 그 운동의 원인으로서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에피쿠로스의 신은 유물론자들이나 관념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신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생명체적 존재로, 그리고 그것이 아타락시아(ataraksia)의 행복과 선의를 지니고 있는 현실적 존재로 나타난다. 원자론자로서 신의 개념과 종교를 인정하는 에피쿠로스의 이러한 신에 관한 사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에피쿠로스가 전제하는 원자와 공허, 그리고 그것의 운동의 의미가 초기 원자론자들이 내세우는 원자와 공간, 그리고 그 운동원인 개념의 단순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각각 분화되고 질적으로 다른 이중적인 의미들을 지니게 됨에 따른 것이다. 그에 있어서 공간은 공허(kenon)와 실재하는 장소(chora)로 나뉘고, 원자(atom)라는 존재도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만물의 존재를 이루는 성질들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거나 다양한 질적 차이를 지닌 다양한 원자들, 특히 원자의 운동방식에 있어서 무게에 따르는 필연성에 따르는 원자 외에 자유의 원자의 경사운동으로 분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데에서 설명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원자론을 끌어들여 자신의 사상을 확립한 것은 원자론이 자연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윤리나 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하여서였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동기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미래를 지향하는 오르페우스 종교의 이원론적인 것과는, 달리 현생만이 존재하고 현생의 쾌를 인생의 목적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The atomism is known as materialism which explains the generation and destruction of all things in nature rationally so that the atomists deny the existence of soul and god But Epicuros who was the establisher of the complete atomism accepted not only the presence of soul but also the existence of god, and explained from a viewpoint. of atomism So Epicurus`` concept of god seemed to be a living being in atarakia(eudaimonia in a apatheian state) which must be different from the idealist``s concept of god. In order to be established such a concept of god, the simple concepts of the atom and the void(kenon) of the early atomist``s must be diversified as we can clarify in this paper the double meaning of atom which act necessarily or liberally in the one hand, and the void which exists really as a place(chora) or the real void in the other hand In this paper, we can explain how such a concept which contains double different meaning can be possible consistently from the A Einstein``s relativity theory of mechanics. Epicurus introduced such a concept of god in order to criticize the immoral characters of his concepts of the g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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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원자탄 공포를 낙관적 전망으로 치환하기까지-1959년 김산호의 <라이파이>와 한낙원의 『잃어버린 소년』을 중심으로-

        최애순 국제어문학회 2022 국제어문 Vol.- No.92

        본 논문에서는 1945년 미국의 핵실험 이후 전 세계에 퍼진 ‘인류 대재앙’의 공포와 영웅 소재 공상과학의 탄생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원자탄이 전 세계를 공포로 전염시켰을 때, 한국전쟁을 치른 남한이 처했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위치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고자 한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연재된 김산호의 <라이파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초인’ ‘거대로봇’ 공상과학 만화 모티프에 영향을 끼친 선구적인 작품이다. <라이파이>는 본격적으로 공상과학 만화의 시대를 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공상과학 만화의 원류가 되는 모티프를 담고 있어서 출발점의 의미에서 짚어보기로 한다. 1959년 <라이파이>가 연재되던 시기에 해방 이후 최초 과학소설이라 평가받는 한낙원의 『잃어버린 소년』을 함께 다루기로 한다. 1959년 한낙원의 과학소설에서는 <헨델박사>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에서 벗어나 우주인을 멸하기 위해 원자탄을 터뜨리는 결정을 내려 원자탄의 위력을 과시하는 쪽을 선택한다. <라이파이>가 정의의 사자를 내세우는 데 주력했다면, 『잃어버린 소년』은 원자탄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두 작품은 1959년 미국으로부터 원자로의 유입이 결정되고 그로 인한 공상과학에서의 원자탄은 두려움과 공포보다는 우리를 지켜줄 강력한 무기이자 에너지 자원으로 기능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유효한 지표라고 판단한다. 본 논문에서는 두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원자탄에 대한 혼재된 감정이 1959년 원자로 유입을 기점으로 낙관적 전망으로 치환되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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